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 4 -
피투성이가 된 허수아비가 맥 없이 바닥에 쓰러져있다. 헝클어진 그의 모습이 마치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더해져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불그스름한 깃털을 가진 새가 그의 살을 헤집으며 꺼림칙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않는 상태에서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 떨림이 보이지만 슬프게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단 한 마디라도 들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는지 있는 힘껏 버둥거리며 입술을 움직이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이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않았다. 내가 원하던건 이런게 아니었어. 그냥 내가 원하던건 내가 지금껏 퓰고 싶어도 풀 수 없었던 비밀을 알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토록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밝혀져서는 안되는 비밀이었던가? 아니 애초에 이건 '비밀' 이었는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이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많은 슬픔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채워져있어. 조금만 더 채워지면 더 이상은 나라도 감당할 수 없게 되.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조금이라도 덜 수만 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답답하지않았을텐데….
"…돌아가고싶어. 이 상황이 생각나지않을 정도로 더 먼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돌아갈 수 없어. 우리들의 시간은 결코 우릴 기다려주지않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 서로 발버둥을 치고 있어. 어떻게보면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또한,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지금은 가능할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전을 하고 또 다시 새로운 놀잇감을 찾아 해매. 그런데 결국엔 그것 또한 과거랑 다르지않아. 반복된 삶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어. 다르다고 생각해? 아니, 결코 다르지않아.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들은 그 자리에 있을 뿐이야."
꽃이 핀 자리에는 또 다시 꽃이 피고, 꽃이 시든 자리엔 또 다시 꽃이 시들게 되. 그건 시간이 흘러도 변치않아. 말했잖아, 우리는 그저 과거를 이행하고 있을 뿐이란걸…. 그렇기 때문에 난 기억될 수 밖에 없어. 너와 있었던 일들, 우리들에게 닥쳤던 일, 웃다가 울고, 울었다가 웃는, 그런 시시하고도 유치한 일들이 많았던거 기억해? 내게 있었어는 그때가 정말로 행복했었는데, 왜 지금은 내 마음이 이토록 텅 빈것인지 알고싶어. 알려줄 수 있니, 아리아….
아직까지도 나는 그녀가 준 꽃을 품 안에 간직하고 있다. 이 꽃마저 내 곁에 있지않으면 겉잡을 수 없을 정도의 일이 벌어질까봐 두렵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말라비틀어진 꽃 한 송이가 내게는 기억하고싶은 행복한 추억이 담긴 산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 기억이 언젠가는 지워질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함이 그 꽃송이로 지워질 수 있다고 믿어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 추억 또한 서서히 바스라지지않을까…나는 조금씩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다. 혹시라도 내가 만져서 망가지지않을까, 부서지지않을까라는 걱정스러움이 내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애써 잘 간직했던 기억들이 나로 인해 산산히 부서질까봐 두려웠고 무서웠으니까, 지금도 내가 처한 이 상황들이 모두 나로 하여금 일어났기 때문에 그 마음은 더욱 불어나 이제는 접근조차도 꺼려지게 만들고는 이제는 그 기억조차 가둬두려하고 있다. 그 정도로 나는 겁쟁이가 되고 만 것일까….
보아라,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참혹한 광경들을, 이 모두가 나의 행동으로 비롯된 상황이란걸 누구보다도 더 잘알고있지않나? 뒤로 물러선다고 무조건 안전한게 아니란걸 이제는 알아차릴 때가 왔단걸, 조금은 무리해서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나아가는 것이 지금으로써는 그것이 전부란걸 알고 있잖아. 바보같긴, 언제까지 그 반복된 틀에 갇혀 다른 이들과 똑같이 걸을 셈이야? 다른 이들에겐 마치 네놈은 아니라는 것처럼 말해놓고선 정작 심각한건 나잖아? 나약하고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나란 놈은, 어째서 벗어날 생각도 못하고 계속 방어만 하고 있는거야.
"…이제는, 물러설 자리조차 없어. 계속해서 물러났기에 이제는 끝에 다다랐어. 한 발자국만 더 물러서면 떨어지고 말아. 그 말은 이제 선택할 때가 왔다는 말이지."
근 1년만에 뒤져보는 주머니 속에는 너무나도 오래된 나머지, 바사삭 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하게 주머니를 벗어난 꽃은 천천히 내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리아."
푸르스름한 빛깔의 꽃송이, 그리고 그 꽃송이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이 선택이 틀리지않았다는걸, 그리고 이 기억은 영원히 보존될 것이라는걸 그녀가 내게 증명시켜주었다. 비록 시간이 흘러 예전보다는 허름해졌지만 그 본질은 달라지지않았다는걸….
처음부터 낭떠러지 같은건 없었어. 아니 낭떠러지 또한 내 기억의 일부분이었기에 피하고 안 피하고의 문제가 아니었어. 그 모든 것이 나에겐 더 없이 소중한 것들이니까, 만약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다고하더라도 변한건 없어. 단지 두려움이 사라졌을 뿐이야. 그러니까 두렵거나 불안하지않아도 되. 그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 저벅 」
"이제서야 투항할 생각이 생겼나보군."
"난 네놈에게 투항할 이유가 없어. 하물며 죄를 지은 적 또한 없고."
"그 말은, 주군에게 폭력을 휘두른게 죄가 아니라는건가?"
"누가 내 주군이지?"
"뭐?"
"내 주군은 한 분뿐이다. 지금 네놈들이 주군이라 지칭하는 그 자는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평화롭던 나라를 붕괘시키고 자기만의 나라로 만든 반역자이자, 살인자다. 그게 아니라면 네놈들이 그토록 신뢰하고 따르는 주군이란 자는 대체 누구를 말하는거지?"
"아인!!"
「 파박 ― !! 」
「 쿠당탕 ― !」
확실해졌어.
이들은 모두 똑같다는걸, 이들에게는 이 상황이 자기들의 기억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알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간절하고 애타게 매달릴 수 밖에 없던거야. 혹시라도 그 믿음이 깨진다면 자기들에게 들이닥칠 막대한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을테니.
"아…."
의기양양했던 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자기를 엄호하며 금방이라도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님, 내 주위로 쓰러진 그들을 보며 느낀 두려움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 일지도 모르지.
"줄곧 기다렸어.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를…그리고 내가 너에게 이 말을 할 순간을…."
1년간 참아왔던 내 욕심이 어느덧 한계에 치달아있을 때, 나는 그에게 말할 수 있었다.
"사과해. 이 나라를 어지럽힌 것을, 전 주군을 해한 것을, 그리고. 내 친구들에게 상처를 입힌 것을…."
P.s : 마지막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