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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루에르

- 뫼비우스의 띠 - 

12 ~ 23



  " 정말, 여기가 그때 그 사람들이 말한 루에르 마을이란 말씀인가요? "

  " 응, 그런거 같아. 일년 전 그 일로 인해 마을 곳곳이 붕괘된 곳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했어. 이 마을의 이름을 말이야. "

  루에르 마을이라고 쓰여진 팻말을 손으로 쓰윽 훑으며 나는 로빈에게 말했다. 로빈은 아무 말 없이 약간 생각의 여유가 필요한지 조용히 밖으로 나선다.

  " 루에르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혹시, 제가 생각하는대로 하실건가요? "

  로빈의 눈빛이 흔들렸다. 

  " 지금에서 그런건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러니까 굳이 그 일을 알 필요까진 없다고. "

  " 그. 그런가요? "

  " 하지만, 그때 그들이 우리에게 루에르 사람이냐고 물은 이유가 아직도 궁금해. 왜 그들이 다른 것도 아닌 왜 이 마을사람인지 확인했을 뿐더러. 왜 내 이름이 루에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들에 신성한 곳까지 데려갔는지. 그 점, 로빈도 궁금하지않아? "

  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로빈에게 말했고, 로빈은 나의 말에 더는 반박하지않는 눈빛이였다. 몇일 전, 아니. 그 이후에 시간이 많이 지났다. 동굴에서 본 사로이에 알 수 없는 최후까지도. 그는 왜 내게 자신들의 선조가 있는 곳까지 나를 데려간 것일까? 그리고 왜 그는 그렇게 알 수 없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따뜻해보였을까? 비록, 그 일로 인해 사건의 해명도 못하고 도망 쳐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 일이 자꾸만 머릿 속을 헤집는다. 

  " 루에르 씨? "

  " 로빈은 평소처럼 이 마을사람들의 일을 도와줘. 나 역시 그럴테니까. "

  "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지켜보자는 말씀이신가요? "

  " 아니. 하지만, 지금은 이럴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무턱대고 이 마을의 대한 사실을 알려달라고해봤자 그들의 눈으론 아직 우린 꺼림직한 불청객에 불과하니까. 한 며칠 같이 지내서 약간의 친밀도는 있을지 몰라도 그들은 전체적으로 신뢰하긴 힘들어. 단지, 그 일을 알기위해 잠시 그들과 어울리는 것뿐이지. "

  " 그럼 …. "

  " 당분간은 평소대로 지내자. 무턱대고 사실 확인을 위해 위험을 무릎 쓰는건 현명하지않아. 이곳에 지내면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진실까지는 파헤쳐봐야지. 그게 우리한테도 그들한테도 의심 갈 행동은 아닐테니까. "

  바닥에 쓰러져있는 팻말을 세우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디 가세요? "

  " 잠깐 바람 좀 쐬러. 금방 돌아올거야. 로빈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

  나는 그렇게 마을 밖을 나섰다. 마을이라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마을의 절반도 남지 않은 규모를 그들은 마을이라고 칭한다. 마을 밖은 온통 새하얀 모래 밖에 없다. 흡사, 내가 사막에 있는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황폐하다못해 고요한 이곳은 너무 내게 가혹했다. 그닥, 과거에 대한 생각이나 욕망을 가진 편은 아니였지만. 그때 사로이가 보여준 과거가 자꾸만 떠오른다. 첫번째 사로이가 보여준 과거는 거짓이라며 사로이가 내게 말했지만, 진정 내가 봐야 할 과거는 사로이의 소멸로 인해 물거품이 됬다. 뭐, 로빈에게는 말을 하지않았지만. 이 마을에 정착하기 전, 나는 로빈이 자는 틈을 타 잿빛 산에 되돌아간 적이 있다. 다행히 마키 족의 모습은 보이지않아 수월하게 산길을 올랐지만, 동굴에 다달았을 때 내 눈에 비친건 싸늘하게 식어있는 조각 뿐이였다. 당연히 그 조각은 빛을 잃고 깨져있었지만 말이다. 

  " 후우. "

  그 이외에도 수많은 잡생각이 머리를 흔들지만 그닥 나를 관여하진 못한다. 벌써 일년이란 시간도 흘렀고, 하다못해 어느 정도 이 시대에 적응했다고 난 믿고 있다. 물론, 내 동료인 로빈도 이 시대에 나보다 훨씬 전에 적응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내 가슴을 쥐어 짜는건 언제나 미즈오였다. 늘 그랬다. 이렇게 기분이 착잡하고 어두울 때면 언제나 그랬 듯 꿈 속에 미즈오가 내 앞에 나타난다. 물론, 그때 그 일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일이.

  " …. "

  뭐, 한쪽이라도 먼저 사과해서 그렇게 힘든건 아니다. 다만, 늘 내게 사과만 하던 미즈오에게 한번 쯤은 내가 사과를 해보고 싶었던거다. 나는 정말 그것 뿐이다. 미즈오가 내 앞에 나타나 내게 다가오면 나는 과연 미즈오를 보고 뭐라고 할까? 반갑다고할까. 아님, 잘 지냈냐고 물을까? 혹시 미안해라는 말을 하려나? 

  “ 미안해 ”

  가끔은 내 안의 목소리가 내게 외친다. 미안해라고. 넌, 뭐가 그렇게 미안한거냐. 나 하나도 부족해서 누군지도 모르는 너한테까지 그런 피해를 끼치는 이유가 뭐냐? 넌 알고있냐? 아님, 나와 똑같이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가끔 내 앞에 나타나는거냐? 미즈오처럼 말이야.


  " 뭘 그렇게 혼자 생각하는거야? 재밌는거면 같이 좀 알자. "

  미즈오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 어? 이게 뭐야? "

  " 손 대지마!! "

  나는 황급히 미즈오가 들고있던 물건을 빼앗아 주머니에 넣으며 미즈오를 노려봤다. 미즈오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한 듯 한참을 뚫어지게 나를 쳐다본다.

  " 그게 뭐길래, 그렇게 화를 내는거야? 그렇게 중요한거야? "

  " 다시는 내 물건에 손 대지마. 알았어?! "

  나는 미즈오를 향해 다시 한번 경고를 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것만 있으면 모든게 해결된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실험의 결정체가 말이야.

  " 루에르. "

  홀로 학교 뒷마당에 앉아 있던 내게 누군가가 말을 건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위를 살피자, 한 쪽에서 뻘쭘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즈오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 뭐하러 온거야? "

  " 사과하러 왔어. "

  " 뭐? "

  " 사과하러 왔다고. 네 물건 함부로 만진거에 대해서 말이야. "

  미즈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미즈오를 보며 또 다시 멈춰섰다. 

  " 미안해, 함부로 네 물건을 만져서. 자기 물건 만지는걸 싫어하는 널 알면서도 만져서 미안해. "

  미즈오의 목소리를 조금씩 떨려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 듯, 사과를 한 뒤에 미즈오는 내 품으로 달려왔다. 그럼 나는 또 다시 그런 미즈오를 꼬옥 안아주며 생각했다.

  ' 내일은 내가 사과하는거야. 별 것도 아닌데 화낸거에 대해 내일은 내가 미즈오에게사과하는거야. '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늘 똑같은 패턴이다. 미즈오에게 사과를 받고, 그 다음 날엔 내가 사과를 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 다음 날이 되면 새까맣게 까먹고 평소의 나로 돌아간다는 걸. 그리고 어느 날 또 미즈오에게 화를 내고 그런 미즈오는 내게 사과하고 또 다시 서로를 부등켜 안고 나는 또 후회하겠지. 하지만, 또 그 다음 날이 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나로 돌아가지. 지금에 나도 똑같을거다. 막상, 미즈오를 만나면 사과 대신 또 한번 화를 내겠지. 화를 내는 기준은 정해져 있지않아. 그저, 화가 나면 화를 풀 상대가 필요한거였다. 그 화풀이 대상을 미즈오로 정한거고. 그런데 그럴 때마다 사과를 하는건 내가 아닌 미즈오였고, 그럴 수록 나는 점점 퇴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가 바로 그 일이 아닌가하고 어느 날, 어느 시간 때마다 나는 줄곧 생각해본다.


  짧은 방황을 끝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나를 반기는건 역시나 로빈이였다. 내가 돌아오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로빈은 흙투성이였고, 마을사람들은 그런 로빈을 보며 포근한 웃음을 짓는다.

  " 무슨 일이 있던거야? 이렇게 흙투성이가 되고. "

  나의 물음에 로빈은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 마을에 고구마를 심었어요. 한 3달 후면 먹을 수 있다고 하네요. "

  로빈은 마냥 10대 소녀가 된 듯이 기뻐하는 미소를 자아낸다. 

  " 어이, 료우 군. 이만, 들어와서 밥이나 들지 그래. "

  " 아, 네. 곧 가겠습니다. "

  마을 어르신은 나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간다. 나와 로빈도 어르신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 자, 오늘은 쑥 수제비니 많이들 먹게. "

  " 감사합니다, 어르신. "

  " 잘 먹겠습니다! "

  나는 이 마을에서 료우라고 불리우고 있다. 사실 내 진짜 이름은 루에르지만, 료우라고 불리우게 된 이유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 료우 군, 어떤가? 맛은 있는가? "

  " 네, 맛있습니다. "

  " 허허, 그거 참 다행이군 그래. 많이 먹게. "

  첫번째 이유는 혹시나 이 마을사람들이 마키 족과 연관된 인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선다. 사실, 이 마을은 잿빛 산과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다. 단지, 그 사이에 호수가 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 사실상 잿빛 산의 마키 족과 연락이 닿기엔 별 어려움이 없는 마을이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때 마키 족의 입에서 나온 말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몹시 루에르 마을사람들은 싫어하는 눈치였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를 지나 경멸하는 눈빛이였다. 물론, 그들이 그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루에르 마을사람들을 싫어할 수는 있으나. 혹시, 그들이 루에르 마을사람들을 싫어하게 된 계기가 있을거라는 전제 하에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마을엔 우리는 모르는 일이 벌어지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 때문에 로빈 역시 이 마을에선 로빈이라는 이름이 아닌 코스우라는 이름으로 지낸다. 더군다나.

  " 이것 좀 드세요. "

  " 아, 고마워. "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로빈과 나는 부부가 되있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부부인 척을 하나, 그게 그리 쉽지는 않다. 아직 내 나이는 18살이고, 로빈은 대충 견주어봐도 20대 초반이니. 아직 결혼은 커녕, 학교를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도일텐데 부부행세를 하다니. 더군다나,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 마을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둔한 것 같다. 뭐, 로빈에 진짜 나이는 직접 들어야 알겠지만 말이다.

  " 아, 그리고 코스우 양. "

  " 네? "

  " 아까 코스우 양이 부탁한 것을 갖고 왔다네. "

  " 아, 정말요? "

  " 밥 먹고 나면 가져다 주겠네. "

  " 감사합니다. "

  잠시 내가 바람을 쐬러 마을 밖으로 나간 사이에 로빈이 나 모르게 마을 어르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모양이다. 조용히 밥을 먹고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 어르신에게 무엇을 부탁한거야? "

  " 옛? 아, 아니. 뭐 별거 아니에요. "

  로빈의 말이 수상하다.

  " 뭘 숨기고 있는거야? "

  " 숨기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

  로빈은 나와의 시선을 피하며 마저 밥을 먹는다. 나는 그런 로빈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동안 쳐다보다 숟가락으로 수제비를 떠먹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잠시 집 밖으로 나온 나는 아까 전 일을 다시 한번 로빈에게 되물었고, 로빈은 그 일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 신문? "

  " 네, 신문이요. "

  " 어르신에게 신문을 부탁한거야? 그것도 몇십 년 전걸? 도대체 왜? "

  " 혹시나 이 마을에 있었던 일이 신문에 실렸을지 몰라서 …. "

  로빈은 약간 의기소침해진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내 말대로 그저 평소처럼 조용히 지낼 줄만 알았던 로빈이 외외로 이런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서 약간은 놀라웠다. 하지만, 로빈 역시 이 마을에 오기 전에는 나보다 더 생존자를 찾으려 애를 썼지, 잠시 잊고 있었다. 

  " 아,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한게 있어요. "

  " 뭐? "

  로빈은 뭔가 떠올랐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며 내게 건넨다.

  " 이건 …. "

  뜻 밖에도 로빈이 건네준 물건은 다름 아닌 메달의 나머지 조각이였다.



  " 이걸 밭에서 찾았다고? "

  " 네. "

  왜 하필 이게 밭에 있던걸까. 내 오른 손바닥 위에 올려져있는 조각이 그때 사로이에게 건네준 그 조각의 나머지 조각인가? 하지만, 왜 어째서 이 조각이 다른 곳도 아닌 이 마을에서 발견된걸까. 그것도 마키 족이 그렇게 싫어하는 이 마을에서.

  "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

  " 뭘 말이야? "

  " 그 조각, 마을사람들에게 보여줄건가요? "

  로빈이 살짝 굳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로빈도 이 마을에서 이게 나온 사실에 대해 그리 탐탁치않은 눈빛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조각을 마을사람들에게 보여줬다간 분명 무슨 일이 생길거다. 행여나, 나만의 착각이라면 좋을텐데.

  " 루에르 씨? "

  " 일단은 모른 척 넘어가자. 이게 이곳에 나왔다는건 이 마을사람들과 마키 족 사이의 무슨 연결고리 같은게 있을테니까. 괜히 나섰다가 다치지 않는게 좋겠어. " 

  나는 바지 주머니에 조각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로빈은 나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는 로빈과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여느 때와 똑같이 잠에 든 나는 문득 꿈을 하나 꾸었다. 하지만, 그게 꿈인지 아닌지는 잘 구별하지 못하겠다. 꿈이라면 다행이고 꿈이 아니라면 좀 꺼름칙한 정도로 별로 좋은 꿈은 아니였던 것 같다. 다만, 그 꿈에서 사로이가 나왔다는 것만이 내게 잠시나 잊고 있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유 모를 사로이의 죽음과 더불어 그 이후에 도망쳐 달려온 마을이 다름 아닌 루에르 마을이라는 점. 그리고 그 마을 밭에서 우연히 로빈이 발견한 조각의 나머지 부분. 과연 이들은 무슨 관계가 있는걸까? 다만, 그것을 알아내는게 내 목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 루에르 씨, 루에르 씨! "

  아침 일찍 로빈이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루에르 씨라니? 여기서는 료우라고 부르기로 하지 않았었나?

  "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바라보았고, 시계바늘은 정확히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 때보다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는 시간대에 깨어나있는 로빈을 보자 뭔가 마을에 일이 생겼다는걸 직감한다.

  "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설마, 마키 족이 습격이라도 한거야? "

  나의 물음에 로빈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무 일 없다며 말한다. 

  " 아침 밥 드시라고 깨운거에요. 오늘 아침 일찍 어디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

  " 아, 그랬지. 조금만 기달려 금방 나갈게. "

  나의 말에 로빈은 방문을 닫는다. 나는 한참 방 안에서 잠시 멍을 때리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상을 차리고 있는 로빈이 보인다. 이렇게 보니깐 정말 로빈과 내가 부부가 된 기분이다. 허나, 그것도 이 마을에서일 뿐, 우린 지금 이 마을에서 단서를 찾고 있는거다. 다만, 그것을 잠깐 잊어버리는거지. 결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한건 아니니까. 

  ' …. '

  정신차리자.
  

  짧지만 길었던 느낌이 든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나는 서둘러 잿빛 산으로 향했다. 지난 밤, 조각을 지닌 채 그대로 있는 것이 조금은 껄끄러웠던 나는 굳게 마음을 다짐하고 잿빛 산을 갔다 오기로 했다. 로빈의 만류가 좀 있었지만 어찌 저찌해서 겨우 타일러서 잿빛 산에 갔다오는걸 승낙 받긴 했는데도 로빈은 꽤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런 로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걱정하지말라는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마을 밖으로 발걸음을 디뎠다.

 

  조심스럽게 접근해간 잿빛 산은 여전히 흑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삭막하다 못해 음침한 기운까지 느껴지는 잿빛 산에 다시 발을 딛는건 기분 나쁜 일이었지만, 이 일은 끝마치지않으면 찝찝함이 가라않지않을 것만 같다. 더군다나.

  ' . '

  이 조각의 비밀도 알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으니 말이다. 갑작스러운 사로이의 죽음으로 사로이가 우리에게 보여주려고한 그 날의 진실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해 궁금증이 있었을 뿐더러, 사로이와 함께 깨져버린 조각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 내게 그 나머지 조각이 들려있다는 것은 꽤나 큰 희망이였다. 그 조각이 그랬 듯, 내가 갖고있는 이 조각 또한 그 조각이 하려던 일을 한다면 나는 그 날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이 조각으로 인해 그 일의 진실을 알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껏 내가 알려고해도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겠지. 그리고, 마키 족과 루에르 마을의 관한 연관성 또한 알 수 있겠지. 그러니까 나는 이 조각을 들고 다시 한번 그 동굴로 가야한다. 그것이 내 마지막 집념이다.
  조심스럽게 산길을 따라 올라간 길은 여느 때와 달리 싸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아직 겨울은 커녕, 가을도 오지 않은 계절일텐데 벌써부터 몸에 한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 일이 생긴 이후 기후까지 변해버린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이 산의 기온과 루에르 마을의 기온 차는 크다. 단지 산의 고도로 인해 기온 차가 나는걸까? 하지만 이 잿빛 산이 그렇게 높은 산도 아닌데 이렇게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라면 ….

  " 후우. "

  산길을 따라 가는 길목이 꽤나 험난하다. 마키 족을 만나는 상황을 대비하여 그 산길과는 동 떨어진 다른 산길을 걷고 있는데, 이 산길을 오랫동안 사용하지않았는지 길의 구분이 잘 가지않는다. 자칫 정신을 놓고 걷다간 이 산에서 미아가 될 수 있는 상황. 로빈이 내가 떠나기 전까지도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로빈을 위해서라도 몸 조심히 다녀오는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도.
  그렇게 한참을 따라 올라가니 어느덧 정상에 다달은 듯, 하늘로 향해 조금씩 뻗어가는 태양이 보인다. 아직 시간은 이른 듯 보였다. 정상에 올라온 나는 주위를 살피며 동굴을 찾았다. 다행히도 내가 있는 곳에서 동굴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않은 것 같다. 나는 행여나 주위에 마키 족이 있음을 염려하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살금살금 동굴 쪽으로 다가갔다.

  " ! "

  동굴 외곽까지 다가간 내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려 퍼진다. 낯 선 목소리에 놀란 나는 몸을 최대한 숙인 채 그들의 눈에 띄지않는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동굴 안을 쳐다보았다.

  " 벌써 2주일 째야. 그 자식, 대체 어디로 숨어버린거지? "

  " 감히 우리 족장 님을 죽이고 도망을 가? 잡히기만 해봐라, 절대로 가만 안둬. "

  동굴 안에서 잡담을 떨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마키 족의 사람들이였고, 그 모습을 본 나는 황급히 동굴 뒤로 대피했다. 얼마 머지않아 그 두 사람은 투덜거리며 동굴 밖으로 나왔고, 나는 그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며 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 후우…. "

  한참 후에야 정상에서 내려간 그 둘을 본 나는 조용히 동굴 쪽으로 나왔다. 아직도 그들은 나를 찾아 해매고 있었다. 꽤 오랜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막상 그들에겐 그리 긴 시간은 아니였나보다. 뭐, 현실에서도 그렇게 오래된건 아니였으니 말이다.
  동굴 주위를 기웃거리던 나는 마키 족이 어디선가 나를 보고있지않을가란 피해의식에 빠진다. 하지만, 그건 역시나 나의 착각일 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동굴 밖을 서성이던 나는 주위에 나를 노리는 사람이 없다는걸 확인하고 조용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 ! "

  저게 뭐지?

  " 이건 …. "

  동굴 안에서 빛을 내뿜고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때 깨져버린 조각이였다. 어떻게 이 조각이 다시 빛을 뿜고 있는거지? 아니, 그 전에 어째서 이 동굴 안에 내가 있는거지?

  " 사로이가 말한 전사들의 영혼이라는게, 바로 이런 거였나? "

  !
  더군다나, 그 남자는 나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지? 왜, 갑자기 이런 환각이 내 눈 앞에 보이냔 말이야. 

  " 이제야 손에 넣은건가? 꽤나 오랫동안 뜸을 들이더군. "

  사. 사로이?!

  " 사로이 … ? "

  " 루에르 씨! "

  내가 있는 것으로도 모잘라 사로이와 로빈까지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지? 왜 이런게 ….

  " 어떻게 된거지? 왜 여기에 로빈이 있는거야? "

  혹시, 내가 과거를 보고 있는건가? 내가 지금 보고 있는게 환각이 아니라, 2주 전 내 모습을 보고 있는건가? 하지만, 어째서 ….

  " 약속대로 해가 지기 전에 전사들의 영혼을 가져왔으니 여자의 목숨은 이제 네 것이다. 첫번째 약속은 지켰다. 그리고 너는 내게 두번째 약속을 했지. 루에르 마을에 있었던 일을 알려달라고. 허나, 미안하게도 네게 거짓말을 한게 하나 있다. 내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네게 약속했다.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그리고 나는 너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대신, 그 이외에 일어나는 일엔 일체 참견하지않는다고 말했고, 너는 그 대답에 응했다. 그 결과 너는 나와 함께 1년 전, 이 세상이 멸망하기 이전에 세상에서 이 도시의 종말을 보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너는 약간의 망설임을 제외하곤 아주 훌륭하게 일을 책임졌다. 그러므로 너는 나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 되는거지. "

   "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도대체 너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길래 그런 말들을 하면서까지 이곳에 우릴 붙잡아두는거냔 말이다. "

   " 세상이 멸망하기 이전. 내가 너에게 보여줬던 과거는 거짓이다. 하지만, 이번에 너에게 보여줄 것은 한치의 거짓도 포함 안된. 그 날의 진짜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

  사로이가 들고있던 또 하나의 조각이 빛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후엔 사로이가 소멸되겠지. 나는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일이 진짠지 가짠지 헷갈릴 뿐더러,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저 빛으로 인해 사로이는 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기에 있는 나와 로빈은 지금에 우리와 같이 도피 생활을 할테지. 하지만, 그것만은 절대로 안돼. 그렇게되면 우리가 진정 알아야할 진실은 물거품이 된다. 막아야 해, 이걸 꼭 막아야 해! 

  " 그만둬!! "

  나는 사로이가 들고 있는 조각을 뿌리치며 서둘러 그 조각을 주웠다.

  " 이게 무슨 짓이지? "

  " 너, 절대로 이걸 만지면 안돼. 만지면 틀림없이 넌 죽을거야. "

  " 그게 무슨 말이지? 만지면 내가 죽다니? 그런데, 넌 대체 누구지? "

  " 너의 친구 루에르다. "

  " … 루에르? "

  나는 사로이에게 말을 건 틈을 노려 서둘러 동굴 밖으로 뛰쳐 나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조각만은 내 손으로 지킨다. 이것마저도 사라지면 이제 이 세상은 가망이 없어. 허겁지겁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나를 방금 전까지 동굴 안에 있었던 두 사람이 내 앞을 가로 막는다.

  " 아니? "

  " 어딜 도망가려고? "

  " 감히 우리 족장 님을 죽여? 너, 가만 안둬. "

  그들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며 들고 있는 창을 조심스럽게 집어 든다. 

  " 죽여주마. "

  " 잠깐만 기다려. 사로이는 죽지 않았어. 저 위에 있다고! "

  " 무슨 헛소리냐? 족장 님은 죽었어. 그것도 네 손에! "

  " 아니야, 정말 사로이는 살아있어. 저 동굴 안에서 봤단 말이야! "

  " 동굴? 그게 무슨 개소리야!!! "

  뚱뚱한 사내가 나를 발로 걷어차며 험상궂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 동굴 안에 족장 님이 있다고? 웃기는 소리 마. 그 동굴은 족장 님이 살해 당한 이후에 우리들의 손으로 메워졌다고. 그런데 어떻게 그 안에 족장 님이 있어?! "

  그 남자는 창으로 나를 위협하며 소리친다.

  "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전까지 너희들도 동굴 안에 있었잖아. 내가 이 두 눈으로 봤다고! 동굴은 전혀 메워지지 않았다고! "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않는 듯 서서히 내 쪽으로 창을 들이민다.

  " 이유가 어찌됬든, 널 죽이면 돼. 널 죽이면 된다고. 그러니까 더 이상 아무 말 하지마라. "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이 조금씩 나의 숨통을 조여온다. 어떻게해야 이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지? 이미 이들은 이성을 잃은 상태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도망은 커녕,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거야. 하지만, 이렇게 있어도 죽는건 매 한가지겠지. 

  ' …. '

  젠장 …. 로빈에게 꼭 무사히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부질 없는 약속이였군.

  " 죽어라!! "

  빌어먹을!!

  ' . '

  그 순간, 한쪽 손에 들려있던 조각이 빛을 내며 시야를 환하게 비추었고, 그 남자들은 갑작스러운 빛에 당황한 듯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나 또한 황당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살펴보았다. 두 남자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로 굳어버린 채, 도저히 사람의 얼굴이라고 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하지만 이 둘 뿐만이 아닌, 세상 전부가 시간이 멈춰버린 듯 바람 한 점도 불지 않는다. 

  " 대체 무슨 일이 …. "

  나는 또 다른 조각을 바지에서 꺼내며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고, 두 조각이 마치 서로를 끌어당기는 듯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 두 조각 사이의 묘한 기운이 조금씩 작용이라도 하는 듯, 나는 조심스럽게 그 두 조각을 서로 맞물려본다.

  " ! "

  조각과 조각이 맞물리는 순간, 그 조각이 하나의 메달을 만들며 알 수 없는 파음과 함께 사라진다. 메달의 파음에 인해 산 전체가 흔들리는 듯, 웅장한 기운이 대지를 움직인다.

  " 도대체 이게 무슨 …. "

  땅 위에 우두커니 서있던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벙찐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메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바닥 위에 곤히 멈춰있던 두 남자가 서서히 빛으로 인해 모습을 감춘다. 이 둘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 눈 앞에서 사라지고 있다. 들 푸른 하늘과 높게 뻗은 울창한 나무들. 그리고 하늘 위에 헤엄치듯 움직이는 태양 역시 하얀 공백만을 남긴 채 나를 두고 모조리 사라졌다. 나는 이 상황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방금 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하나 같이 바람과 함께 휩쓸려 사라진 듯 가물가물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사라진 지금. 이 공허한 배경에 있는건 나 혼자 뿐. 아무도 없다.

  ' …. '

  혹시, 그때처럼 나 홀로 남겨진건가? 1년 전, 알 수 없는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외톨이가 된 것처럼 또 다시 신은 나를 외톨이로 만들어 버린걸까? 대체 왜 나는 계속 외톨이가 되는거지? 내가 무엇을 했다고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게 없는데.

  “ 미안해 ”

  젠장, 또 이 상황에 미즈오 타령인가? 나란 놈은 늘 제멋대로 행동을 하는구나. 힘들 때만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찾는 것. 하지만, 그 친구가 나를 필요로 할 때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내가 미즈오를 떠올려도 되는걸까? 있을 땐 귀찮은 존재로만 여긴 친구를 필요할 때만 찾는 그런 이기적인 나를 미즈오가 좋아하기는할까? 언제나 내게 사과만 하고 언제나 네게 사과만을 받던 나는 도대체 왜 너에게 사과조차 못하게 이렇게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걸까. 미즈오, 너는 그 해답을 알고 있냐?

  ' …. '

  한번이라도 좋아, 한번만이라도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어. 제발 나를 혼자 남겨두지 마. 이제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게 되어 버렸으니까. 그런 허점투성이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 사람이 있을까? 그때의 나라면 이 상황에 처한 누군가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을테지. 나는 그런 인간이였으니까, 나는 그런 놈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를 누가 구원해줄까? 그렇게 지 혼자만 잘난 척, 위대한 척하는 나를 누군가가 이끌어줄까? 과연 그렇게 제멋대로고 이기적이고 차가운 나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누굴까?

  “ 정신 차려! 너까지 죽으면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안 남는단 말이야! ” 

  로빈 … ?


  " 루에르 씨! 루에르 씨! "

  누군가 나를 애타게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조금씩 내 귀에 들린다. 환하게 비췄던 시야가 조금씩 붉은 빛에 가려 세상이 조금씩 붉은 노을로 번져간다.

  " 루에르 씨, 정신차려요. 루에르 씨! "

  몽롱한 의식 속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 내 눈 앞에는 눈물을 흘리는 로빈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껴안고 있었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나는 그런 로빈의 눈물을 닦아주며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다녀왔어. "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던 지난 날의 기억들이 나를 집어 삼키려들 때, 내 손을 잡아준건 그 누구도 아닌 로빈이였다. 어둠 속, 아무 것도 보이지않는 시야에서 환하게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는 로빈이 나타났다. 그녀는 날 구원했다. 생전 처음 나를 본 그녀는 나에 대한 꺼리낌을 못 느꼈는지 나를 오랫동안 만나온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해줬다. 일년 전,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지않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아무런 진실도 깨닫지 못하고 죽어버렸을테지. 하지만, 그녀가 있어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있는 것이며. 이 진실을 찾아가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어느 순간부터 말이다.

  " 로빈 …. "

  로빈의 손은 따뜻했다. 그 어떤 때보다 더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나는 로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서서히 몸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로빈에게 손을 내밀며 그때 그녀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나는 로빈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겠다.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 이제야 눈을 뜬건가? 꽤 오랫동안 잠들어있더군. "

  " 너. 너 …. "

  순간 내 눈을 믿지 못했다. 로빈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올 때 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그 자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서서히 나와의 시선을 마주치며 그의 무거운 입술이 조금씩 벌어진다.

  " 어떠냐, 너가 보고싶었던 진실을 알게된 것이. "

  " 그게 … 무슨 말이지? "

  나는 이상하든 눈으로 사로이를 바라봤고, 옆에서 내 손을 꼬옥 잡아주던 로빈은 평소와 달리 안절부절한 모습이였다. 

  " 도대체 방금 전 나한테 있었던 상황은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

  꽉 막혔던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며 자츰 어두웠던 주위가 밝아지며 방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인기척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 이건 … 대체. "

  내가 서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늘. 그리고 나와 로빈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검붉은 혼령 뿐, 로빈이 불안에 떨고 있던 것도 이 때문이였나?

  " 사로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

  내 고함소리가 하늘 위에 울려펴지자, 주위에 우리를 지켜보던 혼령들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늘 위에서도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눈을 감던 사로이가 슬며시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연다.

  " 진실을 알게 된 기분은 어떻지? 그때와 똑같이 별로인가? "

  " 뭐 … ? 지금 그게 무슨 말이지? 진실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

  주위에 환경 탓에 심하게 흥분한 나는 사로이를 향해 소리쳤고, 사로이는 나의 물음에 묵묵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다. 로빈 역시 이 상황에 겁에 질린 탓인지 아까부터 몸이 심하게 떨린다. 이 상태로 로빈을 뒀다간 로빈도 무사하지 못할거란 걸 느꼈던걸까, 어느 순간 나는 사로이의 멱살을 붙잡고 하늘 위에 서있었다. 이성 잃고 떠도는 나의 모습에 사로이는 붉게 물드는 눈동자로 나에게 속닥거리듯 말한다.

  " 아직, 부족한건가? "

  " 뭐? "

  " 진실을 알기 전에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났어나보군. 하지만 괜찮다. 내 능력을 조금만 사용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해줄 수 있지.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또 다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이곳으로 돌아왔을 경우. "

  ' . '

  " 너와 저 여자는 죽는다. "

  !

  " 이 자식이!! "

  잃을대로 잃어버린 이성 앞에 나의 주먹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였고, 그 주먹은 이내 하늘을 가르듯한 굉음을 내며 천천히 흘러가던 하늘을 뒤흔들었다. 나조차도 상상 못한 상황에 잃었던 이성이 자츰 돌아오기 시작한다. 잠시 캄캄했던 세상이 조금씩 조각 조각 제 모습을 나타내듯, 내 앞에 사로이는 나를 무섭게 쳐다보며 나를 응시한다.

  " 너 …. "

  그때 사로이는 나의 입에 뭔가를 갖다대며 나의 말문을 막는다.

  " 단 한번뿐이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너와 저 여자는 물론이고, 우리를 포함한 아직까지 살아남은 인류까지 모두 파멸된다. "

  " 뭐, 뭐라고?! "

  " 꼭, 알아다오. "

  "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

  " . "

  " 사로이!! "

  내 손에 붙들려있던 사로이는 나를 밀치며 하늘 아래로 사라졌고, 내 뒤에서 불안에 떨며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하던 로빈 역시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하늘 위 혼자 남은 내 앞에 원인 모를 비구름에 휩쓸려 사라진다. 마지막까지 내 두 눈은 그 비구름 속에서도 로빈을 향해 비명치고 있었다.

  ' 로빈!! '

  마지막 나의 외침을 뒤로 하고 나는 또 한번 정신을 잃었다.
  

  문득,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 너 만약에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어떡할래? "

  때는 2011년 여름. 한참 지구멸망에 대한 이야기로 학교는 떠들썩했다.

  " 그게 무슨 시덥지않은 소리야. 세상이 멸망하다니? "

  " 너 인터넷도 안하냐? 요즘 그것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잖아. "

  " 아서라, 지구멸망은 무슨. 그런거 볼 시간에 글이나 한자 더 봐라. "

  " 뭐라고? "

  " 아하하핫. "

  교실 안,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는 나의 유일한 휴식을 방해한다. 모처럼 학교에서 내가 뭣 좀 하겠다는데 뭘 그렇게 방해하는 녀석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혹시, 내가 뭘 하는걸 누군가가 눈치채고 나의 일을 방해하기위해 일부러 교실 안을 흐리는걸까? 만약에, 만약에 그런 녀석이 있다면 ….

  " 루에르. "

  " . "

  " 루에르! "

  미즈오가 내게 소리치며 내 앞에 모습을 나타냈고, 나는 그런 미즈오를 보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 어, 루에르. 또 혼자 어딜가는거야!! "

 
  싫다. 누군가가 내 일을 방해하는건 싫다. 내가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부은 작품을 망쳐 는 인간이 싫다. 설령, 그 상대가 가족이라도 절대 용서하지 못할거다. 아니, 자칫하면 죽여버릴지도 ….
  학교 뒷마당에 숨은 나는 주위를 살피며 나를 방해할 요인이 있는지 하나씩 확인하며 조심스레 주머니에 들어 있던 병을 꺼냈다. 

  " 하아. "

  다행히 병은 무사했다.

  " 루에르! "

  숨을 헐떡거리는 미즈오가 내 앞에 나타났다.

  " 미. 미즈오…. "

  나는 그런 미즈오를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바지 주머니에 병을 집어 넣었다.

  " 너, 나한테 무슨 죄졌냐? "

  " 어? 아니, 그런거 없는데 …. "

  " 그런데 왜 날 보자마자 도망가고 난리야 사람 힘들게!! "

  " 그건 …. "

  제길 …. 이곳도 이젠 안전하지않은건가 …. 

  " 하여간에 너란 녀석은 …. 에휴, 됬다. 만날 얘기해봤자 내 입만 아프니까. "

  미즈오는 짜증이 가득 찬 얼굴로 내 옆에 앉았고, 나는 그런 미즈오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 뭘 봐. 이쁜 여자애 처음 봐? "

  " 미친 …. "

  " 뭐? 지금 뭐라고 했어. "

  " 아, 아니. 말이 헛나왔어. "

  자칫하면 내 속마음이 들킬 뻔했다.

  " 아무튼 …. 그나저나 그 소문 들었어? "

  " 뭐? "

  " 2012년에 세상이 멸망한데. "

  " 그래 …. "

  " 뭐야, 반응이 왜 그래? 너는 궁금하지도 않아? "

  아니, 전혀. 그딴 헛소문은 믿을 가치가 없지. 하물며 내가 할 일에 비하면 지구멸망은 아무 것도 아니야. 더군다나, 정말로 지구가 멸망한다쳐도 나는 전혀 아쉬울거 없다. 이렇게 썩어 빠진 세상이라면 없는게 백배 천배 나으니까 ….

  " 웃기지 않아? 자기들이 예언가랍시고 자기들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떠벌리는걸까? 미래에 뭐가 어떻게 되는지보다 내일 우리가 뭘 해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안되는걸까? "

  " … 뭐? "

  " 그렇잖아. 지금에 우리도 이후에 뭐가 어떻게 될지 예측도 못할 뿐더러, 그 머나먼 미래를 점 친다는게 우습지않아? 지들도 내일 있을 미래는 알아내지도 못하면서 무슨 재주로 그것보다 더욱 먼 미래를 어떻게 안다는거야? 정말 자신이 예언가라면 우리에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알려주는게 정상 아니야? 일기예보라는 것들도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어. 비 온다면서 해만 쨍쨍하고, 맑다면서 비가 폭우로 쏟아지는건 뭔데? 그런건 다 자기들을 알릴려고 하는 관심종자들이라고. 애초에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 말을 듣고 마치 진짜인 듯이 떠드는 애들이 더 바보 같지않니? 지들이 무슨 그 사람들처럼 예지를 할 줄 아나 멀 할 줄 아나. 그냥 TV나 인터넷에 떠도니까 지들이 더 흥분해서 날 뛰는거 아냐? 그래놓고 무슨 지진이나 태풍 같은게 오면 정말로 지구에 종말이 오는구나하고 생각한다니까. 바보 같이 …. "

  미즈오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왤까, 그 웃음이 쓸쓸해보였던 것은. 미즈오는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덩달아 옆에서 미즈오의 얘기를 듣고 있던 나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미즈오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 …. "

  뭔가 말을 해야될거 같은데, 왠지 말을 했다간 더 썰렁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나를 점점 짖누르기 시작한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인 채 묵념이라도 하듯 조용한 미즈오를 나는 조금씩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 나 …. "

  " . "

  " 죽을까. "

  " ! "

  뭐?

  " 이대로 죽으면, 지금보다 편해질까 …. "

  "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

  " 죽으면, 정말 괜찮을까. "

  " 죽다니 ….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

  나는 이상한 말을 하는 미즈오를 흔들며 정신차리라는 말과 함께 미즈오의 손을 잡아 당겼지만, 미즈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려 잡아 당긴 내가 미즈오 쪽으로 밀려나며 급기야 미즈오와 부딪친다.

  " 미. 미즈오 … ? "

  " … 추워. 추워 루에르. "

  " 미즈오? "

  " 제발 … 나를 혼자두지마 …. 제발, 나와 함께 있어줘. "

  " 미즈오. 미즈오!! "

  " 나와 함께 있어줘 …. 나와 함께 …. "

  " 미즈오!!! "


  
  점점 걷히는 어두운 장막 뒤로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미즈오의 미소가 어찌 그리 쓸쓸해보였을까, 하지만 나는 미즈오를 위해 해줄 수 있는게 없다. 손을 뻗으면 뻗을 수록 나와의 상극을 띠는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미즈오는 그런 나를 보며 울상을 짓는다. 그런 미즈오를 바라볼 수 밖에 없던 나는 눈물을 훔치며 미즈오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미즈오는 점점 내 눈 앞에서 사라져간다.

  
  " 미즈오 …. "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정신을 차린 내가 누워있는 곳은 다름 아닌 방 안. 더군다나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로빈을 보며 나는 수상함을 느낀다. 슬쩍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여긴. "

  맑고 청량하게 보이는 달빛이 비추는 곳, 나는 지금 루에르 마을에 있다.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 "

  머릿 속이 혼란스럽다. 
  
  " 하아. "

  마루에 앉은 나는 고요히 주위를 천천히 훑어 내려가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 . '

  문득, 주머니에 뭔가가 들어있음을 느낀 나는 조심스럽게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본다.

  " ! "

  주머니 안, 내 손에 잡힌건 둥그스럼한 형태의 차가운 성질을 띠고 있는 메달. 사라진 줄만 알았던 메달이 내 주머니 안에 들어있었다. 나는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메달을 쳐다보며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었다.

  " …. "

  과연 내가 본 것들은 대체 무엇이였을까. 갑작스러운 사로이의 등장,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내 눈 앞에 나타난 나와 로빈. 그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혹시 내가 정신이 나간 나머지 환각을 본걸까. 하지만 환영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생생, 아니 그건 진짜였다. 믿겨지진 않아도 그건 틀림없이 진짜였다. 하지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난건지에 대핸 아는 바가 없다.

  " 후우. "

  나오는건 한숨 뿐, 하지만 그 한숨마저도 크게 느껴진다. 고요하다못해 적막함이 흐르는 마을 안에 조용히 달을 올려다보고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약간은 웃긴 그림이 머릿 속에 그려진다. 

  " …. "

  “ 꼭, 알아다오. ”

  그때. 사로이가 내게 진정 말하려던 말은 무엇이였을까? 정말 내가 루에르 마을에 정체를 알아내는 것을 원했던걸까? 아니면 그저 나를 갖고 노는게 재미있어서였을까. 지금에 나로선 사로이가 말하려던 말에 진정한 의미를 떠올리지 못할거다. 아직 이곳에서의 일도 제대로 정리도 못하는 내가 사로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지. 하지만.

  " 사로이 …. "

  그가 사라지기 직전에 내게 건넨 이 메달만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뭔가 내게 지시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단지 달빛에 인해 빛나는게 아닌 순수 자기 스스로 발광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렇게 밖에 생각을 할 수 없는거다. 아무리 내가 그 일들을 되기억해도 나오는건 의문점들 뿐이니까 …. 그 점을 알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이 마을의 진실을 파헤치는게 나의 목적이다. 그것만 파헤친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의 근원을 알 수 있겠지.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 료우 군? "

  울타리 모퉁이에서 모습을 나타낸건 우리를 처음 맞이해준 료코 부인이였다.

  " 지금 이 시간에 안자고 뭐해? 아내랑 싸웠어? "

  료코 부인은 나를 슬쩍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그런 료코 부인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 그럼 여기서 뭐하는거야? 아직 젋어서 잠도 많을텐데. "

  " 달이 예뻐서 …. "

  " 어머, 료우 군도 참. 무슨 아낙네들이 할 말을 하고 있네. "

  료코 부인은 내 대답에 웃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나는 그런 료코 부인의 행동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 그런데 료코 부인은 이 늦은 시간까지 어디 갖다 오셨나봐요. "

  " 아니야. 단지 잠이 안와서 …. "

  료코 부인도 나와 똑같이 무슨 고민을 하는걸까? 미소 잃은 료코 부인의 얼굴엔 냉기가 도는 듯 싸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는 뭔가 료코 부인이 이상하다는걸 느끼곤 자리에서 일어나 료코 부인에게 이만 방으로 들어가보겠다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료코 부인은 나의 말에 자기도 이만 돌아가봐야겠다며 발걸음을 돌린다. 

  " 참. 그 조각 혹시 마키 족들꺼야? "

  ' . '

  " 마키 족의 물건이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한걸. 혹시 료우 군, 마키 족들이랑 친해? "

  료코 부인의 말에 잠시 멈춰선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료코 부인을 쳐다봤고, 료코 부인은 나를 섬뜩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 료. 료코 부인이 어떻게 이걸 …. "

  나는 황급히 메달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료코 부인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때 료코 부인은 언제 내 앞까지 왔는지 바로 코 앞에서 나와의 시선을 마주치며 뚫어지게 나를 쳐다본다.

  " 료. 료코 부인 …. "

  "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나를 포함해서 이 마을사람들은 마키 족들을 별로 좋아하지않거든. 하물며 그들이 지니고 있던 물건까지도 …. "

  료코 부인은 나의 볼을 톡톡치며 섬찍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모습을 감춘다. 나는 그 이후로 한참동안 발도 떼지 못하고 그대로 한동안 멈춰 서있었다.


  세상은 사라져도 밤과 낮의 구별은 역시나 뒤바낀게 없다. 둥근 해가 오늘 따라 힘이 넘쳐나는 듯 강열하게 뿜어대는 열기에 몸 구석 구석이 따갑다.

  " 도대체 이 세계의 기후는 어떻게 바뀌는거지. 완전 지 마음대로구만. "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투덜거리는 내 옆으로 로빈이 다가온다.

  " 여기 물 드세요. "

  " 어, 고마워. "

  로빈이 건네는 물통을 받아든 나는 단숨에 물을 들이켰고, 덕분에 방금 전까지 느꼈던 갈증이 사그리 사라진 듯 싶다. 하지만, 도리어 갈증은 또 다시 나를 괴롭게 만든다. 마을사람들을 따라 밭일을 하게 된 나는 이마에서 주르륵 흐르는 땀을 닦으며 뭔 놈의 날씨가 이렇게 더운지라고 투덜거리자 옆에서 묵묵히 일을 하던 로빈이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 조금만 참아요. 좀만 더 하면 끝나니까요. "

  " 로빈도 어떻게보면 참 독해. 이런걸 어떻게 하루도 아닌 매일 할 수 있는거야? "

  헥헥거리며 말하는 나를 보며 로빈은 피식 웃으며 말한다.

  " 그거 고작하는데도 힘든데, 마을사람들은 오죽 하겠어요? 다 살아남기위해서 억지로라도 하는거죠. 그러니까 루에 … 아니, 료우 씨도 힘내세요. "

  나는 황급히 로빈의 입을 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 …. "

  다행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 죄송해요, 료우 씨 …. "

  " 괜찮아. 다음에는 더욱 조심해줘. "

  " 네! "

  우리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으려면 일단 우리들의 본명이 마을로 새어 들어가면 안된다. 만약 잘못되서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면 이곳에 머물게 된 목적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더군다나 마을사람들 중 마키 족과 접촉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

  “ 나를 포함해서 이 마을사람들은 마키 족들을 별로 좋아하지않거든. ”

  지난 밤, 우연히 집에 들른 료코 부인의 행동에 큰 공포를 느꼈다. 지금까지 느껴볼 수 없던 료코 부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겁에 질린걸까. 하지만, 그때 료코 부인은 분명 다른 사람이였다. 그렇게 상냥하던 료코 부인이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을리가 ….

  " 코스우 양. "

  열심히 밭에 곡갱이질을 하던 중, 누군가의 낯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 어, 료코 언니. "

  !

  " 아침 일찍 마을 일을 돕는거야? 이야, 코스우 양 부지런한걸? "

  " 아, 감사합니다. "

  " 그나저나 오늘은 료우 군도 돕는거야? "

  " 아, 네. "

  " 그래 … ? "

  료코 부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본다. 

  " 그럼 료우군, 수고해. "

  " 아, 네. "

  " 아, 그런데 말이야. 료우 군. "

  " 네? "

  발걸음을 되돌린 료코 부인은 나를 쓰윽 쳐다보며 무언가 말할게있는 듯,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던 료코 부인은 주위를 살핀 후 조용히 내게 말했다.

  " 그 조각, 버렸어? "

  ' ! '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죠? "

  " 버렸냐고.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그들의 물건을 말이야. "

  " 그게 무슨 …. "

  그 순간. 나를 쳐다보며 웃곤 료코 부인의 얼굴은 일그러져있었다. 도저히 사람의 얼굴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황급히 로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나 하나 조심히 밭일을 거들던 로빈은 내 모습을 보곤 덩달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 왜.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

  " 료코 부인이. 료코 부인이 …. "

  " 료코 언니가 왜요? "

  " 료코 부인 얼굴이 …. "

  " 얼굴이요? "

  부들부들 떨고있는 두 손을 보던 로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슬쩍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 료코 언니는 아까 전에 마을로 돌아가셨잖아요. 몰랐어요? "

  " 뭐? "

  " 아까 료우 씨랑 저한테 인사하고 바로 돌아가셨는데. 도대체 뭘 본거죠? "

  " 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

  ' ! '

  로빈의 말에 재빨리 뒤를 돌아봤고, 나와 방금 전까지 마주보고있던 료코 부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말도 안돼 ….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였는데 료코 부인은 어디로 간거지? 아니, 그 전에. 료코 부인은 마을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기에서 …. 

  " 료우 씨? "

  " 아, 아무 것도 아니야. "

  "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

  " 아니, 괜찮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 그래요 … ? "

  도대체 …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대체, 사로이가 내게 말하려던 그것은 대체 ….

  " 료우 … 씨? "

  로빈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아니 이것은 굳었다고 보기에는 뭔가를 보고 겁에 질렸다는게 맞으려나? 들고 있던 호미를 바닥에 떨어트리던 로빈이 다급하게 내 쪽으로 달려오며 말한다.

  " 루에르 씨, 피해요!! "

  뭐 … ?



  팔이 … 뜨겁다. 

  " 제. 젠장 …. "

  " 루에르 씨!! "

  팔 한쪽이 뽑혀 나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 하아 … 하아 …. "

  깊게 몰이쉬는 숨소리와 함께 입가에 문득 번지르르한 핏물. 그는 시뻘건 입술을 혀로 빙글 돌리며 나를 무섭게 노려본다. 반쯤 잘려나간 팔뚝 살엔 검게 고인 피가 맺힐 뿐이다.

  " 대체 … 저건 뭐지? "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남자는 한참을 숨을 고르며 나와의 대치상태를 만든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로빈은 덜덜 떨리는 모습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런 로빈에게 저 자식이 가까이 갈 수 없도록 그 녀석과의 시선은 계속 마주치고 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빈혈기가 오는 듯 시야가 흐려진다. 

  " 크아아아!!! "

  가만히 서있던 남자가 이내 괴음을 지르며 로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 로빈!! "

  그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삽이 그 남자의 머리를 찍어 눌렀고. 주위에서 일을 거들고 계시던 마을분들이 서둘러 나와 로빈 쪽으로 달려온다. 같이 일을 하던 어르신 5분께서는 그 남자를 둘러싸고 조심스럽게 그 남자의 동태를 살핀다.

  " 크으으 …. "

  머리가 찢긴 자리에선 하얀 두개골이 모습을 보였지만, 그 남자는 고톹을 느끼는 것보단 우리에 대한 분노가 더 큰듯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어르신들 중 한명에게 달려가 어르신의 목을 조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4명의 어르신들은 일제히 들고 있던 삽이나 낫 같은걸로 그 남자의 몸을 찍어 내려갔고, 한참을 공격 당하던 남자는 이내 기력을 잃은 듯, 굳게 잡은 두손을 풀며 힘 없이 쓰러진다. 그 모습에 거친 숨을 몰아쉬던 어르신들 역시 힘을 많이 소진했는지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앉는다. 

  " 이번엔 소르만 댁 아들인가? "

  " 제길 …. 용케도 숨기고 있었구먼. "

  " 사라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군. 젠장,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소. "

  " 이번 녀석은 그나마 다행이게도 병이 퍼진지 얼마 안되서 우리가 간신히 제압은 했지만, 만약 이 이상의 녀석들이였다면 …. "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얘기하던 어르신들이 슬쩍 나와 로빈을 쳐다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온다. 어르신들은 나에게 괜찮냐는 말과 서둘러 상처를 치료해야한다며 들고있던 낫을 밭에 던져놓고 나를 이끌고 마을로 향한다. 나는 로빈을 돌아봤고, 로빈은 그런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 상처에 병균 같은게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어르신은 힐끗 나의 팔을 보며 말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오른쪽 팔을 들어 올리자 잠시 잊고 있었던 통증이 다시금 나한테 전해진다.

  " 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금방 치료해줄테니까. "

  마을에 들어선 어르신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붕대와 알콜병을 가지고 밖으로 나온다. 어르신은 내게 마루에 앉으라며 나를 불렀고, 나는 마루에 앉아 팔을 들어 올리곤 조심스럽게 어르신에게 건넸다.

  " 아파도 조금만 참아. "

  피로 물든 팔뚝 위로 조금씩 알콜이 쏟아진다.

  " 끄윽 …. "

  타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동반하는 눈물 한방울에 어르신은 피식 웃으며 알콜로 닦아낸 부위를 조심스럽게 닦아내며 그 위에 붕대를 말아주신다. 붕대 위로 조금씩 스며드는 핏자국을 보곤 어르신은 아직 지혈이 다 안됬다며 한동안 이곳에서 상처가 호전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남기시고 서둘러 밭으로 달려가신다. 어르신이 가시고 혼자 마을에 남은 나는 미처 다 감지 못한 붕대를 마저 다 감은 후 상처부위를 살짝 눌러 지혈을 했다. 아직도 채 가시지않는 통증 때문에 머릿 속이 혼미해진다.

  " …. "

  대체 그건 뭐였을까. 외관상 다름 사람과는 달라보이지않는 평범한 모습이였는데, 왜 그런 행동을 보인거지? 뭔가 … 이성이 있던건 아니였다.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날 공격했다는 가능성이 큰데, 왜 하필 이 마을에서 그런 …. 

  " 윽. "

  그나저나. 이 상처, 그냥 냅둬도 되는건가? 내가 봤을 때는 꽤나 찢겨져있던데. 바늘로 꿰매는게 더 낫지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 마을에서 그런 일을 할 정도에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 마을엔 의사가 없으니까.

  " ! "

  의사가 … 없다?

  
  그날 밤. 달이 약간 기운 듯 흐린 날씨에 조금씩 땅 위로 비가 한방울씩 떨어진다. 마루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내 옆으로 로빈이 조용히 다가온다.

  " 팔은 … 괜찮아요? "

  " 아. 아, 괜찮아. 걱정하지마. "

  " …. "

  뭔가 …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옆에 앉아있던 로빈은 슬쩍 나를 쳐다보며 이내 시선을 돌렸고, 나 또한 로빈을 조심스럽게 쳐다보다 이내 로빈과 눈이 마주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 "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

  " 그나저나, 로빈. "

  " 네? "

  로빈이 약간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본다.

  " 아까 전에 그 사람에 대해 뭐 아는거 있어? "

  " 네? 아, 그게 …. "

  왜인지 로빈이 말끝을 흐린다. 나는 로빈을 쳐다보며 왜 그러냐고 물었고, 로빈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그 남자에 대해서 알려준다.

  " 이 마을사람? "

  " 네. 소르만 씨라는 어르신의 자제 분이래요. "

  " 그래? 그런데 왜 그 사람이 나를 …. "

  " 옛날부터 정신에 이상이 있으셨는데, 요즘 들어 상태가 더 나빠지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오늘 운이 나쁘게도 루에르 씨가 다친 것 같다고 마을사람들이 말씀해주셨고요. "

  " 그래 … ? "

  의심스러운 듯한 행동을 보이는 로빈을 쳐다본 나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방울 아래 서서히 구덩이가 만들어지는 땅. 꽤나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져간다. 다행히 몇시간 전에 피는 멈췄지만서도 움직일때의 그 통증은 사라지지않은 듯 조금씩 아려옴에 조심히 팔을 내려놓았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적막함이 흘렀다. 비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어오니 꽤나 멋진 상황이 연출된다. 마루까지 들이닥치는 빗물에 나와 로빈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 갑자기 바람이 부네. " 

  " 그러게요. "

  또 다시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 그. 그럼 오늘은 이만 잘까? 로빈도 밭일 하느라 많이 힘들었을텐데. "

  내 물음에 로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쪽에 차곡 차곡 쌓여있는 이불들을 꺼내 장판 위로 조심스럽게 펼친다. 장판 위 깔려 있는 이불 위에 베게 두개를 던져놓고 나는 조용히 불을 끈다.


  또 다시 꿈을 꾸는 듯, 나른해지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포근한 미소를 짓는다. 

  " 루에르. 루에르. "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조용히 눈을 뜬 나는 주위를 살펴보지만 아무 것도 없다.

  " 루에르. 루에르. "

  하지만 어디선가 계속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직감으로는 이쪽으로 가는걸 원하는 것 같았다. 주위가 온통 백색의 큐브 안을 걷는 듯. 물컹한 느낌과 함께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축 처지는 기분이 나를 조금씩 짖누르기 시작한다.

  " 루에르. 루에르. "

   점차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커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힘들어질때 쯤. 어디선가 많이본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난다.

  " 루에르, 진실을 알아냈는가? "
  
  " 사. 사로이? "

  " 아직도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건가? 도대체 너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

  눈 앞에 나타난건 다름 아닌 사로이.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고, 나는 그런 사로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냐며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답 없었고. 그저 나를 묵묵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 료코라는 여자를 조심해라. "

  " 뭐? 그게 무슨 말이야. "

  " 그 여자에게서 벗어나라. 그렇지않으면 너 역시 무사하지 못해. "

  " 사로이!! "

  
  눈을 떴을 땐 이미 세상은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옆에서 가만히 잠을 자고 있을 줄 알았던 로빈은 온데간데 없었고, 이불에 누워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왼팔로 몸을 지탱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낫지 않은 오른 팔이 꽤나 쓰려온다.

  " 루에르 씨! 루에르 씨! "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내 앞에 로빈이 나타난다. 로빈은 뭔가를 보고 크게 충격을 먹었는지 숨을 헐떡거리며 서둘러 자신과 함께 밭으로 가자며 내 손을 붙잡는다. 

  " 왜 그래?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야? "

  " 료코 언니가 …. "

  " 뭐? "

  " 료코 언니가 … 죽었어요. "

  ' . '

  뭐?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이 뜯겨진 시체의 모습. 흡사 들개에게라도 공격을 당한걸까,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는 말이 없다. 시체 주위로 밭을 에워싼 마을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다. 오랜시간동안 같이 지낸 이웃사촌이니 당연한 반응이겠지만서도 그들 중에서는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사람도 보인 듯 싶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슬퍼서 흘리는 눈물인지. 아니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인지 알 제간이 없다. 더군다나 그동안 로빈에게 많은 힘이 되어주고 조언자가 되어준 그녀의 죽음에 로빈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슬픔에 잠겨 그녀의 시체 앉에 주저앉아 울기만 할 뿐이다. 나는 그런 로빈의 옆에 서 아무 말 없이 파리만 날리는 시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호랑이라도 나타난걸까? "

  " 무슨 소리! 이런 마을에 호랑이 같은게 있을리가 없지않나. "

  "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 대체 이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질려고. "

  사람들의 혀를 차는 소리가 자꾸만 크게 들려온다. 귀를 웅웅거릴 정도로 말이다. 한동안 시체를 보며 속닥거리던 마을사람들은 뒤늦게 갖고온 들것에 시체를 조심스럽게 옮겨 놓고 서둘러 어디론가 향한다. 저 시체가 무덤을 만들어질 곳에 가는건지, 아니면 그냥 이 마을에서 볼 수 없게 멀리 갖다버리려는진 모르겠다. 그저, 마을사람들의 눈물이 료코 부인의 시체가 사라진 직후에 멈췄다는 사실만이 기억될 뿐이다.

  " 료코 언니 …. "

  로빈은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얼마 지나지않아 눈물은 그친 마을사람들과는 달리 마치 로빈이 이 마을에 1년 아니 10년 이상을 지낸 듯 그녀에 대한 애통함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그런 로빈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발길을 돌린다. 마을사람들이 사라진 후, 로빈과 나 둘이 남겨진 밭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고있다. 나는 밭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뭔가 잡히는 단서가 있을까하고 고도의 집중력으로 주위를 둘러보지만 역시나 보이는건 메마른 땅들 뿐. 그저 료코 부인은 검붉은 핏자국만 밭에 남기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듯 보였다. 하지만 왤까, 어제까지만해도 멀쩡하던 료코 부인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유는.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병으로 죽기는 만무하고, 역시나 들짐승의 공격으로 인해 죽었다고 보는게 맞을까? 하지만, 이 마을 주변에는 개는 커녕, 마을사람을 제외한 잿빛 산에 마키 족 말고는 이 주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만약 마키 족이 나타나 그녀를 죽였다면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않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드렸을까? 

  " ! "

  혹시 … 스스로 목숨을 … ?

  " 흐으으 …. "

  맞다고 단정 짓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정말로 료코 부인이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이번 상황도 이해가 갈거다. 그러나 왜 료코 부인은 하필이면 자기 손으로 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걸까? 그에 대한 원인이 있던걸까? 아니면 단순히 충동적인 자살? 하지만 나와 로빈이 마을에 있는동안 그렇게 특별히 료코 부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이 있기는 커녕, 주위사람에게 큰 신뢰감을 얻는 사람이였는데 …. 그런 그녀에게 스트레스는 커녕, 그녀를 어떻게하면 기쁘게할까 궁리하는 사람들 뿐인데 그녀는 왜 …. 

  " 루에르 씨, 이만 돌아가요 ….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도, 울 기운도 없는 것 같으니까요. "

  밭에 주저 앉아 멍하니 료코 부인에 대한 애도를 표하던 로빈이 기운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휘청거리는 로빈의 팔을 붙잡은 나는 로빈을 데리고 서서히 마을로 돌아갔다.

  
  " 료코 언니는 왜 죽었을까요 …. 제가 봤을 땐 다른 사람한테 해코지를 당할 사람으론 안 보이던데. "

  기력을 잃고 쓰러진 로빈이 내게 물었다. 

  " 분명 이유가 있을거야. 그렇지않고서는 …. "

  나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로빈을 쳐다봤다. 로빈은 긴 한숨을 내쉬며 ' 그런가요 …. ' 라는 말을 하며 벽쪽으로 몸을 돌린다. 벽에 기대 로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도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강하게 비춰야 할 형광등이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이유로 제 빛을 내지 못하니, 그를 대신하여 촛불 하나가 이 크고 거대한 방 안을 메우려하니 매우 힘들거다. 하지만, 그런 촛불도 한개 두개 더 늘어나다보면 형광등 못지 않는 빛을 내겠지 ….

  " …. "

  이 또한 미즈오에게 얻은 진리 중 하나일까. 오늘 같이 정신이 혼란스러운 날, 난 또 다시 네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구나.

  「 덜컥 」 

  조용하던 방 안으로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멍하니 방 안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누군지를 확인했고. 방 안에 고개를 내민건 마을 촌장 님이셨다.

  " 아직 안 자고 있었나봐. "

  " 아, 네. 잠이 안와서 …. "

  " 그럼 잠시 나와 얘기 좀 하지 않겠는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는데 …. "

  아침에 있었던 일이라면 료코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려는건가? 촌장의 말을 들은 나는 슬쩍 로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로빈은 그런 나를 보며 자기는 신경쓰지말라며 촌장 님과 함께 가보라며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뭐, 잠깐 충격을 받아 쓰러진거라도 걱정이 되긴 매 한가지. 하지만, 로빈의 말에 나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 금방 돌아올게.  "

  이불에 누워 있는 로빈을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

  " 그 얘기는 내 집에 가서 천천히 하도록 하지. 다른 사람들도 와있으니 말이네. "

  마을사람들도 촌장댁에 와있는건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

  " 다 왔네. 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당연한건가? "

  촌장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나는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촌장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다른 집들보다 꽤나 웅장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집이 아마 촌장댁인 모양이다. 역시 이런 마을에서도 촌장이란 권력은 다른거 못지않은걸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커져만 간다.

  " 들어오게. "

  문이 열리고 촌장은 내게 손짓하며 안으로 들어간다. 촌장의 뒤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촌장의 재촉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 도대체 몇명이 모인거죠? 꽤나 시끄러운데 …. "

  " 들어가보면 알걸세. "

  " … ? "

  몇채의 집들을 지났을까, 소리가 들려오는 근원지를 찾은 듯 촌장의 발걸음이 멈춘다. 

  " 이곳일세. "

  촌장은 낡은 건물로 보이는 한 목조건물에 멈춰섰고, 건물의 벽면을 천천히 훑어내려가더니 이내 뭔가를 잡아당기며 뒤로 물러선다.

  「 뚝 」

  낡은 밧줄로 보이는 것이 촌장의 손에 잡아 당겨지자, 뭔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방금까지 없던 문이 큰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진다. 문이 쓰러진 자리엔 희뿌연 먼지가 흩날린다.

  " 안으로 들어오게. "

  촌장은 한쪽에 쓰러진 문을 밟고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고, 나는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되겠지란 심정으로 조심히 촌장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이 마을에 분명 귀신이 나타난게 분명하오!! "

  건물 바깥에서 간간히 들리던 소리가 점차 커져간다. 수많은 마을사람들이 이 건물 안에 모인 듯 건물은 소란스러웠고, 금방이라도 이 낡은 건물이 무너질 기세로 사람들의 목소리는 줄어들 생각을 안한다. 두손으로 귀를 막지만, 도저히 손으로는 막아지지않는 그들의 목소리에 나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촌장의 뒤를 따라갔고. 한참을 이리 저리 해매던 촌장은 이내 촛불로 아른거리는 한 방을 찾고는 조용히 그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시끌대던 건물 안이 금세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 뭐하고 있나? 들어오지않고. "

  밖에서 멀뚱히 서있는 나를 보며 촌장은 말했고, 나는 뒤늦게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 으흠. "

  안으로 들어가자 족히 20명은 되보이는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치 한마리의 닭이 사자우리에 들어간 듯한 포스가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흘러나왔고, 나는 이유 모를 압박감에 조심히 자리에 착석하였다. 촌장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모였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내 이름을 호명하며 나를 방 한가운데로 불러세운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긴장한 눈으로 촌장을 바라봤다. 촌장은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 내가 당신을 여기에 부른 이유를 알겠소? "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나는 긴장을 하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 아니요. ' 라고 대답했고, 그 말에 주위에 앉아있던 마을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한다. 촌장은 탁상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조용히하라고 말했고, 사람들은 촌장의 말에 일제히 침묵을 유지한다. 장내가 다시 조용해지자 촌장은 마저 말을 이어간다.

  " 내가 왜 당신을 불렀는지 모르겠단 말이요? "

  " 네, 잘 모르겠습니다. "

  " 정말이오? "

  촌장의 입꼬리 살짝 위로 올라간다.

  " 제 추측일진 몰라도. 아침에 있었던 료코 부인의 죽음으로 인해 마을사람들 간에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순순히 이곳에 따라왔고요. "

  " 그렇소? "

  " 제 추측이 틀렸다면 제가 왜 이곳에 불려왔는지에 대해 되려 촌장 님께 묻고 싶습니다. "

  " 하하하하, 이거 이거 보통이 아니군. "

  촌장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 당신 말이 맞소. 내가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이 마을의 구성원인 료코라는 여자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위해 만든 자리가 맞소만, 한가지 더 다른 목적으로 인해 당신을 부른거요. "

  " 그게 무슨 말씀인지 …. "

  " 당신의 이름은 료우, 그리고 당신의 아내의 이름은 코스우. 맞소? "

  " 네, 맞습니다. "

  " 어, 그렇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당신의 이름은 루에르, 그리고 당신의 아내, 아니지 당신의 동료인 코스우는 로빈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요. 내가 잘못 안거요? "

  " ! "

  " 하하, 이거 이거. 정곡을 찌른건 같소만, 왜 자네들이 우리 마을사람에게 본명을 숨기고 가명을 쓴지에 대해선 알고싶지않지만서도.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가명을 쓰면서까지 우리 마을에 들어온 이유가 뭔지 참으로 궁금하오. 그 점에 대해 말해줄 수 있소? "

  " 그. 그건 …. "

  " 혹시, 마키 족과 관련된 일이요? "

  " ! "

  역시나 이들은 마키 족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때 발견된 이 메달과 함께 의문에 휩싸인 료코 부인의 죽음이 이들과 관련이 있는걸까?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짖눌린 채, 주위에서 나를 노려보는 시선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촌장은 껄껄 웃으며 마치 나를 데리고 노는게 재밌다는 식으로 내게 질문을 한다.

  " 그렇다면 말해주겠소? 대체 마키 족 놈들이 무슨 말을 했기에 우리 마을까지 쳐들어온 계기가 뭔지. 또, 그 밭에서 발견한 조각을 왜 타지 사람인 자네가 들고 있는지 심히 궁금할 따름이오. 그 조각을 이만 내게 넘겨주겠소? "

  촌장 또한 조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즉슨, 이 조각엔 이 마을에 대한 무슨 자료가 있는게 분명하다. 아니면, 이 조각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면 안되는 사건에 휘말렸다던가.

  " 자, 그럼 말씀해보실까. 대체 왜 우리 마을에 온거지? "

  촌장의 눈빛이 사뭇 날카롭게 느껴졌다. 

  " 빨랑 빨랑 얘기 안해? "

  " 우리가 한가한 사람들로 보여?! "

  주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사람들도 점차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금씩 내 쪽으로 위협을 주며 다가온다. 촌장은 그들을 보며 가만히 앉아 있으라며 그들에게 지시했고, 그들은 애써 화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는다. 그들의 행동과 촌장의 태도에 왠지 이곳에 더 있게 됬다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든 나는 촌장에게 다가가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얘기하자며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 이 자식이! 어딜 마음대로 나가!! "

  " 이거 놔요, 이거 놓으라고!! "

  " 이 자식, 정말 수상한데? 네 놈 짓이지? 네 놈이 료코를 죽였지!! "

  급기야 가만히 분을 삭히고있던 사람들이 단체로 일어나 나의 팔 다리를 붙잡으며 나의 행동을 저지했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촌장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 역시, 네 짓이였군. 이 앙칼진 녀석, 감히 마키 족을 대신해 료코를 죽이러 온거냐? 감히 네 놈이!! "

  탁상을 발로 걷어차며 자리에서 일어난 촌장은 한쪽에 놓여진 검 한자루를 뽑아 들고 내 쪽으로 달려온다. 이 모습에 나를 붙잡고있던 사람들이 나를 바닥으로 팽개치며 주위로 분산했고. 이내 촌장은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내게 접근한다.

  " 네 죄는 피로 묻겠다. 죽어라!! "

  … !




  " 하아. 하아. "

  급히 빠져나온 건물 안에는 피로 범벅된 사람들의 비명소리만이 가득할 뿐.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못됬다. 아군인지 적인지도 구별을 못할 정도로 화가 나서일까, 무차별로 휘두르던 검에 의해 목이 잘린 사람, 배를 찔려 내장이 튀어나온 사람. 더군다나 그의 눈빛에는 살육의 피로 가득한 붉은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그곳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빠져 나오고 싶어도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 또 하나의 무언가로 인해 그들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 순간적인 공격을 재빠르게 피하고 그곳에서 벗어난 나는 운이 좋았던걸까, 아님 누군가가 나를 지켜준 것일까. 만약, 나를 누군가가 지켜줬다면 그 사람은 누구일까? 

  " 크윽. "

  피했다고 생각하고 피했는데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위에서 피가 질질 흐른다. 피하는 동시에 옆 사람과 밀쳐진 내 허벅지를 검은 놓치지않았던걸까. 허벅지가 반쯤 날아간 듯 새하얀 뼈가 피로 얼룩져 나의 고통에 추가로 두려움까지 선사해준다. 어제부터 뭐 이리 몸에 상처가 마를 날이 없는지 모르겠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꼬여버린 선에 의해 발생하는 기초적인 사건의 발단일까? 아니면 이미 진행되던 일에 착오가 생긴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통에도 내 다리는 절룩거리며 마치 그들이 나를 따라 오라고 도발이라도 하는 듯, 주체 못하고 흐르는 피가 바닥을 젖신다.

  " 로빈! "

  집에 다다른 나는 서둘러 로빈을 불렀고, 내 부름에 로빈은 급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 나온다. 로빈은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나를 보며 놀랐고, 나는 그런 로빈을 보며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한다며 로빈을 재촉했다. 로빈은 나의 말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서둘러 신발을 신고 내 쪽으로 달려온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거에요? 왜 루에르 씨가 이렇게 됬냐고요! "

   화가 난 듯한 로빈의 말투에 나는 잠시 당황을 하다 이내 로빈에게 방금 전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 주었고. 로빈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나를 쳐다보며 이내 말문을 열지 못한다. 나는 로빈의 손을 붙잡고 이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며, 그들이 언제 우리를 죽이러 올지 모른다는 로빈에겐 큰 충격이 될거란걸 알면서도 로빈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게 이끌려 달리던 로빈은 순간 나의 손을 뿌리쳤고, 나는 그런 로빈을 보며 무슨 짓이냐며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할때 그녀가 말했다.

  " 메달은요? 메달은 어떻게 하고요. "

  " 메달? 무슨 메달!! "

  " 제가 전에 밭에서 주울 때 루에르 씨에게 건네준 메달 말이에요!! "

  로빈의 말에 잠깐 잊고있었던 메달의 존재를 파악한 나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져봤다.

  " 어. 없다 …. 왜 없는거지?! 분명, 내가 바지 주머니 속에. "

  " 제가 빼놨어요. "

  " 뭐? 대체 왜 그걸!! "

  " 언제까지 제게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시는거에요. 제가 당신의 동료가 맞나요? "

  " 그게 갑자기 무슨 뜬금 없는 소리야!! 지금 이럴 시간도 없는데 왜 그 중요한 메달을 빼놓은거야. 지금 나랑 장난해? 누가 마음대로 그 메달을 만지라고 했어!! "

  내 생애 처음으로 로빈에게 화를 냈다. 로빈이 내게 화를 냈으면 화를 냈지, 내가 이토록 로빈을 향해 폭언을 내지른 적이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 정도로 화가 났다는 말로 해석해야하는걸까. 나의 고함소리와 함께 적막했던 공간이 잠시 흐트러진 듯 균열이 이른다.

  " 전, 언제까지나 루에르 씨를 …. "

  바닥을 쳐다보던 로빈의 말이 멈췄다. 또 다시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듯 울먹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또 다시 나는 자책한다. 만날 반복되는 이런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늘 내 주변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로빈은 단지 무슨 이유로 인해 그 메달을 빼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을텐데, 나는 그런 그녀의 이유도 들어볼 생각도 없이 그녀를 향해 일방적으로 화를 냈을 뿐. 그런 그녀의 마음도 생각지도 못한 채, 또 다시 나는 그 일을 반복하고 만다.

  " 로빈 …. "

  로빈의 어깨가 들썩거릴 수록 나의 양심의 가책은 조금씩 아려오기 시작한다.

  " 너, 이 자식!! "

  로빈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낯선 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그곳에는 각목과 작살로 보이는 무기를 들고 나를 쫓아오는 마을사람들이 보였고.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곤 서둘러 로빈의 손을 잡고 재빨리 이곳을 벗어났다. 방금 전과는 달리 순순히 내 손을 잡고 달려오는 로빈을 보며 나는 또 다시 이런 일을 반복하지않으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이 다짐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나 자신도 모르지만 말이다.

  " 잡히면 죽여버릴 줄 알아!! 거기 서!! "

  잡히는 죽는다는걸 알아서 뛰는 것 뿐인데, 그들은 그 자리에서 멈추라고 한다. 도대체 이건 어느 쪽을 따라야 맞는걸까? 순수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아니, 나는 아무 잘못 없다. 그저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자신들을 나락에 빠트린 것 뿐. 나는 그들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바라지않았다. 그저 그들이 내게 원한건 이곳에 온 목적과 메달의 유무 확인. 이것으로 마키 족과 루에르 마을에 관계가 어떨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알겠지만. 마키 족이 루에르 마을을 대하는 행동과 그들이 마키 족을 보는 생각이 거의 일치하다고 본다. 그 말은 분명 어딘가에 이 사건을 풀 열쇠가 있다는 말이겠지. 일단은 달린다. 그리고 파악한다. 그 사이의 존재하는 진위를!


  그 일이 일어나고부터 또 다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모든게 그렇듯, 그때 잿빛 산을 벗어나고부터 일주일 후에 루에르 마을을 발견하고, 그 후 또 다시 일주일이 지나 그 마을이 루에르 마을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또 다시 일주일 후에 그 마을에서 벗어났다는 것. 무슨 일주일의 악령이라도 붙은걸까. 그놈의 일주일이라는 패턴은 나와 로빈에게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로빈과 나의 사이는 조금 서먹해졌다고 해야할까? 메달의 관한 이야기로 인해 내가 로빈에게 화를 내서일까, 로빈은 전처럼 내게 화사한 미소보다는 냉랭한 얼굴로 늘 축 처져있다. 마을에서 벗어나 그들의 눈초리를 피한 후에 로빈에게 사과를 했지만 로빈은 그닥 사과를 제대로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에 대해 내 잘못도 있지만, 왜 로빈이 내게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는지는 제대로는 모르겠다. 다만, 그 앙금의 원인이 나라면 왜 나 때문에 그러는지에 대해 알고 싶다. 하지만 로빈은 입을 꾹 다문 채 내 옆을 따라다닐 뿐, 나오는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서먹한 분위기 속에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날이 짧아지니 자는 시간이 빨라지고 이동시간보단 모닥불을 피고 모닥불 주위에서 추위를 녹이는 시간이 많아질 수록 로빈과 어색한 공간에 나는 점점 지쳐만 간다. 현재 시간은 잘 모르겠고, 아무튼 보름달이 뽀얗게 하늘에 둥실 떠있는 시간, 그리고 조금씩 옅어지는 하늘로 보니 새벽 쯤 되는 것 같다. 현재 로빈은 내 옆에서 고요히 잠을 자고있고. 나는 뭣 때문인지 말똥한 정신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있다. 말동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터, 그 말동무마저 지금 나랑 사이가 별로 좋지않아 주위를 거니는 시간 말고는 거의 대화를 안한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갑갑한 일상의 연속이다.

  " 으아함. "

  하품을 길게 늘어지는데 정신은 왜 이리 말똥할까. 매일 걸어서 피곤할 터인데 왜 나는 잠이 오지 않는걸까. 혹시 나는 피로와 담을 쌓은 그런 건강한 녀석인걸까? 하지만, 나는 태생적으로 몸이 별로 좋지않아서 학교를 빼먹는 날이 허다했는데. 설마 로빈과의 일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걸까? 언제까지 이런 관계가 지속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지금 내가 걱정하는걸까? 이렇게 가다가는 낮과 밤이 뒤바끼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 지금. 로빈은 여전히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다.

  " …. "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매일 한번 이상을 이런 생각을 한다.

  ' 로빈이 나를 보고 활짝 웃는 얼굴을 보고싶다. '

  예전에는 그런 일이 허다했는데 그 일이 원인이다. 

  " 하아. "

  사과는 해도 찜찜한 이 기분, 그렇다고 안하기에는 조금 씁쓸한 느낌. 하지만, 로빈은 사과는 받지만 그에 대한 화답은 없었다. 그저 내 사과는 늘 있었던 일이였다는 마냥 가볍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만약 로빈이라면 로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싶다. 나에 대한 불만감? 나에 대한 분노?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요즘 들어 피곤해서?

  " …. "

  그건 아닐거다. 로빈이 아무리 피곤해도 웃는 표정은 변함 없었는데. 이번은 그때와는 좀 달라서일까? 그래, 그럴 수도 있다. 로빈도 인간이긴 매 한가지니까, 로봇처럼 만날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만약, 그게 정답이라면 나는 로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시 로빈에게 화를 내지 않도록 노력. 아니, 절대로 로빈을 슬프게 만들지 않을거다. 그들을 제외한 사람 중 나를 그나마 위하는건 로빈 뿐이고, 그런 로빈이 없으면 누구보다 슬픈 사람은 나란걸 알기에. 오늘도 나는 잠든 로빈을 보며 슬픈 눈망울로 또 한번 로빈에게 사과한다. 하지만, 로빈은 그런 내 마음을 알기는 할까. 오늘도 여지 없이 긴 한숨만이 새어 나온다.

  " 후우. "

  그나저나 메달은 어떻게 되었을까, 로빈의 말로는 아직도 그 집에 메달이 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알 방도가 없으니 …. 나는 다리를 떨며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들이 그토록 메달을 원한건 아니였지만 그들과의 마키 족의 관계가 알고 싶어졌다. 왜 그들이 마키 족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인지. 또, 마키 족은 대체 왜 무슨 이유로 루에르 마을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심어졌는지 알고 싶어졌다. 어찌 생각해보면 나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이야긴데도 이 일에 끼어 들고 싶은 이유가 뭘까? 나 자신에게 물어봐도 나오는건 없다. 그저, 나대고 싶은 본능에 충실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그 베일에 휩싸인 흑막을 찾아 내고 싶은 것일까. 그리고 잠시 잊고 있었던 료코 부인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왜 촌장은 내가 마키 족을 대신해 료코 부인을 죽였다는 생각과 왜 하필 다른 이도 아닌 마키 족이라는 확실에 찬 눈으로 말한 이유를 알고싶다. 그걸 알기 위해선 내가 이곳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게 아니라,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여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는 것 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이 베일을 벗길 순 없다.

  " …. "

  슬쩍 몸을 돌려 로빈을 바라봤다. 역시나 곤히 잠들어있는 로빈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나는 자켓 안에서 구겨진 지도를 꺼내 펜으로 뭔가를 끄적거렸고. 행여나 로빈이 깨어날까 조심스럽게 로빈의 머리맡에 지도를 놓아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닥불이 꺼질까, 장작을 있는대로 들이 붓고나서야 나는 안심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 …. "

  ' 미안해 로빈,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 …. '




  다시 찾아온 루에르 마을은 정적만이 흘렀다. 고요한 마을 틈을 타 안으로 침입한 나는 조용히 주위를 살피며 행여나 발소리가 날까 살금살금 발끝에 힘을 주며 조심히 앞으로 걸어갔다.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지 마을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이런 시간이면 충분히 메달을 찾아 빠져 나올 수 있는 시간이 될거다. 문제는 우리가 묵었던 집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눈과 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마치 달빛의 그림자가 된듯 움직이는 내 몸놀림에 나조차도 감동한듯 입가엔 미소가 흐른다.

  「 끼익 」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긴장감에 나는 황급히 문을 닫고 울타리 쪽으로 몸을 숨겼다.

  " …. "

  다행히 깬 사람은 없는 듯 싶다. 나는 조심히 달빛에 몸을 숨긴 채 서서히 집 쪽으로 접근했고. 점점 집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안에서 들리는 코골이 소리가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서서히 나와 로빈이 묵었던 방으로 발걸음을 좁혀갔다. 그들이 자는 방과 우리가 묵었던 방은 서로 반대방향에 위치해 있어서 왠만하면 만남을 가질 수 없었기에, 오늘처럼 이렇게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건 처음일거다. 만약, 우리가 그들과 방의 방향이 같았다면 나는 성한 몸으로 돌아가긴 힘들겠지.

  「 드르륵 」

  그닥 크게 들리지않았던 문소리가 오늘따라 너무 크게 들려온다. 또 다시 주위를 살피며 사람의 행적을 찾아봤으나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이 마을은 나와 전부 적대관계를 형성해서일까, 평소 같았으면 그냥 행동했을 터인데 지금은 너무나도 조심스럽다. 방 안에 가까스로 들어온 나는 우리가 지냈던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신하고 서둘러 집 안 곳곳을 뒤졌다. 메달로 보이는 물건은 다 꺼내 확인했지만 정작 중요한 메달은 보이지않았다. 대체 로빈은 그 메달을 어디에 넣어둔거야?

  " 거기 누군가? "

  " !! "

  정신 없이 방을 뒤지던 내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닫혀 있는 방문 앞에 드리워져있는 사람의 실루엣. 분명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생각도 없이 뒤져서일까, 잠에서 깨어난 이 집 주인이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온다.

  " 아. 아니 자네는 …. "

  " 제, 젠장! "

  나는 메달을 찾을 생각도 까먹고는 서둘러 어르신의 어깨를 밀치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여기서 잡히면 살아서 돌아가는건 만무하고, 더 나아가 메달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내 눈 앞에서 충돌한다. 

  " 자. 잠깐만 기다리게! "

  울타리 밖으로 나간 나를 그 어르신이 불러 세웠지만, 나는 어르신의 말을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마을 밖으로 빠져 나갔다. 어르신이 왜 나를 불렀는지, 또 왜 가만히 나를 봤는지에 대한 이유도 모른 채. 잡히면 죽음 뿐이라는 생각으로 달려 나간 나는 한참을 그 마을에서 벗어나서야 속도를 멈추고 제자리에 주저 앉았다. 공포심에 짖눌림과 동시에 해방된 긴장감 때문에 다리의 힘이 풀렸는지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 후우 …. "

  일어날 생각도 못한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잠시 잊고 있던 숨통이 너무나도 위축되었던 탓일까, 한꺼번에 몰여오는 호흡곤란에 숨쉬기가 버겁다. 하지만 다행이다. 어르신에게 붙잡히지않았으니. 다만, 메달의 행방유무를 모르기 때문에 또 다시 그 마을에 가봐야한다. 그 메달이 없으면 내가 이 마을에서 알아낸 사실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니 말이다. 또한, 그 메달로 인해 벌어진 그 일이 자꾸만 내 머릿 속을 돌아다닌다. 

  " 료우 군! "

  더 이상 쫓아오지않을거라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빗겨 맞았다. 어르신은 아직까지도 나를 쫓아 달려왔고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나려했지만 방금 전에 뜀박질로 인해 모든 체력을 소진한듯 다리의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 료우 군! "

  점점 가까워지는 어르신과 나의 거리에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어느덧 내 앞까지 다가온 어르신을 보며 나는 이내 체념했다. 더 이상 달아날 수도 없고 설령 달아난다해도 곧 바로 다시 잡힐테니. 나는 어르신을 보며 두 손을 뻗었고, 어르신은 숨을 천천히 고르며 내 손을 잡는다.

  " 젊은이가 여기에 앉아서 뭐하고 있는건가? 어서 일어나게. "

  어르신은 내 두 팔을 잡아당기며 나를 자리에서 일으켰고. 나는 그런 노인을 보며 조금은 벙찐 표정으로 서있었다. 

  " 무슨 젊은 사람이 그렇게 겁이 많아서 쓰나? 노인네가 할 말이 있어서 부른건데 그걸 또 도망을 …. 에휴, 내가 십년만 더 젊었어도 이런 고생 안하는건데. "

  어르신은 투덜거리며 한쪽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이내 내게 뭔가를 건네준다. 얼떨결에 어르신이 건네주는 물건을 받은 나는 어르신이 건네준 물건을 슬쩍 쳐다봤다.

  " ! "

  어르신이 내게 건네준건 다름 아닌 메달. 어르신이 메달을 갖고 있던건가?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왜 이 메달은 그 마을 촌장이 아닌 내게 건네주는거지? 도대체 왜 내게 무엇을 바라고 이런 행동을 하는거지?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어르신을 쳐다보며 왜 내게 이것을 건네줬냐 묻자. 어르신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한다.

  " 임자가 있는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준다는데, 그게 뭐 잘못된 일인가? 그때 깜빡하고 챙겨가지 못한 것 같은데. 이젠 잘 간수하게. "

  어르신은 웃으며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 잠깐만요, 어르신! "

  " 어이구,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릴 지르고 그러나? 나한테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건가? "

  " 왜 …. "

  " 응? "

  " 왜, 이걸 제게 주셨죠? 그것도 촌장 님이 아닌 저에게요. "

  " 료우 군, 그게 무슨. "

  " 대체, 저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죠? "

  " 료우 군? "

  "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아니, 이해하려해도 할 수가 없어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 "

  기력을 다 한걸까. 아님, 또 다른 무언가에 이끌려 또 다시 의식을 잃는걸까. 풀썩 자리에 주저 앉은 나를 향해 달려오는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 료우 군, 정신이 드나? "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다름 아닌 방 안이였고, 옆에서 내 간호를 하고 있던 어르신과 눈이 마주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일어나면 안되네. 자네 무척 지쳐있다고. "

  내가 일어나는걸 만류하는 어르신의 말에 나는 다시 베게에 머리를 파묻으며 자리에 누웠다. 어르신은 어젯밤 쓰러진 나를 업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과 함께 도대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된다면 이곳에서 며칠만 더 묵고 가라며 곧 로빈도 데려올거라는 말을 한다. 벌써 로빈이 있는 곳까지 발각된걸까? 그렇다면 이제 며칠 뒤면 내 목숨과 로빈의 목숨 또한 끝이겠군 ….

  " 그런데 대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타지 사람이긴 해도 며칠을 한 지붕 아래에서 지냈던 사이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떠날 수 있던건가? 매우 섭섭했다네. "

  한눈에 보기에도 섭섭함이 풍겨오는 어르신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쿡하고 웃어버렸다. 

  " 아, 죄송해요. "

  " 하하, 아니네 아니야. 료우 군이 웃는걸 보니 내 마음도 좀 놓는구려. 조금만 기다리게 집사람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니까 말이네. "

  어르신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를 보며 절대로 움직이며 안된다는 당부의 말과 함께 방문을 열고 조용히 밖으로 나선다. 어르신이 밖으로 나가고 홀로 방에 남은 나는 슬쩍 방을 둘러보며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놓인 수건을 바닥에 내려놓고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저렇게해도 결국엔 그 사람들과 한 통속이란걸 모를 줄 알았나본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저와 로빈. 그렇게 간단히 당하진 않을테니 지켜보고 계시죠.

  「 드르륵 」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 로. 로빈? "

  방으로 들어온 로빈은 사색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걸어왔고, 나는 그런 로빈을 보며 또 다시 고개를 떨궜다. 로빈은 그런 나를 한참을 말 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부르르 떨리는 입술과 함께 내 쪽으로 달려온다. 그리곤 나를 품에 안으며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미안하다는 말이 내 귀에 들려온다.

  " 미안해요 ….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나봐요. 그 상황이였다면 저도 루에르 씨와 똑같은 반응을 했을텐데. 저는 그런 루에르 씨를 외면만 하고 …. "

  나는 또 한번 로빈을 울리고 마는건가. 

  " 나도 미안해, 로빈. 나도 너무 내 생각만 하고 로빈을 너무 추궁했어. 용서해줘. "

  " 아니에요. 제가 더 …. "

  " 미안해. "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 듯이 한번 쯤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이였다. 늘 내게 사과만 하고 정작, 자신은 용서만 빌던. 그런 그녀였기에 나는 하루에 몇십번을 고뇌와 후회에 잠긴다. 정작, 사과를 받아야하는건 그 반대인데. 왜 나는 사과를 받고 왜 나는 사과를 못했을까, 바보 같이.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개운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내가 사과를 해야하는 한 사람.

  ' 미즈오. '

  로빈보다 더 훨씬 전에 내게 사과를 받았어야하는 그녀가 또 다시 기억된다. 그래, 난 이런 놈이다. 부정 할 수 없고, 또한 부정한다해도 결국엔 똑같아지는. 그렇지만 이젠 괜찮다. 원래 그런 놈이라면 억지로 내가 나를 바꿀 필요는 없으니까. 나면 되는거야. 그 누구도 아닌 나란 존재만 있으면 되는거야. 그러나,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 같다. 이미 그 상대는 없는데, 대체 나는 혼자서 뭘하고 있는거지?

  " 미안해, 미즈오 …. "

  " 네? "

  " 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

  ' …. '

  약속할게. 널 만나기 전까진 절대로 죽지 않을거야. 그 누구라도 말이야.



  " 아마도 그들간의 관계를 알아내는게 급선무인거 같아. 그 문제부터 풀어나가야만 차차 그 뒷이야기가 나타날거라고 생각되. "

  " 그렇다면 그것을 풀지않는다면 답도 나오지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

  "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일단은 이 마을에 대해 알아내는게 문제야. 지금 촌장 쪽 사람들은 나를 보면 잡아 죽일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에는 사건의 단서가 너무도 커. "

  " 그러면 어떻게하면 좋죠? "

  곰곰히 생각을 되짚어 나가던 내 기억 속에 무언가가 팍하고 떠오른다. 

  " 역시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던 건가 … 로빈, 서둘러. "

  나는 로빈을 부르며 바깥으로 나갔고, 뒤이어 따라오던 로빈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냐며 내게 묻는다.

  " 내가 메달을 가진 것과 나에 대한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그 점은 우리가 지냈던 저 집에서도 볼 수 있지. 그 말은 이 마을 전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게 아닌, 개인의 집단을 이루어 극 소수의 사람들이 반대세력으로 움직이고 있는거야. "

  "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

  " 즉, 이 마을은 무언가로 인해 억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그건 그 어르신도 마찬가지일테니까. 로빈 서둘러! "

  나는 로빈을 제쳐두고 황급히 밭으로 향했다. 현재 시각으로 봤을 때 밭에 남아있는건 어르신 한 분. 다른 어르신들이나 마을사람들은 촌장댁에서 마을간의 회의를 하고 있을 터. 지금 내게 이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분 밖에 없다.

  " 어르신! "

  밭에 가까스로 다다른 나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며 어르신을 찾아 헤맸고. 한참 뒤에 발견한 어르신은 구부정한 허리로 힘 없는 낫질을 하며 밭에 자라나는 잡초를 잘라내고 있었다. 나는 어르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숨을 헐떡거리는걸 애써 참으며 천천히 어르신에게 말씀을 여쭈었다.

  " 이 마을에 절대권력을 가진 분은 누구죠? 도대체 이 마을을 반으로 쪼갠 사람이 누구냐고요. "

  " 그게 무슨 소린가 료우 군? 절대권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

  " 어르신도 알거 아니에요. 이 마을이 서로 반대의 세력을 가지고 움직인다는걸. 그 세력 중 가장 큰 힘을 내세우는게 촌장이라는걸. 촌장의 힘과 마을사람들의 단합으로 어르신과 같은 사람들이 강제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다고요. "
  
  "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

  낫을 들고 있던 어르신이 화를 내며 낫을 밭으로 집어 던졌고, 나는 그 행동에 살짝 움추러드는 몸으로 다시 어르신에게 다가가 말했지만 어르신은 나의 말을 부인하며 자리를 벅차고 일어난다. 어르신은 날 보며 ' 아직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지는 않으니, 당분간은 이불에 누워 푹 쉬고 있게! ' 라는 말을 남기며 낫을 들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다. 나는 그런 어르신을 보며 반쯤 얼이 나간 상태로 몇분간 밭에 머물렀다. 어째설까, 어째서 어르신은 내 말을 부정하면서까지 그 말을 믿지 않으셨을까. 혹시 내가 너무 앞서 나갔던 탓일까? 하지만, 그랬다면 어르신은 나를 보면 곧장 촌장 앞에 끌고 갔는게 맞는데. 아니면, 나에게 조금은 신뢰를 얻기 위해서?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너무 시간낭비다. 긴 시간동안 나를 질질 끌고 살려두면 오히려 손해는 자기들 쪽인데 …. 역시나, 어르신은 무언가로 인해 말문은 닫은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면 어르신이 저런 행동을 보일 리 없어. 나는 절대 틀리지않아. 내 직감은, 내 느낌은!

  
  해가 약간 쪼개진 듯, 붉은 노을에 타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니 마루에 걸쳐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로빈을 발견했다.

  " 거기서 뭐해? "

  내 목소리에 로빈이 흠칫 놀라며 마루에서 내려와 내 쪽으로 다가온다.

  " 어딜 다녀 온거에요? "

  " 요 앞 밭에 잠깐. 그런데 어르신은? "

  어르신을 찾는 나를 보며 로빈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킨다.

  " 어르신이랑 무슨 일이 있던거에요? "

  " 왜? 어르신이 어떻길래. "

  " 어떻긴요. 뭔가에 심하게 놀란 듯한 표정으로 들어오시던데 저도 덩달아 놀랐다니까요. "

  " 그래? "

  역시나 어르신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던거였어. 이 마을은 촌장 중심으로 무언가가 일어나는게 분명해. 그것으로 인해 어르신을 포함해 몇몇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뿐더러,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모르는걸꺼야.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찾던 그 메달 조각을 봐도 모르는 척 넘어갔으니. 하지만 어르신들은 그걸 모르는 척한게 아니라 정말 몰랐을 뿐이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냥 고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테니까.

  " 루에르 씨? "

  " 나, 잠시 어르신 좀 뵙고 올게. "

  나는 로빈을 제치고 서둘러 어르신이 계시는 방으로 향했다. 

  " 어르신, 저에요. 잠시 들어가도 괜찮나요? "

  문을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문 쪽을 향해 물었지만 방 안은 아무도 없는지 고요했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리며 어르신을 불렀지만 역시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않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문 앞에 쪼그려 앉아 다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어르신은 분명 뭔가가 있는게 분명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화를 거부하는 어르신을 어떻게 마음을 돌릴 순 없을까. 그렇지않으면 이 사건의 진보도 퇴보도 없는 어중간한 상태가 될텐데 ….

  「 끼익 」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문이 조금식 열리며 나의 엉덩이를 건든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어르신은 로빈의 말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어르신은 머뭇거리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내게 묻는다.

  " 자네 말고는 아무도 없는가? " 

  어르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 네. 저 밖에 없습니다. "

  라고 말하자 어르신은 뭔가를 찾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주위를 훝어보더니 이내 내게 말한다.

  " 들어오게. "

  빨리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재촉하는 손길에 나는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쿵 」

  문을 닫고 컴컴했던 방 안에 자그마한 촛불이 하얀 촛농을 흘리며 빛나고 있었고 어르신은 방 깊숙히 나를 데려가며 바깥 소리가 거의 들리지않는 구석까지 가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촛불의 움직임에 조금 쪼개져보이는 어르신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그간 있었던 일들과 종합하여 어르신에게 말씀드렸고, 내 얘기를 천천히 듣던 어르신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 세상은 늘 업보가 있는 법이지. 그것으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이 있는 방면에 피해를 입는 사람도 있지. 그 중에서도 자네는 피해를 입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 같구만. "

  씁쓸하면서도 적막한 어르신의 말에 나는 조심히 말을 이어 갔다.

  " 도대체 이 마을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거죠? 무엇 때문에 한 마을 안에서 여러 세력이 움직이고 있냔 말이에요. "

  " 진정하게 료우 군. 이 마을에도 사정이란게 있는 것 뿐이야. 그 사정으로 인해 어찌할 수 없이 마을 간의 갈등이 생긴거니 말이야. "

  " 그 갈등이란게 뭐죠? 뭐길래, 어르신도 모르는 마키 족이 촌장과 연결이 된거죠? 그것도 악연으로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제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아세요? "

  "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혼란스러웠다니. "

  " 그건. "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에서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이 말을 내뱉고 싶은 충동이 이르지만 나는 자제했다. 지금 모든걸 말할 수는 없다. 아니, 그렇게해서는 안된다. 아직까지도 1%의 가능성을 가진 이 어르신에게 내가 갖고있는 모든 정보를 건네줄 수는 없다. 다만, 그 1%의 가능성 때문에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이 마을의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충돌하고 있는 것 뿐이다.

  "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는 있는 바로는 마키 족인가 뭔가하는 부족과는 자매결연을 맺은 사이네. 그러니 그들간에 관계가 형성될 수 밖에 없는거지. 그런데 악연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키 족과 우리 마을은 이 세계가 멸망하기 이전부터 서로 돕고 살던 사이였다고. 그런데 악연이라니? 그게 무슨 웃지 못할 이야긴가? "

  어르신은 어이가 없다는 식의 말투로 내게 말했다. 마키 족과 루에르 마을이 서로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그런데 마키 족이 우릴 처음 보고 했던 말이 ' 너, 루에르 사람이냐? ' 였는데. 그 말에는 가시가 돋은 듯 날카로웠는데. 도무지 그 말은 환영의 말투가 아니였는데. 정말로 어르신의 말처럼 마키 족과 이 마을이 자매결연을 맺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한단 말인가? 

  " 다만, 그 사건 이후로 조금 삐뚤어졌을 뿐이지만 말이야. "

  " 그게 무슨 말씀이죠? "

  " …. "

  "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요!! "

  순간 방 안은 정적이 흘렀고, 아른거리며 방 안을 비추던 촛불이 서서히 빛을 잃고 사라진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르신을 쳐다보며 다시 한번 방금 한 말에 대해 물었고, 어르신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키며 천천히 말문을 연다.

  " 그 사건은 이 세계의 멸망과 관계가 있는 일이네. "

  ' ! '

  " 촌장이 무슨 일이 있어도 숨기라고 했는데, 자네 얼굴은 보니 내가 아무리 거짓말로 말문을 닫으려해도 끝까지 알아낼거라는 생각에 자네에게 말하네. 그 사건은 이 세계의 멸망이 오기 몇년 전의 일이였어. "



  어르신의 말씀은 수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세상이 멸망하기 이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주위는 도심지로 시끌벅적했고, 그 주위에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산들 사이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이였고, 산으로 둘러쌓인 마을은 꽤나 단단하고 근엄해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 앞은 강은 없었고 건물들만 즐비해있었지만. 그 마을만은 자연 그대로 멈춰버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였다. 또한, 그 마을을 에워싸고있는 산들 중 하나인 마키 족의 성지로 알려져있는 마우리스에는 그들만의 성지로 여기는 마키 족이 있었다. 마키 족과 이 마을은 서로 공생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그것도 오랜시간을 말이다.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며 이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중 마키 족의 족장을 맡고 있던 리오크는 누구보다도 용맹하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전형적인 족장 스타일을 겸비했으며, 그 마을의 촌장 로라 역시 리오크와 대등할 정도로 마을간의 협동과 리더십이 뛰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오랜시간동안 선조를 통해 이어오던 결의가 지금도 지켜지고 있지않냐고 믿고 있다. 

  " 언제나 하나가 되어. "

  " 언제나 하나가 되어. "

  그들의 술잔은 너무나도 경쾌했다. 그 누구보다 친하디 친한 부족과 사람들이 만나 어울러지는 축제 한바탕. 그들의 얼굴은 너무나도 즐거워보였다.

  " 늘 그렇지만서도 이렇게 축제를 하면 기분이 좋다니까. "

  " 누가 아니래. 언제나 이렇게 재밌었으면 좋겠군. "

  리오크와 로라는 서로를 바라보며 킬킬대며 들고있던 술잔을 하늘 높이 치켜세우며 건배를 외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건배를 외친다. 그들은 행복해보였다. 인생의 재미를 하나씩 찾아가는 듯 두근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이곳을 조금만 벗어나도 서로를 향해 욕을 하며 인생을 한탄하는 사람들, 그리고 양보는 커녕 자기 먼저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넘쳐나는데도 이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행복을 깨트리면 단숨에 바로 잡을 사람들이었기에 오늘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축제를 축복이라도 하는 듯 달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그런데 로라. 아직도 마을 이름은 정하지 못한거야? "

  술잔을 기울이던 리오크가 로라에게 궁금한 듯 물어보자, 술잔에 술을 채우던 로라가 호탕하게 웃으며 그에게 술을 건네며 말한다.

  " 이름 같은거 없어도 좋아. 어처피 우리는 친구잖아? "

  술을 건네받은 리오크는 그런 로라를 보며 피식 웃으며 건배를 청하며 단숨에 들이킨다.

  " 그건 그렇지. 하지만, 마을에 이름이 없으면 되겠어? "

  " 그건 그런가? 하하, 뭐 어쩔 수 없지. 리오크, 당신이 우리 마을의 이름을 지어주는게 어때? "

  술잔에 입을 맞추던 리오크, 로라의 말에 멈칫하며 놀란 듯 그녀를 쳐다본다. 

  " 내. 내가 지어주라고? "

  " 그래, 리오크라면 멋진 작명 정도는 해줄거 아니야? "

  " 아, 그. 그런가. 하하하 …. "

  멋쩍은 듯 웃는 그의 모습에 로라는 리오크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졸랐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리오크는 뭔가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로라를 바라보며 말한다.

  " 뭐, 까짓것 지어주지 뭐! "

  " 정말? 우와, 드디어 우리 마을에도 이름이 생기는건가? 그래서, 뭐로 지어줄거야? "

  " 어? 아, 아. 그게 말이지. "

  당황한 듯 말을 더듬던 리오크는 애꿎은 술잔을 들이키며 슬쩍 로라의 표정을 쳐다본다. 뭔가 심하게 기대를 하고있는 눈치의 로라를 보자 리오크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로라에게 말한다.

  "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

  " 에? 지금이 아니라? "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로라의 얼굴을 리오크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곤 저 하늘 높이 떠있는 달을 가리키며 미소 띈 얼굴로 말한다.

  " 저 달이 초승달이 되는 날. 그때 말해줄게. "

  " 정말이지? "

  " 응, 정말이야. "

  확신에 찬 그의 말에 로라도 방긋 웃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선다. 그리곤 소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굳게 잡은 두 손을 놓지않고 조용히 하늘의 별이 되어본다. 그리고 그 축제를 뒤로 며칠 뒤, 하늘에 달은 깨지고 또 깨져 가련한 모습의 초승달로 바뀌어있었다. 그리고 약속 당일이 된 날, 리오크와 로라는 서로가 처음으로 만난 마우리스 정상에 서있었다. 그들은 밝고 영롱한 빛을 내며 그들을 비추기라고 하는 듯, 온 세상을 아름다운 색을 띈다. 리오크는 꼭 붙잡은 두 손을 놓치않으며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로라를 바라본다. 로라 역시 그런 리오크를 수줍게 쳐다보며 염장 아닌 염장을 지르며 서로를 바라본다. 

  " 드디어 오늘이네. "

  " 그러게. "

  어색한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다. 평소와는 다른 공기와 다른 느낌으로 서로가 조금은 불편한 듯이 서있던 그들의 침묵을 리오크가 먼저 깨트린다.

  " 2년 전에 약속 했었지, 2년 뒤 초승달이 뜨는 날 이 정상에서 만나 나와 결혼해주겠다고. 난 오늘만을 기다렸어. 언제나 함께할 수 있는 오늘을 말이야. 그래서 오늘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거야. 로라, 당신 역시 나와 함께 하겠어? "

  떨리면서도 강인한 그의 말에 로라를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애써 감추며 기쁘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로라의 화답에 리오크는 씨익 웃으며 그런 로라를 품에 안는다. 그리고 리오크는 작고 여린 그녀의 귀에 입을 갖다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전한다.

  " 사랑해, 로라. "

  " 저도요, 리오크 …. " ”


  " 꽤나, 기분 나쁜 이야기네요. "

  "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꽤나 씁쓸하면서도 슬픈 적막이 찾아왔다. 어르신의 얘기를 듣고있던 나는 어느세 경청을 하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고, 어르신 역시 얘기를 하며 감정이입이 됬는지 발갛게 볼이 붉어진다. 잠깐동안에 휴식을 취할 겸 이야기를 멈추고 촛불에 불을 밝히던 어르신에게 물었다.

  " 그렇다면 예전부터 마키 족과 루에르 마을은 하나의 집단에 속했다고 볼 수 있는건가요? "

  " 뭐, 그렇게 볼 수 있지. 내가 말한 얘기 그대로라면 말이지. "

  " 그렇다면 언제부터 마키 족과 루에르 마을간의 균열이 생겼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 그렇지않아도 그 뒷이야기에서 모든걸 알 수 있게 될걸세. "

  어르신은 자리에 앉으며 구부정한 허리를 벽에 기대며 잠시 한숨을 돌린 후에야 마저 이야기를 이어간다.


  “ 그 일이 있고나서 일주일 뒤에 리오크와 로라를 혼인을 했고, 그 날 이후로 마키 족과 로라가 이끌던 마을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의 성지라며 아무도 발길을 못 닿던 그들의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사람이 되었으며 그 전에도 왕성하던 교류는 그들의 혼인으로 인해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는 마키 족과 마을. 얼굴에 웃음꽃이 질 생각도 없이 그들은 늘 행복해보였다. 마키 족의 족장을 맡고있던 리오크 역시 혼인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이게 마을간의 번창을 위해 힘썼고, 마을사람들 역시 그런 마키 족을 도와 하루가 달리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하루 하루 행복해져만 가 달콤한 향기까지 풍기던 그 속에 로라 역시 하나의 선물을 몸에 지니게 된다.

  " 뭐, 임신? 그. 그게 정말이야? "

  부끄러우면서도 기뻐하는 듯한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자 리오크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마을 곳곳을 뛰어 다닌다. 그리곤 믿지 못하는 듯 다시 한번 로라에게 되묻곤 로라를 품에 껴앉는다.

  " 고마워, 로라. 정말 고마워. "

  그의 눈물에 로라도 살짝 눈가가 투명해진다. 리오크는 곧바로 마을과 마우리스를 돌아다니며 로라의 임신 사실을 밝혔고, 그 사실을 안 부족들과 마을사람들은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며 축하의 말을 건넸고. 행복해보이는 로라의 얼굴을 보며 리오크는 더욱 더 하늘을 향해 치솟을 기세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날 밤. 마을로 돌아온 리오크는 한 손에 뭔가를 들고 그녀에게로 걸어간다. 차마, 로라를 자기가 지내고 있는 마우리스로 데려갈 수 없어서 밤마다 마을을 들리는 리오크는 늘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오늘은 왠지 들뜬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가는 리오크의 모습에 로라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맞이한다. 왠지 모르게 기뻐보이는 그의 얼굴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로라가 이부자리를 펴다말고 그에게 다가가 묻는다.

  "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왜 그렇게 싱글벙글 웃고 계세요. "

  로라의 말에 사로이는 잔뜩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뭔가를 건넨다.

  " 이게 뭐에요? "

  " 우리들의 약속. 늘 함께하고 행복하자는 우리들만의 서약. "

  리오크가 건네준건 반으로 나뉘어진 메달 조각. 리오크는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녀는 그의 말에 감동을 받은 듯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울먹거리며 그의 품에 안긴다.

  " 임신 축하해, 로라. 정말이야. 진심이야 …. "

  그의 목이 덩달아 메어온다. 끊길 듯 안 끊길 듯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로라의 눈물은 바닥으로 한방방울 씩 떨어진다. 리오크는 로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 로라, 전에 나한테 부탁한거 있지. 이 마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 우리, 이 아이의 이름 루에르라고 하자. 그리고 이 아이의 이름을 따서 이 마을을 루에르 마을이라고 하자. 어때, 괜찮아? "

  "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 저, 너무 기뻐요. "

  " 로라 …. "

  소리 없이 느껴지는 그들의 사랑은 그날 밤, 다른 날보다 더 붉게 피어올랐다. ”



  “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로라의 배를 보며 리오크는 더욱 힘을 내 하루를 버텨나갔다. 리오크와 마을사람들의 힘 때문인지 계속해서 변해가는 하루가 그들의 웃음이 될지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들은 기뻐했다. 이렇게만 간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문명보다 더 발달할거라며, 자연과 어우러지며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지킬 수 있을거라 믿고 있는 그들은 그들만의 신념을 통해 살아나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 듯 그들은 한치도 희망을 놓지 않고 움직인다.
  한편, 마우리스 정상에서 흐뭇한 미소로 마을을 내려다보는 리오크 뒤로 창을 든 남자가 다가오며 그에게 묻는다.

  " 족장 님, 오늘도 내려가시는겁니까? 하루도 빠짐없이 내려가시는걸 보면 대단도 하십니다. 저라면 하루 쯤은 이곳에서 머물텐데 말이죠. "

  그의 말에 미소를 짓던 리오크가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 루에르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

  "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아닙니까? 아직은 족장 님보단 로라 님의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질겁니다. "

  " 그래도 옆에 아빠가 있어야 아이도 안심을 할건 아닌가? 아직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녀석이긴해도 말이야. "
  
  리오크의 말을 조용히 듣던 남자는 실 없이 웃으며 말한다.

  " 그런가요 …. 저는 아직 총각이라서 그런지 족장 님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네요. "

  " 자네도 좋은 여자를 만나고 한 가족이 된다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거야. 그나저나 오늘 마을에 무슨 일은 없었나? "

  " 네, 아시다시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서 정황을 살피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지만. 제가 봐온 상황으론 아무 일도 없습니다. 들리는건 사람들의 웃음소리 뿐이죠. 더군다나 족장 님과 로라 님의 아이가 태어날 생각에 마을사람들과 우리 부족이 서로 공생하고 있으니 별로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을겁니다. "

  " 그렇다면 다행이군 …. 알았네, 나는 이만 마을로 내려가보록 하지. "

  리오크는 발길을 돌려 마을 쪽으로 향했다. 리오크의 등 뒤에서 묵묵히 리오크를 바라보던 남자 역시 피식 웃음을 자아내고 리오크와 반대 방향으로 산을 내려간다. 
  그 뒤로 몇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지겹도록 쪄오던 세상은 조금씩 포근해지며 차가운 기운이 산과 마을을 휘감는다. 어느 덧 겨울이란 시간이 다가왔는지 마을사람들과 마키 족들에 분주한 움직임이 보인다. 그 속에서도 로라의 배에 곤히 잠들어있는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었다. 앞으로 몇일 후면 리오크와 로라의 아이가 태어난다. 그 말은 곧 이 세상의 멸망이 한치 앞으로 다가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

  
  " 멸망? 그게 무슨 말씀이죠? "

  " 듣는 대로네. 그 남자와 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인해 이 세상은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네. 하지만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지만 말이야. "

  어르신은 담배를 뽑아 물고는 탁한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살짝 눈이 찌푸려지고 공기의 탁함이 느껴진다. 나는 어르신에게 무슨 말인지 물었지만 어르신은 아무 말 없이 담배만 물고 있을 뿐. 뭔가 머뭇거리면서도 망설이는 느낌이 든다. 

  " 후우, 어찌 하필이면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걸 대해 묻고 싶은 눈치로군. 하지만, 내가 아는 사실로는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같은 평범한 아이였어. "

  " 그런데 왜 그 아이가 그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거죠? 여느 아이들과 똑같은 아이였다고 …. "

  " 그렇기때문에 더 이상한거야. "

  " 예? "

  " 다른 아이들과 같은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에게만 그 일이 일어난게 말이야. 더군다나 하필이면 마키 족의 족장을 맡고 있는 남자와 그의 아내이자 한 마을의 촌장을 이끌고 있던 그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그런 일에 휩싸인걸 말이야.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네. "

  타들어가는 담배 만큼이나 내 얼굴빛도 조금씩 검붉게 변해갔다. 어르신의 눈에는 고독과 한탄의 기억이 느껴지는 듯한 눈동자로 입에 문 담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그런 어르신을 바라보며 그의 입에서 무언가 단서가 될만한 이야기가 나오는걸 기대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는걸 기다리던 나를 어르신은 물끄러미 쳐다보며 담배를 촛불에 태운다. 

  " 루에르, 그 아이는 정말 불쌍한 아이지. 태어난지 얼마 되지않아 죽임을 당하고 그 때문에 그 아이 엄마마저 파멸한 … 아주 슬프면서도 무서운 이야기지. "

  " 아이가 … 죽어요? "

  " 그래, 죽어.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말이네. "

  " 도. 도대체 누가 …. "

  " … 마키 족. "

  " 네? "

  " 그 아이를 죽인 자가 리오크가 이끄는 마키 족에 속한 사람이네. "

  ' ! '

  " 그 남자가 죽였어. 그것도 아직 어린 여자아이를 말이야. 왜 죽였는지는 모르네. 다만, 그 남자가 리오크에게 죽기 전에 한 말이 있었네. "

  " … 그게 뭐죠? "

  " …. "

 
  “ " 나는 그저 재앙의 씨앗을 뿌리 뽑은 것 뿐이다. 그 누구도 나서지않아 자진해서 나선 나를 이렇게 죽이다니 …. 하지만, 이걸로 그 아이와 관련된 사람이 모두 죽는다면 나도 그리 나쁘진 않지만 …. "

  " 그게 무슨 말이냐 … 감히 네가 나의 뒷통수를 친걸로도 모잘라, 내 아이. 그리고 내 아내마저 죽음에 빠트렸어! 도대체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나로도 모잘라 내 가족까지 손을 댔냔 말이냐!! "

  리오크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걸로도 모잘라 이성을 잃게 된 그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만이 흐를 뿐이다. 마우리스 정상에 위치한 한 벼랑 끝에 몰린 남자는 실실 웃으며 리오크의 눈을 바라본다. 정신을 잃은 것도 무서워서 어찌할 줄 몰라서 그런게 아니다. 정말로 이 남자는 자신을 끝으로 이 재앙이 끝날거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리오크의 눈에는 이 남자는 단지 자기 가족을 포함해 마키 족과 루에르 마을간의 결연이 끊김을 물론이고, 한 때는 같은 친구이자 가족이라 여겼던 그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 밖에 없다는 죄책감에 분노가 이를 뿐이였다. 그의 눈물이 대지를 적시며, 그가 굳게 쥐고 있는 창이 그의 목을 겨누며 조금씩 그 남자에게 다가간다. 리오크는 이를 뿌득 갈며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 정말 … 정말로 내 아이. 루에르에게 사과할 마음이 없는건가? 자네가 … 자네가 그 아이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나는 자네를 죽이지 않을걸세. 그런데 … 자네는 그럴 생각이 없는건가? "

  리오크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용서를 빌 기회를 주었다. 그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한 부족을 이끄는 족장으로써 동료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였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의 말을 듣곤 피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 루에르. 그 애를 죽인건 내 평생의 기쁨이자 행복이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그 행복으로부터 자기의 아이를 죽인 죄책감을 안게 할 생각인가? 미안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죽인 것도. 그걸로 인해 내가 죽는다고 한들, 그 아이에게 용서는 커녕, 사과할 마음도 추호도 없다! "

  그의 말이 리오크의 귀에 흘려 들어오자, 굳게 잡고 있던 창이 그의 목을 뚫고 바닥을 뚫고 지나간다. 검붉은 피가 하늘로 솟구치며 대지를 적셨고. 리오크는 바닥에 무릎을 끓고 원통한 마음과 더불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하필 다른 이도 아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원망이 담긴 눈물을 흘리며 홀연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며칠 후, 마을에 다시 모습을 나타난 리오크를 마을사람들은 슬픈 눈망울을 하며 그를 위로하고자 그에게 다가갔지만, 그들에게 돌아온건 싸늘한 죽음 뿐. 한순간에 벌어진 사건이 순식간에 마을로 변졌고. 리오크의 손에 죽음을 당한 마을사람들의 시체만이 마을에 널부러질 뿐이였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동료이자 가족으로 여겼던 그들에게 배신감을 느껴서일까. 아니면, 로라와 아이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함에 화를 표출하는 것일까. 그의 발 밑에 쌓여져가는 시체만이 그의 말을 대신할 뿐이였다.
  그렇게 한순간에 벌어진 살육은 끝나고 리오크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시체들과 그의 손에 묻은 그들의 비극이 리오크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끝내 리오크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슬픈 최후를 맞게 된다. 그가 죽인 사람들의 피에 자신의 피를 묻힘으로써, 죽어서도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굳은 다짐의 역할이 되었을까.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의 수만큼이나 그들의 원통하면서도 애통한 죽음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저, 한 때 행복했던 그때의 기억만을 되새기며 그들은 조금씩 그들과의 동화를 꿈꿀 뿐이였다. ”

  
  결국에 그들은 비통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누구에 잘못도 아닌, 순전히 자기들이 자신의 파멸을 이르게한 듯한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난 그 자리에 없었지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 자꾸만 내 가슴을 억누른다.

  " 슬픈겐가? 하지만, 슬퍼도 어쩔 수 없어. 이미 그 일은 오래된 기억 속에 묻힐걸세. 나도 조만간 이 기억을 잃고 말겠지. 하지만, 자네만은 이것을 꼭 기억하게. 그 남자가 리오크와 로라의 아이를 죽이게 된 계기가 분명히 있을거라고. 그 남자도 그 아이를 누구보다 더 사랑했네. 그건 마을사람들도 마키 족도 모두가 한마음이였을테니. 다만, 그 무언가로 인해 그 행복에 금이 갔다고 생각해주게. 그렇지않으면 더욱 마음이 아플테니 말이야. "

  " …. "

  어르신과의 긴 대화를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곤히 잠들어있는 로빈 옆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키 족의 족장이자,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그 여자의 뱃속에서 꿈틀대던 작은 생명의 죽음. 그건 그들의 가슴 아픈 기억이 될테지. 

  “ 그 아이를 죽이게 된 계기가 있을걸세 ”

  계기라 …. 그 계기가 어찌됬든 한 가족의 파멸을 일으켰다. 그 죄는 씻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했던 행동이 정말로 잘못됬던걸까? 표면적인 상황에서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의 내면에 담긴 진심은 무엇이였을까? 그 남자의 말대로 그 아이. 그러니까, 루에르는 정말로 그 사건의 연류된 인물이였던걸까? 그렇지만 아직 작고 여린 그 어린아이가. 제 몸도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는 아이일텐데. 어찌 그 아이가 그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봐야할까? 그저 추측일지도 모르는 일일텐데.

  " 후우. "

  머리가 복잡하다. 어르신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나면 어느정도 사건의 단서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 어찌된게 갈 수록 태산이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해진건. 마키 족과 루에르 마을에 대한 사실과 루에르라는 이름으로 인한 마키 족의 태도. 이 두가지는 확실히 알아낸 것 같다. 다만, 아직도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 일이 일어난건 몇년 전의 일.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세상의 멸망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걸까? 그 아이라면 그 일이 발생하기 이전에 사망한지 오래고. 그 일에 관여된 사람들은 모두 죽은걸로 아는데 ….

  " ! "

  하지만, 어르신의 말씀 중. 마키 족이 죽었다는 얘기는 없었다. 그리고 마을엔 그 남자 혼자 갔다고 했어. 그렇다는 말은 그 사건은 마키 족에 의해 발생됬다는건가? 하지만, 대체 … 어떻게 설명해야 이 일을 끝낼 수 있는걸까? 사건은 풀면 풀 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의문들이 하나씩 모습을 나타낸다. 그 중, 마키 족에 대한 의문점이 제일 크다. 그 아이를 죽인 것도, 그들을 제외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마키 족 뿐이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몇년 후 세상은 종말을 맞는다 …. 젠장, 뭐가 이리 복잡하게 흘러가는지 모르겠군.

  " . "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런저런 생각에 골치가 아파올 찰나에 방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빛을 내며 공중에 떠오른다. 베게에 누워 이 모습을 보던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쪽으로 다가가자 빛을 내던 물체가 이내 빛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손에 집어 들고 달빛에 비춰 바라보니 그 물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메달. 전에 한번 이런 적이 있었던걸로 기억되지만, 그때는 내 눈 앞에 사로이가 나타나 한번 더 내게 기회를 준다는 말을 남기곤 다시 이곳으로 온 것만이 전부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평소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거지만 …. 뭐, 그때보단 많이 진보한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아까부터 이상하게 바람이 불어 오는 느낌이다. 분명,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바람 한점 불지 않는 날씨였는데 ….

  " ! "

  방금 전까지 방 안에 있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숲 속에 있었다. 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던 로빈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로 말이다. 또 다시 나는 이 메달로 인해 어디론가 워프한건가? 하지만, 주위에는 울창한 나무와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만이 가득할 뿐. 내 주위엔 사람의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내가 발견한게 있다면.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 즉, 나는 지금 과거로 와있었다. 그것도 이 세상의 멸망과 이어진 그들이 있는 과거의 세상으로 말이다.



  P.s : 2화 ' 뫼비우스의 띠 ' 입니다. 내일 마지막으로 3화 ' 환란의 꽃 ' 으로 1부 마치겠습니다.
  P.s2 : 현재 연재 중인 4화 ' 고동치는 보물 ' 은 2부 입니다. 즐감하세요.
  P.s3 : 2화 추가 설명은 ' 과거 ' 그리고 ' 비극 ' 입니다. 제목의 의미는 말씀 안 드려도 될 것 같으므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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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탓하지마라.

시간을 흘려보낸건 나 자신이다.

시간은 주어진게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연히 나라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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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증명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