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이야기

|  나는 작가가 될 테야! 글을 창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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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루에르

- 세상은 멸했다 - 

1 ~ 11



  약 1년이란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 체감 상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으며, 온갖 잡일이란 잡일은 한 듯한 나의 육체가 대답한다. 근육은 부풀어 오르지만 축 늘어지는 나의 고개에 다시금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 하아. "

  길게 늘어지는 한숨소리에 모닥불은 힘 없이 불을 꺼트리고 만다. 

  " …. "

  눈가에 힘이 들어가고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재빨리 나뭇가지를 비볐다. 조금씩 솔솔 풍겨오는 나무의 탄내에 젖 먹던 힘까지 내빼고 나서야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다시 불을 피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또 다시 내 입을 타고 흘러나온다.

  " 하아. "

  도대체 이 세계는 어떻게 된 것일까. 정말로 아무도 없는걸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는건 황량한 땅덩어리 뿐. 이 나무 숲도 간신히 찾아 헤매 겨우 도착한 내 보금자리지만,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나무 아래에서 잠을 청하는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였다. 

    " 하아. "

  나오는건 한숨 밖에 안나오니 내 목도 많이 가늘어졌다.

  " 안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급히 이곳을 떠나야해요. "

  나무뿌리에 머리를 박고 조용히 자는 줄 알았던 로빈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게 말한다.

  " 잘거야. 그러니까 너도 신경쓰지말고 자. "

  로빈은 나의 말을 듣곤 다시 잠에 빠진다. 로빈이 잠들고 한참을 모닥불 앞에 앉아있던 나는 모닥불 근처에 나뭇가지를 던져놓곤 나무에 몸을 기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였다.

  "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 "

  놀랍다 못해 어이를 상실한 나는 실 없이 히죽거렸다. 그 많던 빌딩이며 사람들까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바로 내 앞에서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왜 나 혼자만을 남겨두고 그 많던 사람들이 싸그리 사라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전까지도 나는 실의를 잃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재해가 일어난 것은 더더욱 아니였다. 단지, 평상시처럼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뒤바뀐 세상의 모습에 잠시 혼란이 온 것 뿐이였다. 하지만, 그 혼란이 그렇게 길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 어연 일주일이란 시간이 흐를 동안. 나는 움직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한마디로 반 시체가 되어 대지에 남아있을 뿐이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못 느꼈다. 배고프다. 목이 마르다. 그런걸 느낄 수 없었다. 당연한데 당연한 것들은 당연하게 생각해야하는 것 뿐인데. 나는 그 당연한 것들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 . "

  혼자만 남겨진 공포, 고립감, 고독. 그 외에 수많은 감정들이 서로 부딪치며 공존하는 동안에도 나의 눈빛은 오로지 내가 봐왔던 그 마지막 모습들을 볼 뿐. 이미 나는 사람이란 허물을 쓴 무(無)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 하아. '

  이렇게 죽는걸까.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걸까. 미처 죽지 못해 살아남은 혼자만의 공간에서도 나는 내 자신에게 버림을 받는걸까. 아니면, 내가 버리려하던 그 자신에게 내가 도리어 버림을 받는걸까. 알 수 없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사라져버린 땅 위에 머리를 박고 누워있는 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내가. 어찌하여 그 이외에 것을 생각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불가능하다. 이미 나는 죽을 운명을 갖고 살아남았다. 혼자 남은 이 세상, 아무 미련 없다. 멀지도 짧지도 않은 그때의 그 시절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죽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이다.

  
  ' . '

  잠시 의식을 잃은 것일까. 제길 … 의식을 잃었을 때 죽어버리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나는 죽지도 않고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일까. 신의 장난인가? 아니면 내 질긴 목숨 때문인가? 새까맣던 시야가 자츰 빛이 새어들어오자, 검은 실루엣이 점점 내 눈 앞에 나타났다.

  " 정신 차려! 여기서 죽으면 안돼! "

  사실 난 죽은건가? 왠 사람이 내 앞에 있는거냐 ….

  " 정신 차려! 너까지 죽으면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안 남는단 말이야! 제발 정신 좀 차려! "

  ! 

  " 정신이 들어? 정신이 드냐고!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여긴 저승이 아니였던건가? 여긴 아직 지구란 말인가?

  " 정신이 들었으면 말 좀 해봐! "

  정령, 내 앞에서 나의 뺨을 두들기는게 귀신들이 아니라 사람이란 말인가? 그 말은 아직 이곳에 생존자가 있다는 말인가?

  " 너. 너는 … 누구지? "

  나는 가까스로 떨리는 입술을 가다듬도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나의 말에 활짝 함박웃음을 지으며 큰소리로 만세삼창을 외친다. 그런 그를 나는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 다행이야 …. 난 또 혼자가 될까봐 … 두려웠어. "

  그는 눈물이 그렁 그렁 맺힌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땅바닥에서 꼿꼿히 누워있던 나는 부들거리는 두 팔로 몸을 지지하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일만이다. 이 대지에 두 발로 서있게 된 것이. 그는 한쪽 손으로 쓰윽 눈물을 닦곤 제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손을 내민다.

  " 내 이름은 로빈이야. 네 이름은? "

  " 루에르. 루에르야. "

  " 뭐? "

  그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주츰 물러난다. 

  " 왜 그래? "

  "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

  그는 손사래를 치며 아무 것도 아니라곤 했지만, 왠지 뭔가가 수상하다. 기분 탓인가? 그는 잠시 주츰하더니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온다.

  " 그런데 루에르는 어떻게 여기에 쓰러져 있던거죠? "

  방금 전까진 반말을 하던 로빈이 갑자기 존댓말을 쓴다. 수상하다. 몹시 수상해.

  " 자고 일어나니 세상은 이 지경이 됬고, 그 충격으로 일주일동안 이곳에 쓰러져 있었어. "

  " 에엣? 그러면 일주일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

  " 당연하지. 더군다나 이곳에 먹을게 있을리가 있겠어? "

  " 말도 안돼 …. "

  로빈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 그나저나 어떻게 된거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세상이 이렇게 뒤바뀐거지? 어떻게 하루 아침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바뀔 수 있었냐고! "

  " 그.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저도 잠에서 깨어나니 세상이 이렇게 된 것 밖엔 …. "

  로빈 역시 아무 것도 몰랐던건가. 그저 우리는 운이 좋았다는 이유 하나로 이 땅 위에 서있는걸까? 왜 하필 다른 사람들도 아닌 우리였을까? 로빈과 나는 전생에 무슨 관련이 있는걸까? 아니면 진짜 순전히 운으로 인해 목숨만은 건진걸까? 하지만, 그 연장된 목숨이 그리 탐나진 않는다. 쓸어갈거면 한번에 쓸어갈 것이지 왜 달랑 두명만 남겨두고 ….

  " 그나저나 어떻게 하실거에요? "

  " 뭐가? "

  " 여기에 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

  " 그렇다고 어딜 가기도 애매하잖아. 봐바, 주위는 온통 황량한 사막처럼 아무 것도 없다고. "

  나는 손가락으로 주위를 가리키며 로빈에게 말했고, 로빈은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 조금만 이곳에서 벗어나면 숲이 하나 나와요. 거기로 가요. "

  로빈은 나의 팔을 잡아 당긴다.

  " …. "

  잠시 뒤를 돌아봤다. 정말로 그 자리엔 아무 것도 없었다. 꿈인줄 알고 다시 눈을 떴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미련은 없다. 다만, 후회만이 있을 뿐.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그러는게 아니였는데 ….

  " 루에르 씨? 왜 그러세요? "

  " 아, 아무 것도 아니야. "

  머뭇거리던 내 두 발이 조심스럽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 루에르 씨, 루에르 씨! "

  어느덧 날이 밝았다. 칠흑처럼 캄캄하던 밤하늘이 어느세 푸르른 바다가 되어 내 아침이 되었다. 로빈은 나를 흔들어 깨웠고.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로빈을 바라봤다. 

  " 일어나셨어요? "

  " 어, 지금 방금. "

  바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간밤에 꺼진 불씨를 흙으로 덮었다.

  " 자, 그럼 움직일까. 다음 우리가 향할 곳은 어디지? "

  " 이 숲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수에요. "

  " 그런가. 그럼 출발해볼까. "



  " 정말 여기에 사람을 본게 맞아? "

  숲에서 벗어난지 1시간가량이 지난 듯, 하늘의 태양이 약간 노르스름하게 산 끄트머리 위로 올라간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메말라있는 호수는 우리의 희망처럼 가망이 없는 듯 보였다. 로빈의 말로 인하면 이곳에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 루에르 씨, 어떡하실거죠? "

  로빈은 나를 보며 물었다.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는 답이 안나온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며 한동안 호수의 목소리를 들으려했지만 들리는건 사람들의 비명소리일뿐, 이 호수도 이젠 끝이다.

  " 루에르 씨? "

  " 당분간 여기서 머물자. "

  " 제 말을 믿으시는건가요? "

  " 네 말을 못 믿으면 나는 누굴 믿으라고? "

  로빈은 나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씨익 웃는다. 

  " 그나저나 어디 마땅히 자리를 펼 때는 없을까?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하니 좀 괜찮은 곳에 머무는게 좋을 것 같은데…. "

  호수 주위를 둘러보며 로빈에게 말했다. 로빈은 그런거라면 자신에게 맡기라며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간다. 로빈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홀로 호수에 남은 나는 조용히 호수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사람의 손길은 전혀 닿지않고 그 일로 인해 확실히 메말라버린 호수가 맞다. 로빈의 말대로 사람이 있다면 이곳에 조금은 사람의 손길이 닿았을 터인데 이 호수는 오랜시간동안 방치됬다. 그 말은 즉, 이곳에 사람이 있을 확률은 0%다.

  " 루에르 씨! "

  헐레벌떡 내쪽으로 뛰어오는 로빈을 발견한 나는 이내 호수에 대한 시선을 거두고 로빈에게 다가섰다.

  " 좋은 데라도 찾은거야? "

  " 저쪽에 잔디밭이 있어요! "

  잔디? 잔디밭이라고?

  " 빨리 오세요! 정말 끝내줘요! "

  로빈은 마냥 10대 소녀가 된 듯, 펄펄 날아오르며 내 팔을 이끈다. 잔디밭이라고? 이런 허허벌판에 잔디밭이 있다니. 그 일로 인해 훼손되지않은 곳이 이 호수 말고도 많단 말인가? 하지만, 그 많던 도시들을 한번에 휩쓸어 갈 정도에 데미지를 줬을텐데 어째서 … ?

  " 루에르 씨, 보여요? 정말 드넓은 잔디밭이에요!! "

  로빈이 이끌어간 곳엔 정말로 잔디밭이 있었다. 그것도 소규모의 잔디가 아닌, 정말 운동장에 심어놓은 듯이 빽빽한 잔디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풀린다. 

  " 루에르 씨, 괜찮아요? "

  " 어, 괜찮아. "

  이건 말도 안돼. 정말로 이런 곳에 이런 모습이 남아 있었다니 …. 정말, 이건 진짜인가? 눈을 비벼 꿈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정말로 내 눈 앞엔 잔디밭이 있다. 그것도 사람이 밟아 푹신해진 상태의 잔디밭이 말이다. 축구공만 있다면 바로 축구를 하고 싶은 충동까지 이르는 그런 장관이 펄쳐졌다. 아직, 세상은 끝난게 아니였구나 …. 스르륵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흐른다.

  
  " 역시 로빈 말대로 이곳에 사람이 사는게 맞는 것 같아. "

  " 정말요? "

  되려 놀란건 로빈이였다. 자신이 분명 봤다고 해놓고선 놀라는 로빈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확실하게 본게 아니라서 약간 의문을 품긴 했지만, 호수에서의 일과 잔디밭. 그리고 그 이외에 이곳 상황을 보면 분명 이곳엔 사람이 살았었다. 그러나, 그게 언제인지 우리가 이곳을 찾기 수개월 전인지에 대해 아는 바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건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거다. 더군다나,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그리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난게 아닐거라는 생각도 든다. 

 
  " 루에르 씨! 루에르 씨! "

  " 무슨 일이야? "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던 나는 로빈의 부름에 급히 나무에서 내려왔다. 로빈은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 상기된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 사람이 …. 사람의 발자국을 봤어요!! "

  뭐?

  " 그. 그게 정말이야? 사람의 발자국을 봤다는게? "

  " 정말이에요. 정말 저쪽 숲에 …. "

  로빈의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나는 서둘러 로빈이 가리키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사람이다. 우리 이외에 생존자가 있던거야. 드디어 사람을 만나게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나도 모르게 희열을 느끼며 바삐 앞으로 달려갔다. 로빈이 가리킨 숲에 도착한 나는 주위를 재빨리 둘러봤다. 

  " ! "

  있다. 정말로 사람의 발자국이 있다. 사람이 밟고 지나간지 얼마 안된 사람의 발자국이 조금씩 진흙으로 뒤덮히던 장면을 목격한 나는 두 손에 입을 모아 소리쳤지만, 돌아오는건 메아리 뿐. 다시 한번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대답소리도 못 들었다. 뒤늦게 따라오던 로빈 역시 나의 목소리를 듣곤 실망한 눈빛으로 주저앉는다.

  " 제길 …. "

  사람을.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 그토록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을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왜 그들은 일찍이 이곳을 떠난걸까? 아니, 아니면 처음부터 이곳엔 아무도 없던걸까? 단지, 동물의 발자국을 사람의 발자국으로 착각한게 아닐까? 아니, 그럴 순 없어. 다시 돌아본 발자국은 정말 사람의 발자국이였다. 나와 로빈의 발자국도 아닌 제 3의 발자국. 그렇다. 분명 이곳엔 사람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날 밤까지 사람을 찾아 헤맸지만 역시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건 그 숲에 찍힌 발자국의 주인은 이곳에 머물었다는거다. 로빈이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한건 약 일주일 전. 딱딱하게 굳은 발자국이 아닌, 방금 밟고 지나간 듯이 찐득거리는 진흙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라곤 말할 순 없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니까.

  " 루에르 씨, 무슨 생각하세요? "

  잔디밭 위에 모포를 깔던 루에르가 불을 피던 와중에 생각에 잠긴 내게 물었다.

  " 아, 아무 것도. "

  나는 두 손에 들고있던 나뭇가지를 비비며 로빈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렸다.

  " 루에르 씨, 그거 아세요? "

  " 뭐가? "

  나뭇가지를 비비던 나의 손이 멈췄다.

  " 루에르 씨는 항상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세요. 뭔지는 모르지만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요. "

  " 그랬어? 나는 잘 모르겠는데 …. "

  로빈의 말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시 나뭇가지를 비볐다.

  " 루에르 씨. "

  " 응? "

  " 루에르 씨는 절 동료라고 생각하세요? "

  " 어? "

  나뭇가지를 비비던 나의 손이 또 다시 멈췄다.

  " 그게 무슨 말이야 로빈? 동료라고 생각하다니? 넌 내 친구잖아. "

  " 그런데 루에르 씨는 왜 제게 말하지 않는거죠? 친구라면, 절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고민이 있을 때  혼자 끙끙 앓지말고 제게 상의하는게 친구 아닌가요? 루에르 씨, 당신은 제게 그 고민을 말하는게 그렇게 어려우셨나요? "

  로빈은 나의 행동에 상처를 입었는지, 부르르 떨리는 입술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런 로빈을 보며 아무 말도 없이 애꿎은 나뭇가지를 발로 밟아 부러뜨렸다. 로빈은 약간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재빨리 닦아내며 잔디밭에 어질러져있는 모포를 두 손으로 잡아 당기며 잔디 위에 모포를 펼친다. 

  " 난 단지, 괜한 피해를 주기 싫었어. 안 그래도 로빈이 얼마나 힘든지 내가 더 잘 아는데, 내 고민까지 로빈에게 떠넘기기 싫었던 것뿐이야. 내가 로빈을 친구라고 생각하지않아서가 아니라 친구여서 그런거라고. 그러니까 …. "

  …. 

  " 미안해. "

  " . "

  " 다신, 나 혼자서 끙끙 앓지않고 로빈에게 말할게 …. "

  " …. "

  " 정말, 미안해. "

  로빈은 울먹이며 내게 달려왔고, 나는 그런 로빈은 아무 말 없이 안아주었다. 로빈과 생활한지 일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로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로빈은 나와 달리 내가 모르는 것까지도 세세하게 아는걸 보면 로빈은 나보다 더 나를 아끼는거라 생각한다. 

  ' …. '

  하지만, 이럴 때마다 내 머릿 속엔 로빈이란 이름은 지워지고 잊혀졌던 이름이 나타난다.

  ' 미즈오 '

  이 세상이 멸망하기 전, 이 세상에 존재했던 내 소꿉친구다.



    ' 미안해. '

  지금은 이 말 밖에 할 수 없는 것 같아.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그때 너를 그렇게 대하는게 아니였는데. 그때로 돌아간다면 너에게 용서를 빌고 싶어 …. 하지만, 그러지 못해. 이 세상은 멸망했고, 세상은 한 줌의 재가 되버렸으니까. 더군다나, 평상시에는 너를 제대로 기억도 못하면서 왜 이런 때만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어. 내가 나빠서일까? 아니면 너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주위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걸 알기에 내 자신이 나를 컨트롤 하는걸까? 난 잘 모르겠어. 그저, 너가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너가 살아서 내 눈 앞에 나타난다면, 그때 내가 너에게 저지른 그 잘못을 뉘우치고 싶어. 그러면 너는 날 용서해주겠지? 날 용서해줄거지? 응? 미즈오, 미즈오!!

  ' ! '

  잠에서 깨어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젠장 … 벌써 사흘 째다. 이 놈의 꿈은 계속해서 나를 속박의 굴레에서 조여온다. 로빈이 나에게 안기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나타나는 미즈오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나를 괴롭힌다. 평소에는 생각은 커녕, 오이란 녀석이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녀석이 왜 그런 때만 떠오르는지 ….

  ' 하아. '

  미즈, 넌 진정 살아있는거냐? 살아있다면 제발 내 눈 앞에 나타나라. 안 그러면 널 찾기도 전에 내가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

  
  " 루에르 씨, 일어나셨어요? "

  여느 때와 같이 제일 먼저 일어난건 로빈이였다. 내 어깨를 툭툭 건들이며 나의 잠을 깨우는 로빈의 얼굴은 다른 때보다 더욱 환하게 비춰졌다. 

  " 벌써 아침이 된건가, 시간도 참 빠르게 지나는군 …. "

  밤새 잠을 설친 나는 부시시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축하게 젖은 등에서 한기가 올라오자, 저절로 재채기가 나온다.

  " 어, 감기 걸리셨어요? "

  로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 아, 아니. 아무 것 …. "

  나는 순간 말을 끊고, 슬쩍 로빈을 쳐다보며 말했다.

  " 감기는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

  " 그래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이런 곳에서 감기에 걸리면 큰일 나니까요. "

   로빈은 축 처진 어깨를 이끌고 조용히 모포를 곱게 접는다. 며칠 전, 로빈과의 약속을 깰 수는 없었다. 앞으로 로빈에게 내가 고민이 생길 때마다 말한다고는 했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질 않는다. 

  " 후우. "

  아마, 이것도 하나의 고민일까? 로빈에게 고민을 말해야하는데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어서 고민하는 것. 이런걸 말해야하는건가? 하아, 꽤나 성가신 약속을 한 것 같다. 

  " 루에르 씨, 아침준비는 끝났어요. "

  " 아, 수고했어. "

  로빈은 모포를 내게 건네며 내 옆을 지나간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사람 찾기에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할 수 없기에 아침식사도 거르고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뭐, 이전 세상에서도 늘상 아침을 제대로 챙겨먹은 적은 없으니까 나는 별 상관은 없지만 …. 가끔 로빈을 보면 아침을 굶는건 로빈에게 조금은 힘든 역경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런지 점심 때가 다가오면 로빈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기 시작한다. 그런 로빈을 보며 나는 내심 고민하고있던 미즈의 생각도 잠깐동안은 잊게 된다.

  " 어제, 우리가 왔던 곳이 이 지점이였죠? "

  자기가 직접 만든 지도를 펼쳐내며 로빈은 꽤나 진지한 모습으로 대화에 임한다. 

  " 우리가 전에 머물었던 숲을 A 지점이라 보면. 현재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호수 근처 잔디밭을 B 지점, 그리고 현재 우리가 와있는 C 지점에선 사람의 발자취를 찾지 못했어. 그 말은 사람들은 이 지점을 지나간게 아니라고 볼 수 있지. "

  " 그렇다면 사람들은 D 지점을 통해서 갔다는 말인가요? "

  지난 사흘동안 우리가 행한 일들이 적힌 지도를 보며 로빈은 내게 묻는다.

  " 아니, D 지점에 갔다고 보는 것도 나는 아니라고 봐. "

  " 엣, 어째서죠? "

  " 전에 로빈이 사람의 발자국을 찾은 곳은 A 지점에서 별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숲이였어. 그렇다는건 B 지점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그 숲을 지나서 어디론가 향한거라 할 수 있지. "

  " 그렇다는건? "

  펼쳐져있던 지도를 반쯤 접어 로빈에게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우리가 사흘동안 이곳에 있던건 시간 낭비였어. 이미 그들은 이곳을 떠난지 오래니까. 적어도 그들은 최소 15일부터 최대 20일 이전에 이곳을 떠난게 분명해. "

  "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하는거죠? "

  로빈의 눈빛이 살짝 떨리기 시작한다. 나는 조용히 저 멀리 보이는 잿빛 산에 시선을 두고 잠자코 그들의 흔적을 느꼈다.

  " 이제부터 우리는 저 산으로 향한다. "

  " 엣?! "

  당황스러운 얼굴의 로빈에게 모포를 건네며 발걸음을 돌렸다. 로빈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우리의 목적지는 저기 보이는 잿빛 산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나 혼자서 정한 일이지만 내 직감으로는 저곳으로 그들은 향한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저 잿빛 산으로 향했는지에 대해 알 도리도 없을 뿐더러, 그들이 저 산으로 갔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저 산에 생존자가 있냐 없냐의 차이일 뿐. 그들을 찾기 전까진 잠시도 쉴 수 없다.

  " 루에르 씨, 잠깐만요! "

  재빨리 잿빛 산으로 걸어가던 나를 로빈이 불러 세운다.

  " 정말, 그곳에 사람들이 있을까요? "

  ' . '

  " 그게 무슨 말이야? "

  로빈의 말에 잠깐 당황한 나는 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로빈은 내 눈을 피하며 입술을 살짝 깨문다.

  " 로빈 … ? "

  " 아,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 제가 잠시 이상해졌나봐요. 어서 가요. "

  루에르는 싱긋 웃으며 나의 뒤를 따라온다. 이상하다. 평소의 로빈이 아닌 것 같았다. 평소의 로빈이라면 군말 없이 나를 따라왔을텐데, 왜 오늘은 내게 확신을 바라는 눈으로 쳐다본거지? 

  ' …. '

  모르겠다.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해봐도 내가 로빈이 아닌 이상 로빈의 마음을 알 수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로빈은 뭔가를 떠올리곤 두려움에 떠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 이외에 생존자를 발견할 수 없을거라는 두려움인가? 아니, 그정도로 로빈은 나약하지않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로빈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단 말인가? 대체, 저 산에 무엇이 있길래 로빈은 …. 

  " 저기, 로빈. "

  " 네? "

  " 나한테 무슨 할 말 없어? "

  " 할 말이라뇨? 하핫, 무슨 말씀이신지…. "

  로빈이 말 끝을 흐렸다.

  " 정말 … 나한테 뭔가 말하고 싶은게 없는거지? "

  " 그럼요. 그리고 고민이 있다면 제일 먼저 루에르 씨와 상의하는게 친구잖아요? "

  로빈이 평소 때와 같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역시, 나에 괜한 생각이였나? 하긴, 로빈이 내게 뭔가를 숨길리는 없지.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로빈이 …. 

  " …. "

  그 대화 이후로 로빈이 아무 말 없다. 평소에도 뭐 그렇게 말이 많은건 아니였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조용한건 처음이다. 아직 점심 때가 다가오려면 약 3시간 남짓 남은 것 같은데 …. 벌써 지친건가? 

  " 로빈, 오늘은 평소 때와 달리 많이 지쳐보이는데. 여기서 잠깐 쉬었다갈까? "

  잿빛 산으로 향하던 도중, 중간에 보이는 바위를 가리키며 로빈에게 물었다.

  " 응? 로빈? "

  내 물음에 아무 대답 없는 로빈에게 재차 물어보았지만 대답이 없는 로빈.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황급히 뒤를 돌아봤을 땐, 로빈은 없었다. 

  " 로빈? "

  방금까지 내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로빈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쓸쓸하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로빈의 모습이 다시금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 로빈!! "



    대체 어디로 가버린거냐 …. 잠깐 사이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다. 잿빛 산으로 향하던 도중, 사라져버린 로빈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잠깐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거냐.

  ' 정말, 그곳에 사람들이 있을까요? '

  로빈, 너는 그때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거였냐. 친구라면서, 나를 친구라고 생각했다면 그 고민을 나와 공유할 수는 없던거였냐? 분명 네 입으로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그런데 왜 ….

  ' …. '

  어느덧 해가 기울고 달의 모습이 나타난다. 벌써 밤이 되어가는 시간인데 아직까지도 로빈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싶어 우리가 묵었던 호수랑 숲을 찾아 달려가봤지만 역시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로빈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냔 말인가? 더군다나 로빈이 나에게 알리지않고 마음대로 움직인 적이 있었나? 지난 1년동안 무슨 일만 생기면 내게 말하고 알려주던 로빈인데, 왜 하필 오늘 로빈의 그런 모습만 보이냔 말이다. 

  " 하아. "

  로빈 … 너마저 내 곁을 떠나는거냐. 왜 너만 보면 그 녀석이 떠오르는거냐. 도대체 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기에 내게만 이런 시련을 주는거냔 말이다. 젠장, 로빈 ….


  " 어이, 루에르! "

  고요히 산길을 걷던 나를 불러세우는 미즈오. 나는 그런 미즈오를 본체 만체 앞으로 걸어갔다.

  " 야, 왜 사람 무시해? "

  내 어깨를 붙잡으며 미즈오가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나는 반쯤 흘러내리는 옷을 치켜세우며 미즈오의 옆을 지나쳤다.

  " 야!! "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무시하는 나에게 화가 났는지 미즈오가 나의 뒷통수를 후려갈기며 내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 너, 자꾸 이럴래? "

  " 뭐가. "

  " 너 진짜 계속 이럴꺼냐고!! "

  미즈오와의 대화가 귀찮아진 나는 또 다시 미즈오를 무시하며 미즈오의 옆을 지나갔다. 도를 넘어선 나의 행동에 미즈오는 화가 잔뜩 났는지 내게 뭔가를 던지며 내 앞으로 얼굴을 보였고, 나는 그런 미즈오를 아무 말 없이 쳐다봤다.

  " 사내자식이. 그깟 비밀 한번 말했다고 이렇게 째째하게 굴래? 너도 내 비밀 여기 저기에 퍼트리고 다녔잖아! "

  " 네 비밀과 내 비밀은 무게가 달라. 그깟 사소한 비밀은 내 비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

  " 뭐. 뭐라고?! "

  " 내가 너에게 내 비밀을 말한건, 내가 널 믿어서였어. 그런데 너는 내 믿음에 배신을 한거고. "

  " 그렇게 말하면 너도 내 비밀을 다른 애들한테 말했잖아! 나도 널 믿어서 너에게만 알려준거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 "

  미즈오가 말을 채 끝마치기 전에 제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하지만, 나는 그런 미즈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또 다시 산길을 올라갔다.

  " 이 나쁜 놈아!! "

  울먹거리던 미즈오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잠깐 움찔했지만, 아랑곳하지않고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에서 들리는 미즈오의 울음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지만 나는 그것을 뿌리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미즈오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난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학교에 나오지않은건 그 사람의 마음이고, 강압적으로 학교에 나올 권리는 없으니까. 더군다나 미즈오는 내게 실망을 줬으니까. 당분간은 나도 미즈오의 얼굴을 보고 싶지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 한달가량이 지난 후에야 미즈오가 학교에 나타났다. 아이들은 미즈오에게 달려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둥, 왜 학교에 나오지 않았느냐는 둥. 늘 똑같은 패턴의 질문에도 미즈오는 웃으며 대답한다.

  " . "

  순간 미즈오와 눈이 마주쳤지만, 미즈오는 재빨리 나와의 시선을 거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오랜시간이 지났고, 미즈오에 대한 악감정은 수그러들었지만. 그 날, 그 일이 있어서 그런지 미즈오에게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 덕분에서인지 내 일은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잠깐 미즈오 때문에 내 일의 차질이 생길 줄 알았지만, 미즈오의 영향은 그리 크지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미즈오가 돌아오고나서부터 반은 활기찼지만,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늘 다른 애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마다 미즈오가 와서 다른 애들과 함께 어울려 지낼 수 있게 해줬는데. 그런 미즈오와의 다툼으로 인해 난 다시 외톨이가 됬다. 뭐, 어색하진 않다. 늘 있던 일이니까 ….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우연히 산길에서 미즈오를 만났다. 미즈오는 나를 보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산길을 따라 올라갔고. 나 역시 그런 미즈오에게 말을 걸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며 산길을 올랐다. 산길은 꽤나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 … 미안해. "

  ' . '

  " 정말 미안해. 너한테 그렇게 큰 상처가 될 줄은 몰랐거든 …. 정작, 친구이면서 그런 것까지 감수하지 못한 내 잘못이 컸어. 미안해 …. "

  사과를 한건 뜻 밖에도 미즈오였다. 미즈오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내게 말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고, 미즈오는 눈물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 미즈오 …. "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미즈오를 품에 꼬옥 안아주었다. 그러자 미즈오는 지금까지 억누르던 슬픔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는지 눈물을 흘리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 미안해 … 미안해 … 정말 미안해 …. "

  미즈오는 내게 사과했다. 정작, 사과를 받아야하는건 미즈오 본인일텐데. 미즈오는 늘 그랬다.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는 꼭 자기가 먼저 양보를 하는. 자기가 아픈건 참으면서도 남이 아픈건 참을 수 없던. 그런 아이였다. 미즈오는. 

  ' …. '

  미안해. 내가 제일 먼저 너에게 사과를 했어야 하는데. 사과는 너가 아니라 내가 했어야 하는데. 왜, 미즈오 너가 나한테 사과를 하는거야 …. 품에 안겨 조용히 눈물을 삼키는 미즈오를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슬퍼서 흐르는 눈물은 아니였다. 미즈오를 의심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인해 흐르는 눈물이였다. 바보 같이 … 미즈오는 절대로 그런 아이가 아닌데, 미즈오는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아이가 아닌데 …. 미안해 미즈오, 너를 한순간 의심했어. 네 말대로 친구라면 서로의 비밀을 지켜줘야하는데. 나는 그런 미즈오의 믿음을 배신하고 말았어. 미안해, 미즈오. 정말 미안해 …. 


  미즈오와 헤어지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생각했다. 내일은 내가 먼저 사과하는거야. 지난 날, 미즈오에게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모두 사과하는거야. 언제까지나 미즈오가 내게 먼저 사과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잘못의 근원은 모두 나 때문인데 미즈오가 사과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잖아? 하는거야. 사과하는거야. 미즈오에게. 미즈오에게 사과하는거야. 
  
  ' . '

  미즈오에게 사과를 하려던 그 날. 세상은 사라졌다.

  
  가슴이 아려온다. 잊혀졌던 기억이 다시 머릿 속을 휘젓고 다닌다. 가슴이 답답하다. 꼭 사과하고 싶었는데, 정말로 사과하려고 했는데. 왜 바로 그 날 세상이 이렇게 변한거야 … 도대체 왜!!

  " 하 …. "

  그 누구에 탓도 하지말자. 이렇게 된건 다 나 때문이야.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 다만, 그 사실에 화가 나는 것뿐이라고. 내 잘못을 알고 사과하려해도 사과할 상대가 없어. 미안하다라는 이 말을 하고 싶은데 그 말을 들어줄 상대가 없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나를 혼자 남겨두진 말아줘. 부탁이야 … 미즈오. 

  " 루에르 씨? "

  ' . '

  로. 로빈?

  " 루에르 씨, 여기서 뭐하는시거에요? "

  " 로빈 … ? "

  나무기둥에 기대 자책에 빠진 내 앞에 로빈이 나타났다. 로빈은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다가왔다. 

  " 루에르 씨? "

  " 아아 …. "

  돌아온 로빈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순간 다리의 힘이 풀려 쓰러지려하자 로빈이 황급히 나를 부축한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본다.

  " 다행이야 …. 정말 … 다행이야. 다시 혼자가 되는 줄 알았는데 … 다시 외톨이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 "

  눈물이 흘러나왔다. 메마른 줄만 알았던 눈물이 새어나왔다. 로빈은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안아주었다. 일년 전, 내가 미즈오에게 했던 것처럼.



  로빈이 돌아왔다. 혼자 남겨질거라는 불안감에 휩싸인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믿겨지지않았다. 사라졌던 로빈이 다시 나타날 줄은, 그 뜻은 미즈오도 어디선가 나를 찾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준다. 더군다나 로빈이 돌아온 직후, 로빈이 내게 건네주는 종이를 받아든 나는 살짝 당황한 눈빛으로 로빈을 쳐다봤다. 

  " 이것은 대체. "

  로빈이 건네준 종이에는 사람이 쓴 글씨로 보이는 글자가 흐트러져 있었다. 뭔가에 놀라 급히 작성한 듯한 긴박함이 종이에서 느껴진다.

  " 로빈, 이걸 어디서 발견한거야? "

  종이의 출처를 묻자, 로빈은 우리가 있었던 호수 근처에서 주웠다고 했다. 그런데 왜 로빈은 잿빛 산으로 가던 와중 호수로 돌아간 이유가 뭘까? 이상함을 느낀 나는 로빈에게 호수로 간 이유를 묻자 로빈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였다. 나는 로빈의 말을 듣고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그게 정말이야? 우리가 묵었던 호수 근처에 건물이 있었다고? "

  " 네, 호수에서 좀 벗어난 곳에 위치한 건물이 있었어요. "

  " 그런데 그걸 나한테 알리지 않은 이유가 뭐야? "

  " 그건 …. "

  로빈이 머뭇거린다. 역시나 로빈의 행동이 평소 때와 너무 다르다. 오늘따라 뭐 그렇게 숨기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빈의 사색에 잠긴 얼굴을 보니 말문이 막힌다. 뭔가를 본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그 광경을 내게 알리지않은거지? 그곳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 로빈. "

  " 네? "

  " 고민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내게 다 털어놔. 로빈이 그랬잖아, 친구란 고민이 있으면 서로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라고. 그런데 로빈이 지금 내게 고민을 털어놓지않으면 로빈만 더 힘들어질 뿐이야. 고민이 있으면 내게 말해. 말 못할 고민이라도 말해. 그렇게 끙끙 앓아봤자 자신만 힘들 뿐이잖아. "

  " …. "

  로빈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로빈은 또 다시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는 듯 싶었다. 왜일까, 왜 오늘의 로빈은 이렇게나 생소한걸까. 평소의 로빈이라면, 절대 이런 모습을 내게 보일 리 없는데. 설령, 그렇다고해도 내게 뭔가를 숨기지않았는데. 도대체 왜 로빈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무척이나 걱정된다. 

  " … 그들이 와요. "

  " 뭐? "

  " 그들이 올거에요. 그들이 …. "

  로빈은 미처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쓰러지고 만다. 

  " 로빈! "

  과연 로빈은 내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그들이란건 뭐였을까? 이런 저런 의문을 남긴 채, 그 날 하루도 점차 깊어져만 간다.


  " 루에르 씨, 이만 일어나세요. "

  어느 세 잠에 든 나를 깨우는건 로빈이였다. 어젯밤, 알 수 없는 일들을 겪고 난 후라서 그런지 로빈의 얼굴은 평소보다 야위었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로빈은 그런 나에게 지도를 건넨다. 지도를 건네는 로빈을 나는 쓰윽 쳐다봤다.

  " 저기, 몸은 괜찮아? 어제 갑자기 쓰러졌잖아. "

  " 아, 그거라면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

  로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로빈은 평소의 컨디션을 찾은 것 같다.

  " 그럼 오늘 우리가 가야하는 곳은 어디지? "

  반쯤 접힌 지도를 펼치며 로빈에게 묻자, 로빈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콕하고 찍는다. 

  " 여긴. "

  로빈이 찍은 곳은 다름 아닌 E 지점에 위치한 잿빛 산. 나는 갑작스러운 로빈의 행동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잿빛 산에 가는걸 꺼려한 것 같았는데, 갑자기 잿빛 산이라니? 역시나 뭔가가 이상하다.

  " 왜 그러세요, 루에르 씨? "

  "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 …. "

  ' . '

  " 아, 저기 로빈. "

  " 네? "

  " 아, 그러니까 저 …. 갑자기 잿빛 산에 가려는 이유가 뭐야? 어제는 별로 가고 싶은 얼굴이 아니였는데. "

  나의 물음에 로빈은 미소를 지었다.

  " 루에르 씨가 가자고 했잖아요. 그곳에 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루에르 씨가 그러지 않았나요? 그래서 저는 루에르 씨를 믿고 가는 것뿐이에요. 다른 생각은 없어요. "

  루에르의 웃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날 믿는다는 로빈의 말에 용기를 얻은 나는 펼쳐진 지도를 반으로 접고 로빈에게 건네줬다. 

  " 자, 그럼 출발해볼까. 잿빛 산이 있는 E 지점으로. "

  로빈과 나는 그렇게 잿빛 산으로 향했다.

  
  " 젠장 …. 너희들은 대체 누구야! "

  인간의 손길이 닿은 작살에 다리를 관통 당한 나는 절룩거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내 뒤를 조심히 따라오던 로빈 역시 그놈들의 손에 잡혀 옴짝달싹도 못한 채 질질 끌려온다. 

  " 너희들은 누구냐? "

  그놈들 중 리더로 보이는 한 남자가 기나긴 창을 내 목에 겨누며 물었다.

  " 너희들이야 말로 대체 누구냐! 왜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하는거지? 대체 우리가 너희들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

  " 닥쳐! "

  순간 내 목을 뚫고 지나갈 기세로 다가오던 창이 목에 살짝 긁히자 피 한 방울이 창 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로빈은 이 모습을 보고 놀란 듯 발버둥을 치다 이내 움직임을 멈춘다.

  " 너희들이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우린 그저 이곳을 지나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까 로빈을 풀어줘! "

  나의 외침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그 무리들 중 한 덩치 큰 남자가 내쪽으로 다가오더니 나의 얼굴을 발로 찬다. 

  " 크헉. "

  반항도 제대로 못한 채, 그 남자의 공격을 그대로 맞고 있는 나를 보며 창을 들고있는 남자가 묻는다.

  " 너, 루에르 사람이냐? "

  " 뭐 … ? 루에르? 그거, 내 이름인데. "

  " 뭐라고?! "

  나의 말에 창을 든 남자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난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그 남자의 무리가 뭔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이 모습을 알 리 없는 나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네 이름이 루에르라고? "

  " 그렇다. 그런데 그게 왜? "

  " 젠장 …. 어이, 노로이. "

  " 응? "

  " 그 여자 풀어줘라. "

  " 아, 알았어. "

  창을 든 남자는 내 이름이 루에르란 말을 듣곤 인질로 삼고있던 로빈을 풀어줬다. 그들의 손에서 풀어난 로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다 바닥에 쓰러진 나를 보곤 서둘러 내게 달려왔다.

  " 루에르 씨, 괜찮으세요? 아, 어떡해. 다리가, 다리가. "

  작살로 인해 출혈이 심한 내 다리를 보며 로빈이 안절부절못하자 나 또한 불안에 휩싸인다.

  " 저리 비켜. "

  그러던 중, 창을 든 남자가 로빈을 밀치고 다리에 박힌 작살을 뽑는다. 

  " 크악. "

  " 조금만 참아. "

  작살이 뽑히자 방금보다 더 심하게 피가 솟구친다. 이 모습에 로빈은 몸을 떨며 나의 손을 잡아준다.

  " 노로이, 붕대 갖고 와. "

  " 어, 알았어. "

  창을 든 남자에게 붕대를 건네주는 노로이라는 남자는 슬쩍 나와 로빈을 보고 씨익 웃는다. 왠지 기분 나쁜 웃음이다. 

  " 붕대만 감고나면 괜찮아질거야. "

  창을 든 남자는 다리에 뭔가를 뿌리고 그 위에 붕대를 감는다. 제대로 지혈이 되지않은 터인지 붕대를 감자 붕대 위로 피가 스며 나온다.

  " 치료는 대충 끝났고, 피가 멎으려면 좀 있어야 될거다. 아니면 옆에 동료가 대신 지혈을 해주던가. "

  창을 든 남자는 로빈을 쳐다보며 말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로빈이 황급히 말리지만, 나는 그런 로빈을 보며 괜찮다며 미소를 짓자 로빈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부축한다.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창을 든 남자에게 다가가며 그에게 물었다.

  " 갑자기 나를 공격한 이유는 뭐지? 그리고 왜 도와준거지? "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 나는 그에게 물었고,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슬쩍 돌려 나를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 널 공격하게 된건 우리들의 착각이였다. 그러니까 책임을 물은 것뿐이다. 볼 일이 끝났으면 이만 가봐라. "

  " 루에르 사람이 뭐지? 왜 내 이름이 루에르란걸 알고 로빈을 풀어준거지? 대체, 너희들은 누구지? "

  나의 물음에 그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며 쓰윽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 알고싶나? "

  " 뭐? "

  " 알고 싶다면 가르쳐주지. 단, 그 이후에 생길 일에 대해선 일체 책임을 지지 않을거다. 그럼에도 알고 싶나? "

  그는 나를 시험이라도 하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다, 옆에서 나를 부축하고있는 로빈을 흘깃 쳐다봤다.

  " 그 정도의 용기가 없으면 썩 이곳에서 사라져. "

  " 아니, 하겠다. "

  " 뭐? "

  " 너희들이 우리를 공격한 이유를 알고 싶다. 그리고 왜 내 이름을 듣자마자 우리를 도와준 것에 대해 묻고 싶은게 있다. 우리에게 알려주겠나? "

  창을 든 남자는 당돌한 나의 행동에 잠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본다. 그의 모습에 로빈은 떨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런 로빈을 내쪽으로 잡아 당겼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시선만을 두고있던 남자는 피식 미소를 짓는다.

  " 너에 행동은 어리석지만, 너의 의지는 남들과 다르군. 좋다, 알려주도록 하지. 과연 너가 해낼 수 있을지 보겠다. "

  남자는 창을 거두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부축하라는 것과 로빈을 잘 데려오라는 말을 하곤 잿빛에 휘날리는 산길을 조용히 걸어간다. 잠시나마 다리를 압박하고 있었던 탓인지 아까보단 다리가 조금은 활발해진 느낌이다. 

  " 이봐, 너의 이름은 뭐지? 너는 내 이름을 알지만, 난 너의 이름을 모르잖아. "

  혼자 동 떨어져 걷던 남자를 향해 묻자,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한다.

  " 사로이. 내 이름은 사로이다. "



  사로이라는 남자가 속한 무리들과 함께 잿빛 산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 이름 그대로 회색 빛으로 물든 산길은 왠지 모르게 숨이 턱 막힌다. 지난 날, 미즈오와 걸었던 산길은 이렇게 괴롭진 않았는데 …. 

  ' …. '

  하아, 나란 놈은 이럴 때만 널 생각하는 녀석이구나. 평소에는 잘 생각도 하지않는 너였는데, 왜 이런 때만 네 생각이 그렇게 나는지 원 …. 너도 어디선가 나를 떠올리며 나를 찾고 있겠지? 아님,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하지만, 너 또한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듯 너 역시 날 떠올려줬으면 좋겠어. 언제나 너가 나한테 그래왔던 것처럼. 꼭, 날 잊지 않았으면 ….

  " 멈춰. "

  산길을 따라 묵묵히 걷던 우리 앞을 사로이가 막는다. 주위에 흩어져 걷던 사람들도 사로이의 말에 움직임을 멈추고 고요하게 그를 바라본다. 사로이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미동도 하지않았고, 나와 로빈은 그런 사로이의 모습에 약간 의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 너, 마지막으로 묻는다. 정말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겠지? "

  " 무슨 뜻이지? "

  " 이 앞을 지나가면 이젠 돌이킬 수 없다고 네게 경고하는거다. "

  사로이의 눈이 차갑게 변한다. 차갑고도 섬뜩한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그와의 시선을 맞추었다.

  " 후회 따위 없다. 다만, 진실만을 알고 싶을 뿐이다. "

  고요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나의 말에 사로이란 남자는 또 다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 말투는 건방지지만, 그 정도에 각오라면 더 이상 내가 막을 방도가 없지. 좋다, 입장을 허가하지. 노로이! "

  " 아, 알았어. "

  사로이는 또 다시 노로이를 불렀고, 노로이는 황급히 내 옆을 지나쳐 사로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뒤 이어 사로이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들기 시작한다. 그리곤, 노로이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이 입을 하나로 모아 뭔가 주술 같은 것을 읊어 내려간다. 

  ' …. '

  무슨 짓인진 모르겠지만, 하나 같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그 주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은 사로이란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들과 함께 뭔가를 중얼거린다. 

  " 대체, 저들은 뭘 하고 있는걸까요? "

  오죽 답답했으면 로빈이 내게 묻는다.
  
  " 그들의 전통이겠지.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어. "

  라고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저게 정말 그들의 전통인지. 아니면, 그저 우리를 데리고 장난을 하는지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분명, 사로이란 남자는 장난삼아 이런 짓을 하는거라 보진 않는다. 몇분 전만해도 내게 창을 겨누며 내 목숨을 위협하던 무리들 중 한명이였으니까.

  " 됬다. "

  한참동안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중, 땅바닥에 앉아있던 사로이가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로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남자들도 하나 둘 흩어지며 노로이 뒤로 물러난다. 그들만의 의식이 끝났다는 사실을 안 나는 로빈에게 부축을 받고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 이제 끝난거야?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고 …. "

  " 우리들의 성스러운 의식이다. 너희 같은 녀석들은 이해할 수 없지. "

  나의 말에 사로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내게 말하였고, 내 옆에 서있던 사람들 역시 껄끄러운 눈을 하며 나를 쳐다본다. 

  " 낯선 자여. 우리들의 성지에 온걸 환영한다. "


   이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에 나와 로빈은 발을 디뎠다. 그곳에는 지금껏 우리가 보지 못한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있었고, 평범한 산이라고 볼 수 없는 진귀한 모습들이 우리 눈 앞에 펼쳐졌다. 일명, 전사들의 후예라고 불리는 마키 족은 오랫동안 이 산에서 머물렀다고 했다. 나와 로빈은 그들에게 일년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지만 그들은 잘 모른다고 하였다. 다만, 그 일이 발생한 직후. 푸른색 원기둥이 하늘에서 대지로 사라진 것 밖에는.

  " 푸른색 원기둥이라 …. 다행히 핵은 아니였단 말이군. "

  " 핵이였다면 우리들은 물론이고 이곳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했을거에요. 그런데 왜 하필 사건이 발생한 지점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우리들만 살아남았을까요? "

  " 나 역시 그 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왜 하필 우리만 살아남았으며, 도대체 그 원기둥의 정체가 뭔지에 대해서 말이야. "

  나와 로빈은 생각에 잠겼다. 마키 족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가 살던 세계는 푸른색 원기둥과 함께 소멸했고, 그 중 나와 로빈만 살아남았다는 것. 핵의 소행으로 보이나, 마키 족이 살아남은걸 보면 단순히 핵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그 푸른색 원기둥은 뭐였지? 왜 평범하던 세상에 그토록 무서운 녀석이 하늘에서 떨어진거냐고. 아니지, 그것보다 미즈오의 행방이 더 궁금하다. 미즈오는 그 푸른색 원기둥 사이에서 다행히 살아남았을까? 아니면, 세상과 함께 같이 사라져버린걸까? 하지만 ….

  " 루에르 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보여요. "

  옆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로빈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 아니, 괜찮아. 잠시 다른 생각 좀 했을 뿐이야. "

  " 정말이에요? 또 뭔가를 제게 숨기시는건 아니겠죠? "

  " 정말이야. 잠깐 다른 생각을 한 것뿐이니까 걱정하지마. "

  나는 미소를 지으며 로빈을 안심시켰고, 로빈은 조금 미심쩍은 얼굴을 하며 자리에 앉는다.

  " 루에르, 족장 님이 찾는다. "

  모닥불 주위에 앉아있던 나를 덩치 큰 남자가 톡톡 어깨를 치며 부른다. 로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런 로빈에게 아무 일도 없을거란 말을 남기고 덩치 큰 남자의 뒤를 따라 어디론가 걸어갔다.

  " 족장 님, 루에르를 데려왔습니다. "

  덩치 큰 남자를 따라 걸어온 곳은 마을에서 조금 먼 곳에 위치한 작은 나무 아래였다. 그 나무 안에는 영롱한 빛을 뿜는 돌에 손을 올려놓은 사로이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앞으로 오거라. "

  사뭇 다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위축된다. 역시 한 마을의 족장이라서 그런지 무게 잡힌 모습의 사로이. 덩치 큰 남자는 사로이에게 꾸벅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리를 비켜준다. 나무 아래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사로이를 나 역시 눈만 껌뻑거리며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 날 부른 이유가 뭐지? "

  무거운 침묵을 깨트린 나는 사로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로이는 빛을 내는 돌을 한번 쓰다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기둥 안에서 허리를 숙여 밖으로 나온다. 그리곤 옆에 놓여진 창을 뽑아 들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 뭐하자는거지? 혹시 나랑 싸우기 위해 부른거냐? "

  그의 행동에 살짝 긴장을 한 나는 황급히 주위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그에게 겨누었다. 그는 나의 행동을 보곤 어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한다.

  " 멍청한건지.아님, 용기가 있는건지 모르겠군. "

  " 뭐? "

  그의 말에 의문을 가진 나는 조용히 그의 행동을 바라봤고, 경계태세를 늦추지않는 나를 보며 그는 한손에 들고있던 창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슬쩍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의 행동을 보곤 저 남자가 나를 공격할 위인은 아니라 파악하고 나 역시 나뭇가지를 옆으로 던지며 그를 쳐다봤다. 그는 내가 나뭇가지를 던진걸 보곤 서로 대화를 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내게 말한다.. 

  " 너에게 약속한게 하나 있지,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너 역시 내게 약속했다. 후회하지않겠다고. 그런데 지금도 후회하지않을 자신있나? "

  사로이는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 말했잖아, 후회는 없다고. 나는 오직 진실만을 알고 싶을 뿐이라고. 말이 더 필요하겠어? "

  " 좋다. 너의 그 기세를 높이 사 너에게 진실만을 알려줄 것을 약속한다. "

  사로이는 나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걸 확인하고 나를 나무기둥이 있는 곳으로 부른다. 

  " 이건 뭐지? "

  사로이가 앉아있던 곳 옆에 덩그러니 남겨져있는 돌을 보며 물었다.

  "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이게 있어서 우리들은 단 한차례도 마을 내 분열이 일어난 적이 없으며, 다른 부족과의 전투에도 끝까지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게 바로 너에게 진실을 알려줄 것이다. "

  사로이는 내게 말하였고, 나는 그런 사로이의 말에 조심스럽게 돌을 바라보았다. 돌은 방금 전보다 더욱 광채나는 빛을 뿜으며 나와 사로이를 밝혔고, 이내 알 수 없는 빛에 휩싸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일어나라, 낯선 이여. "

  무의식 중에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의 정신을 흔든다.

  ' . '

  앞이 보이지않는 시야가 점점 밝아오며 나를 밝힌다. 내 눈 앞엔 사로이가 서있었고, 땅바닥에 쓰러진 나는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여긴 어디지? "

  땅 위에 굳게 서있는 사로이는 나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 일년 전, 세상이 멸망하기 10분 전의 세상이다. "



    "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일년 전의 세상이라고? "

  믿겨지지않는 표정으로 말하는 나를 보며 사로이는 아무 말 없이 어느 한 곳을 중점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세상이 멸망하기 10분 전의 세상? 그게 가능한 일인가? 분명, 주위는 아까 전과는 달리 많이 변했지만, 그런 일이 존재할 수 있는건가? 단지, 하나의 돌덩어리로 인해 과거로 돌아왔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한번에 정리해주는 무언가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 … 여긴. "

  사로이와 내가 서있는 곳은 다름 아닌 일년 전 내가 지냈던 방이였고, 내 눈 앞에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황당하면서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나는 사로이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고 묻지만 사로이는 아무 말 없이 창문 밖의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수많은 빌딩과 건물을 바라보던 사로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돌아본다.

  " 시작됬다. "

  사로이가 바라봤던 창문 밖의 세상은 아주 고요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허함과 더불어 찾아오는 적막이 나의 심장소리를 더욱 크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 . '

  하늘에서 커다란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키 족의 말대로 푸른색 원기둥으로 추정되는 하나의 에너지가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를 향해 흡수된다. 

  " 사로이, 이게 대체. "

  푸른색 원기둥은 하나의 구를 형성하여 주위에 하나씩 분포되기 시작한다. 그리곤 빠른 속도로 도시를 집어 삼키며 도시를 파괴해 나간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와 사로이는 멍하니 이 상황을 잠자코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채 1분이란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세상은 나를 남겨두고 소멸했다. 무지막지하게 도시를 파괴한 에너지 덩어리들은 하나 둘 다시 융합을 하더니 천천히 하늘로 모습을 감춘다. 그것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커다랗고 견고했던 도시가 한순간에 알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사라졌다. 그에 맞게 이 도시에 붐볐던 사람들 역시도. 오직, 나 하나만 남겨두고 사라진 도시가 나를 외톨이로 만든 것처럼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 사실도 알지 못하는 잠자는 나는 평온한 얼굴로 서서히 내 눈 앞에서 사라진다.


  " 과거를 돌이켜본 소감은 어떻지? 후회스러운가? 아님, 네 말대로 진실을 알고나니 마음이 후련한건가? "

  눈을 뜨니 나와 사로이는 나무기둥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사로이는 나무기둥 안에 앉아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네 기분은 어떻지? "

  " 후회스럽진 않다. 내가 몰랐던 그 날의 일을 알게 되었으니까. "

  " 그렇다면 진실을 알게 되어서 좋겠군. "

  " 아니, 그렇지않아. 진실을 알고나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른다. "

  " 왜지? 그토록 네가 알고싶던 진실을 알려준건데. "

  " 내가 본 그것은 소리 없는 살육이다. 아무 이유 없이 눈 앞에서 모든걸 앗아간 그놈들에 대해서 화가 날뿐이다. "

  " 그렇다면 후회하는가? "

  " 그런 진실이였다면 처음부터 볼 생각은 없었다.

  사로이는 나의 말에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와 시선을 맞춘다. 그리곤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기둥 밖으로 몸을 들어낸다.  

  " 역시 후회하는건가? 분명 네 말대로라면 너는 지금쯤 진실을 알게되어 기뻐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울상을 짓고 있지?"

  " 네 녀석이라면 아무 이유 없이 살해 당한 동료의 죽음을 기뻐할 수 있냐!! "

  " 그래서 말했지 않은가, 후회할거면 그만두라고. 결국엔 이 일도 네가 자초한거지 누구도 네게 강요하지않았으니. "

  " 그래서 뭐 어쩌자는거지? "

  " 나와의 약속을 깨트린 벌을 주겠다는 말이다. "

  " 뭐? "

  ' 끼야야약 - !! '

  어디선가 로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로이는 씨익 웃으며 옆에 내동댕이 쳐진 창을 집어들곤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온다.

  "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로빈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

  " 내가 말했잖아. 진실을 알려주는 대신, 그 이후에 있을 일에 대해선 일체 책임을 묻지 않기로. "

  " 너, 설마!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로빈의 비명소리와, 앞에서 서서히 내 목숨을 위협하는 사로이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이성이 끊어졌다.

  " 덤비는건가? 무기도 없는 한낱 조무래기 주제에. "

  사로이를 향해 달려가는 나는 무턱대고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지만, 사로이는 내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들고있던 창으로 나의 배를 노린다.

  " 죽어라! "

  
  … 여기가 어디지? 방금 전까지 나는 사로이와 결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 주위가 온통 컴컴해. 혹시 사로이의 창에 찔려 죽은건가? 젠장 …. 로빈도 구하지 못하고 내 멋대로 죽어버리다니. 이런 비참한 결과를 얻을 바에 처음부터 그 녀석들에게 흡수 당했으면 좀 좋았을까. 어처피 죽으면 그게 그건데 왜 나는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걸까 ….

  ' . '

  미안해, 미즈오. 결국 너와의 약속은 못 지켰구나. 널 꼭 찾는다고 다짐했는데. 그 전에 내가 죽어버렸으니. 나는 이번에도 너에게 큰 상처만을 남겨두고 가는걸까? 제대로 네게 사과도 못했는데 …. 그 전에 너는 살아있는거지? 너는 살아있는거지? 내가 살아남았던 것처럼 너 역시 살아남은거지? 다만, 우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라져서 만나지 못하는 것뿐이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만약, 내가 저승에 갔는데 너가 있으면 난 널 용서하지 못할거야. 부디 너만은 살아남아야 해. 누가 뭐라해도 넌 내 소중한 친구니까. 나한테는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니까. 그니까, 꼭 살아있어야 해. 꼭 ….


  " … 너는, 대체 누구지? "

  흐릿하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 도대체, 너는 누구길래. 마키 족의 족장인 나 사로이를 이렇게 곤경에 처하게 만들 수 있는거지? "

  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땐, 자기 창에 가슴을 관통 당한 사로이가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얼굴로 사로이에게 다가갔고, 그런 나를 사로이가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너, 어떻게 된거야? 왜 이런 모습으로 …. "

  내 말에 사로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내게 말한다.

  " 자신이 했음에도 누가 했는지 묻다니 …. 너, 정신이 이상한거 아닌가? "

  ' ! '

  " 갑자기 달려들길래 맛이 나간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 일 줄은 …. 하지만, 나를 이겼다고 안심하지마라. 이미 너의 동료는 우리 동포에게 맛있게 요리 됬을테니까. 그 모습을 평생토록 기억하거라. "

  사로이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서둘러 로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젠장,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사로이는 지 창에 찔려 쓰러져 있다니. 내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거야?!

  "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

  혼란에 휩싸여 달리던 도중. 저 멀리 로빈으로 추정되는 한 여자가 그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이 포착된다.

  " 그만두지 못해!! "



    그놈들의 손에서 로빈을 빼앗은 나는 서둘러 로빈을 데리고 마을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우리의 뒤를 쫓아왔고, 한참을 산 주위를 헤매던 우리들은 그들이 우리를 쫓아오지 않음을 확인하고 한쪽 바위 아래서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았다. 

  " 괜찮아? "

  로빈을 바라보며 나는 물었고, 로빈은 괜찮다며 방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다행히 그들이 로빈에게 손을 대기 이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하필 나도 아닌 로빈을 공격하려고 했던걸까? 그들에게 손을 먼저 내민건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빈을 노린 이유는 대체 ….

  " 저, 루에르 씨. "

  " 응? "

  " 루에르 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 "

  로빈은 사뭇 다른 얼굴로 내게 말하였다.

  " 무슨 할 말? "

  " 사로이란 남자와 무슨 일이 있던거죠? 왜,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거냐고요. "

  사로이와 단 둘이 남은걸 로빈이 본건가? 하지만 어떡해? 

  " 분명, 루에르 씨에겐 바보 같이 들릴지 몰라도. 루에르 씨와 그 남자는 돌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그것도 한순간에 말이에요. 도대체 그 안에서 루에르 씨는 뭘 본거죠? "

  로빈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내게 물었고, 나는 로빈의 모습에 잠시 아무 말 없이 로빈을 쳐다봤다. 역시나 나와 사로이는 그 돌 속으로 빨려 들어간거였군. 사로이 말대로 그 돌은 그 부족의 수호신 격이였단건가.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는 능력까지 있다니 …. 대체 그 부족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갑자기 사로이가 나를 향해 공격을 한 것 역시 궁금하다. 단지, 약속을 어긴 것 때문에 그런게 아닌. 뭔가로 인해 나를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눈이였다. 대체, 그들은 누구였을까?

  " 루에르 씨? "

  " 아, 잠시 딴 생각을 좀 했어. "

  " 제 말은 들으셨어요? "

  " 응, 들었어. 네 말대로 사로이와 나는 그 돌 속에 들어 갔었어. "

  " 그럼 그 안에서 뭘 보았죠? "

  " 그건 …. "

  로빈에게 그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을 꺼내기가 참으로 껄끄럽다. 그들의 말대로 푸른색 원기둥이 우리가 살던 도시에 떨어졌고, 그 원기둥에서 하나씩 떠오르는 구 모형의 형태를 가진 에너지들이 도시의 이곳 저곳을 집어 삼켰다는 말을 로빈은 믿어줄까? 더군다나, 그것으로 인해 도시가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로빈은 이해할 수 있을까? 로빈 역시 나와 똑같은 반응을 보일거라 예상한다. 로빈도 나와 같이 평범한 이유가 아닌 뭔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멸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본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참혹한 현장이였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아무런 악도 품지않은 채. 단지, 재미삼아 개미를 죽이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들은 단지 개미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솟는다. 

  " 루에르 씨! "

  " … 세상이 멸망하기 이전의 세상을 보고 왔어. "

  " 네? "

  " 우리가 살던 도시가 그것들로 인해 소멸된 모습을 보고 왔어. "

  " 루에르 씨, 그게 무슨 …. "

  " 우리는 단지 그것들에 심심풀이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거야.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못해본 채로 말이야. "

  나는 가까스로 로빈에게 진실을 털어놓았고, 로빈은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역시 로빈도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던거야. 아주 지극히 평범한 일이면서도 복잡한 그런 일에 겪었으면 했던거야.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상황에 우리들은 1년동안 무슨 짓을 하며 돌아다닌걸까? 단지, 생존자를 찾기 위해? 아니면 이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 하지만, 이미 사건은 끝났어. 우리는 그저 눈 앞에서 사라진 것뿐이라고. 생존자 또한 있을지 없을지 몰라. 하물려 생존자는 로빈과 나, 그리고 이 산에 사는 마키 족뿐. 이미 이 세상은 사라진거야.

  " …. "

  한동안 로빈은 아무 말도 없었다. 고요하게 흘러만 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 우리들은 흘러가는 시간만큼 아주 별 볼 일 없이 지나가고 있다. 

  " 저, 루에르 씨. "

  오랜시간 끝에 정적을 깬건 로빈. 로빈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지 슬쩍 나를 쳐다본다.

  " 이제 우린 어떻게하면 좋을까요? "

  로빈은 힘 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나 역시 로빈의 말대로 뭘 어떻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생존자를 찾겠다던 희망과 이 사건의 진위를 밝히겠다는 의지가 모조리 사라진 듯, 내 마음 속 한 구석에 차디찬 공허만이 감돌았다. 

  " 노로이란 남자가 그랬어요. 이 세상은 이 산과 주변에 나무들을 제외하곤 모두 사라져버렸다고요. 이제 남은건 우리 두 사람과 마키 족뿐이라고요. "

  ' …. '

  " 정말로 이 세계는 이제 끝인걸까요? 이제 희망은 없는건가요? "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로빈이 물었다. 나는 그런 로빈의 물음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이럴거면 그때 우리들도 데려가지. 왜 우리들만 …. "

  눈물을 참지 못한 로빈이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곤 말을 멈춘다. 로빈의 흐느낌에 나 역시 슬픔이란 단어가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온다. 

  " 여기에 있던건가? 한참을 찾아 헤맸다. "

  바위 위로 드리워지는 검은 그림자에 로빈과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 네 녀석이 여길 어떡해 …. "

  사로이와 같은 무리에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나와 로빈을 훑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 족장 님이 부르신다. 너와 그 여자를 모셔오라는 말씀이다. "

  ' ! '

  그 남자는, 사로이는 죽지 않았던건가? 

  " 뭐하나? 따라오지않고. "

  덩치 큰 남자는 싸늘한 눈으로 우릴 쳐다보며 말했고, 로빈과 나는 조용히 그 남자의 뒤를 따라 방금 전 우리가 도망쳤던 마을로 다시 되돌아갔다. 

  ' …. '

  다행이다. 사로이가 죽지 않아서.

  
  " 족장 님, 루에르란 남자와 그의 동료를 데리고 왔습니다. "

  다시 되돌아간 마을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왼쪽 가슴에 붕대를 감은 사로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덩치 큰 남자는 사로이에게 다가가 뭔가를 속닥거렸고, 사로이는 뭔가를 들었는지 섬뜩한 눈빛을 하며 나를 쳐다본다. 사로이는 한참을 나와 로빈에게 시선을 고정시켰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 역시 나와 로빈을 번갈라 쳐다보며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시켰다. 한동안 지속됬던 그들의 행동이 점점 나와 로빈에게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조성하였고, 한참 후에야 사로이는 창을 뽑아들고 내 쪽으로 다가온다.

  " 아까 당한걸 보복 하려는건가? "

  " 아니, 운으로 이겼다해도 패배는 패배다. 그 사실은 달라지지않아. "

  " 그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

  " 널, 시험하려는거다. "

  " 뭐?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

  사로이는 내 눈 앞까지 걸어왔고, 그 모습에 로빈은 자그마한 공포를 느꼈는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사로이는 내 눈을 쳐다보며 자기 손에 들려있는 창을 내게 건네준다.

  " 뭘 하려는거지? "

  사로이의 창을 건네받은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며 사로이를 쳐다봤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기분 나쁜 미소를 띠며 나와 사로이를 에워싼다.

  " 시험은 간단하다. 잿빛 산 정상에 위치한 전사들의 영혼을 가지고 돌아오면 된다. "

  전사들의 … 영혼?

  " 만약에 너가 해가 질 때까지 전사들의 영혼을 가지고 오지않으면. "

  ' . '

  " 여자는 죽게된다. "



    사로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 밖의 말이였다. 그의 말을 들은 나와 로빈은 할 말을 잊은 채 그의 얼굴을 쳐다봤고, 우리를 에워싼 무리들은 킥킥거리며 우리를 비웃는다. 사로이는 아무 대답 없는 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본다.

  " 자신의 동료를 지킬만큼에 용기는 없던건가? 역시, 내가 잘못본거군. "

  사로이는 마치 나를 무시하는 듯한 말을 남기고 홀연히 어디론가 걸어간다.

  " 이봐. "

  사로이가 모습을 감춘 후, 주위에서 우리를 노려보고있던 무리들 중 한명이 내 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곤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한다.

  " 네 녀석이 우리 족장 님은 이긴 녀석이냐? 그렇다면 그에 맞는 댓가를 치뤄야지. "

  " 그게 무슨 말이지? "

  영문을 모르는 그에 말에 나는 약간 인상을 찡그리며 그에게 물었고, 그는 나의 물음에 약간 실망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 처음부터 그럴 자신이 없으면 이곳에 오질 말던가. 뭔 놈의 자신감이 그렇게 넘쳐서 이런 상황도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지? 넌, 입만 나불거릴 줄 아는 녀석이였냐? "

  그가 나를 비웃으며 말한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입술을 움찔거리며 억지로 웃음을 참는다.

  " 그래서 말했잖아. 뒷감당을 할 수 없다면 오지 말라고,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여기까지 온거냐? 아닐텐데, 네가 그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라고 생각하진 않거든. 어느정도 네 녀석이 머리가 제대로 박힌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혹시, 설마가 진짜 그 설마는 아니겠지? "

  " 야야, 슈야. 그만 놀려. 정의감에 불타는 한 남자가 울라. "
  
  역겹다. 나를 향해 비웃는 그들의 얼굴엔 더러움만이 가득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는데도 내 몸은 가만히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 왜지? 왜 아까와는 달리 몸이 제대로 반응하지않는걸까. 지금이라도 내 왼손에 들려있는 창으로 저 녀석들의 목을 꿰뚫고 지나가면 될텐데. 왜 나는 그들을 공격하지않는거지? 아니, 처음부터 내가 이런 곳에서 시간낭비하는 것부터 이상하다. 로빈과 나는 처음부터 이 산에 생존자가 있을 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이 산을 올랐고, 산길을 올라가다 우연히 이 무리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을 아무 이유 없이 공격했고, 그들과의 대화 중 특정한 말로 인해 이 마을까지 온 걸로 기억된다.

  ' . '

  “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네 이름이 루에르라고? ”

  분명, 사로이는 그렇게 말을 했다. 왜 평범한 내 이름을 듣고 그렇게 놀란 이유가 뭐지? 그리고 그 이후에 노로이라는 남자에게 로빈을 풀어달라는 명령을 하니 노로이란 남자는 순순히 로빈을 풀어줬다. 아니, 그전에.

  “ 너, 루에르 사람이냐? ”

  라는 말을 했다.

  ' …. '

  대체 그들은 우리를 왜 공격했으며, 내 이름이 루에르란 이름을 알고나서 공격을 멈춘 이유는 무엇이며. 최종적인 결과로 왜 그들이 우리에게 루에르 사람이냐고 물어본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루에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나서 우리를 자신들의 성지로 데려간 이유는 뭐였을까? 단지, 침입자가 아니라서 그런 행동을 보인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수상한 점은 내 이름이 루에르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 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

  " 우리한테 너무 놀림 당해서 기가 죽은 모양인데? "

  그들이 웃으며 내게 말한다. 

  " 시험이라고 … ? "

  잠자코 로빈의 옆에서 묵묵히 서있던 나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뭐. 뭐야? "

  지금까지 가만히 그들의 웃음소리에 파묻혀있던 내가 그들 쪽으로 다가가자 그들은 당황한 듯 혼란스러운 눈빛들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방금 전까지 나를 무시하던 남자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멈췄고, 그 남자는 미동조차 없는 나의 눈동자에 살짝 겁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 그게 이 마을의 전통이라면 따라주지. 하지만, 그저 나를 데리고 놀려는 작정이면 너희들은 다 죽을 줄 알아. "

  " 뭐라고?! "

  " 우리의 전통이라면 이 시험을 응하겠다는 말로 들어도 되는건가? "

  무리들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사로이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 물론, 전통이라면 나는 따를 생각이다. 그게 이 마을에 규율이라면. "

  나는 사로이를 쳐다보며 말했고, 그런 나의 모습에 사로이는 아무 말 없이 내게 시선을 고정한다.

  " 내가 너희들이 말하는 전사들의 영혼을 네게 갖다주면 로빈을 살려준다는 말은 진실인가? "

  나는 한치의 떨림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와의 약속은 지키겠다는 다짐을 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사로이를 보며 다시금 비장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그렇다면 너도 내게 한가지 약속을 해라. "

  " 그게 무슨 말이지? "

  " 내가 전사들의 영혼을 가지고 오면 로빈을 살려준다는 약속 외에 한가지 더 약속을 하란 말이다. "

  " 무슨 약속이지? "

  " 루에르 마을에 있었던 일을 나와 로빈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

  사로이는 의외에 말을 내뱉자 살짝 눈동자가 떨리는걸 확인했다. 주위에서 나와 사로이의 대화를 듣고있던 사람들도 내가 한 말을 듣자 상당히 흥분을 한 듯, 사로이에게 저딴 녀석의 말은 듣지말라며 사로이를 급구 만류한다. 

  " 약속해라. 내가 전사들의 영혼을 가지고 오는 대신 너는 내게 루에르 마을에 있었던 일을 내게 말하겠다고. "

  " …. "

  " 약속해라! 내가 전사들의 영혼을 가지고 돌아오면 내게 그 사실을 알려주겠다고! "

  내 목소리가 잿빛 산을 가득 메우자, 어느덧 마을 안은 정적이 흘렀다.

  " …. "

  " 사로이!! "

  " 알았다. "

  " 족장 님!!! "

  사로이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내게 약속을 다짐했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로이에게 달려가 그 말을 취소하라며 그에게 매달렸지만. 이미, 사로이는 마음을 굳게 닫은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 설마, 마키 족의 족장이신 사로이가 말을 바꾸거나 그렇진 않겠지? "

  " 약속한다. 너가 해가 지기 전까지 전사들의 영혼을 가지고 돌아오면 그 여자의 목숨은 물론이고, 너가 궁금해하는 루에르 마을에 대해서도 말해주겠다고 마키 족의 족장인 이 사로이가 약속한다. "

  사로이는 오른 손으로 자신의 가슴은 두 번 두들기며 내게 말한다. 나는 그런 사로이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 루에르 …. "

  " 걱정하지마, 곧 돌아올테니까. "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로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로빈은 나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떨군다.

  " 그럼, 갖다올게. "

  " 부디 조심히 다녀오세요. "

  로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약속 시간은 해가 지기 전까지다. 만약, 네가 해가 지기 전까지 이곳에 돌아오지않는다면 이 여자의 목숨은 없다. "

  한쪽에서 나를 지켜보던 사로이는 마지막으로 내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나는 그런 사로이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마을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사로이가 말한 전사들의 영혼이라는게, 바로 이런 거였나? "

  잿빛 산. 그리고 정상 위에 위치한 어느 한 작은 동굴 안에는 하나의 조각이 동굴을 비추고 있었다. 흡사, 사로이가 가지고 있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돌멩이처럼 말이다. 사로이의 말투로 봤을 땐 꽤나 고단한 산행길이 될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올라가니까 정상까지 쭉 이어진 산길에 나도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사로이는 처음부터 로빈을 살려줄 의향이 있었던걸까? 아니면, 정말로 무언가가 내 앞에 들이 닥치는게 아닐지라는 생각이 교차하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사로이가 말한 전사들의 영혼이라는게 바로 저 조각이 맞는걸까? 단지, 이 동굴을 비추고있는 하나의 촛불 역할이 아닐까? 그러나, 이 동굴은 조각이 놓여진 곳에서 길이 막혀있다. 그 말은 저 조각이 전사들의 영혼이 맞다는 말이 된다. 정상에도 다른 길은 커녕, 이 동굴로 이어지는 길 밖에 없었으니.

  ' …. '

  조금 머뭇거리는 내 손이 부들 부들 떨린다. 아직 해는 저 멀리 지평선에 닿을락 말락하는 거리에서 나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고, 나의 의심스러운 눈동자는 주위를 샅샅이 훑어봐도 그 해답은 나오질 않는다. 결국엔 이 조각이 사로이가 말한 전사들의 영혼이란건가?

  " 후우. "

  좋다. 이것이 정말로 전사들의 영혼이라면 로빈은 물론이며 루에르 마을에 대한 것을 알 수 있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조각이 떨어진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혹시나 섣불리 앞으로 걸어가면 무슨 함정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발목을 잡으며 나의 거동을 불편하게 만든다. 조각과의 거리는 약 10m도 채 되지않는 짧은 거리임에도 나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 없다.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로빈의 목숨이 위태롭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서서히 조각 쪽으로 손을 들이 밀었다. 설령, 뭔가로 인해 내 손목이 잘려나가도 내가 모르는 진실을 하나라도 더 알 수 있다면 손목 따위. 아니, 내 목이라도 주겠다.

  ' . '

  차가우면서도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느껴지는 조각에 손이 닿았다. 나는 지금까지 꾹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다행히 다른 트랩 같은건 없었고, 단지 나의 신경과민에 인한 스트레스만 쌓였을 뿐이다. 조각을 집어든 나는 서둘러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 이제야 손에 넣은건가? 꽤나 오랫동안 뜸을 들이더군. "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무언가가 내 앞길을 막아서며 내게 말하였다. 나 이외에 누군가에 등장에 깜짝 놀란 나는 천천히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 사로이 … ? "

  그는 다름 아닌 사로이였고, 그 옆에는 로빈이 사로이 옆에 가까이 붙어 서있었다.

  " 루에르 씨! "

  로빈은 내 쪽으로 달려왔고, 내 품에 안기며 기쁜 듯 소리치며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흐느낀다.

  " 어떻게 된거지? 왜 여기에 로빈이 있는거야? "

  이 상황이 도통 이해가 안가던 나는 사로이에게 물었지만, 사로이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들고있는 조각을 건네받곤 빛에 인해 반짝거리는 조각을 동굴 속 깊은 곳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그리곤 방금 전 조각이 놓여져있던 제단 위에 조각을 다시 올려놓으며 이내 그 앞에 가부좌를 틀며 자리에 앉는다. 나는 그 모습에 의아한 표정으로 로빈과 함께 사로이가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사로이는 조각 앞에 가부좌를 틀고 주문을 외우는 듯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 … … … ‥. "

  우리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뭔가를 중얼거리던 사로이는 지그시 감은 눈을 조용히 뜨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등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와 로빈은 연신 쳐다보던 사로이는 이내 우리에게 입을 연다.

  " 약속대로 해가 지기 전에 전사들의 영혼을 가져왔으니 여자의 목숨은 이제 네 것이다. "

  사로이는 내게 말하였고, 그 말에 나는 사로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첫번째 약속은 지켰다. 그리고 너는 내게 두번째 약속을 했지. 루에르 마을에 있었던 일을 알려달라고. 허나, 미안하게도 네게 거짓말을 한게 하나 있다. "

  사로이는 고개를 돌려 조각이 있는 곳으로 다시 걸어갔고. 제단 위에 가만히 놓여졌던 조각이 사로이가 다가가자 갑자기 알 수 없는 빛을 내며 동굴 안을 환히 비춘다. 이 모습에 로빈과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사로이를 쳐다봤고, 사로이는 우리들을 슬쩍 쳐다보며 말한다.

  " 내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네게 약속했다.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그리고 나는 너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대신, 그 이외에 일어나는 일엔 일체 참견하지않는다고 말했고, 너는 그 대답에 응했다. 그 결과 너는 나와 함께 1년 전, 이 세상이 멸망하기 이전에 세상에서 이 도시의 종말을 보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너는 약간의 망설임을 제외하곤 아주 훌륭하게 일을 책임졌다. 그러므로 너는 나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 되는거지. "

  사로이는 나를 향해 흔들림 없이 말을 전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사로이를 흘깃 쳐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도대체 너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길래 그런 말들을 하면서까지 이곳에 우릴 붙잡아두는거냔 말이다. "

  나의 짜증 섞인 말투에 사로이는 묵묵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밝고 영롱한 빛을 내며 포근함이 느껴지는 조각을 손으로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더니 이내 내게 말한다.

  " 세상이 멸망하기 이전. 내가 너에게 보여줬던 과거는 거짓이다. "

  ' ! '

  " 하지만, 이번에 너에게 보여줄 것은 한치의 거짓도 포함 안된. 그 날의 진짜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

  사로이의 말이 끝나자, 사로이의 손바닥 위에 가만히 놓여있던 조각에서 믿겨지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기운이 동굴 곳곳에 발산되었다. 

  " 루. 루에르 씨!! "

  로빈의 목소리가 서서히 내 귀에서 멀어져만 간다.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멀어지는 동굴 안의 기억이 조금씩 의식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세상이 멸망한 후, 남겨진건 우리들만이 아닌 마키 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상이 사라진 직후에 벌어진 일들은 마치 한장의 그림이 되듯, 우리들 마음 속에서 조금씩 더러워져만 간다. 사로이의 제안대로 동굴 속에 위치한 전사들의 영혼을 손에 넣은 나는 동굴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로이에게 조각을 건네주었고, 내 조각을 건네받은 사로이는 조각이 놓여졌던 제단 쪽으로 걸어가 뭔가에 대한 주문을 외우며 나와 로빈 쪽으로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빛이 나와 로빈을 향해 치솟았고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사로이는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왜인지는 나와 로빈은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이 말했던 전사들의 영혼이란건 한마디로 유령이 아니였을까? 신성스럽게 빛이 나던 조각이 사로이의 행동에 화가 나서일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것은 밝혀지지않았다. 우리들은 그 일로 서둘러 동굴 밖을 뛰쳐나와 우리가 걸어왔던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잿빛 산을 내려갔다. 우리가 겨우 산에서 내려왔을땐, 저 멀리 잿빛 산 정상에서 들리는 그의 무리에 울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였다. 만약, 우리가 저들에 손에 잡히면 죽임을 당하겠지. 분명, 우리가 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와 로빈은 잿빛 산에 마키 족 말고는 다른 생존자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E 구역으로 향했다.
  그 후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뭔 놈의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흐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겪었던 지난 1년이란 시간에 비하면 별거 아닌 정도지만 말이다. 로빈이 만든 지도에 적힌 E 구역엔 몇년이 지났을지 모르는 허름한 오두막이 우리 앞에 나타났고, 그 안에는 역시 사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담 그때 로빈이 발견한 쪽지는 대체 무엇이였으며, 숲에서 봤던 그 발자국은 대체 누구에 것이였을까? 다만, 한가지 추측되는건 숲에서 발견한 발자국이 마키 족의 발자국이라는 가정 한가지와 정말로 이 세상에 살아 남은 자의 발자국이였다는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 결론도 얼마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않아 우리가 최초로 묵었던 A 지점에 돌아온 로빈과 나는 다시 한번 그 숲에 찾아갔을 땐, 그 발자국과 동일한 발자국이 여기 저기 찍혀있는걸 발견했다. 그리고 그 발자국은 우리가 마주쳤던 마키 족 사람들의 발자국과 동일했다. 역시나 그들은 우리를 쫓고 있었다. 로빈과 나는 이곳이 안전하지않음을 깨닫고 서둘러 A 지점을 벗어났다. 그곳을 떠나 아주 오랜시간을 달려온 우리 앞에 어떤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나와 로빈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 마을 안으로 들어갔고, 정말 뜻 밖에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직, 우리와 마키 족만 살아 남은건 줄 알았던 우리 앞에 희망이 찾아온 것이였다. 우리들은 기뻐했다. 아직 세상은 멸망한게 아니라고, 아직 한 줄기의 빛은 남아있었다고. 우리들은 빠르게 그 마을에 적응해갔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문명의 세상을 재차 느끼게 된 로빈과 나는 몹시 기뻤다. 아쉽게도 전기가 들어오지않아 한밤 중에는 촛불로 밤을 지새우지만, 그래도 너무도 좋았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이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다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얼마 지나지않아 우리가 사는 마을이 루에르 마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P.s : 여기까지가 루에르 1화 ' 세상은 멸했다 ' 입니다. 2화랑 3화는 차후에 올리도록 할게요.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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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탓하지마라.

시간을 흘려보낸건 나 자신이다.

시간은 주어진게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연히 나라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그 시간의 흐름에 어떻게 따라가느냐의 내가 증명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증명해보려한다.

  • profile
    아인 2012.02.04 23:35

    루에르 1화 추가설명을 하자면,

    루에르의 ' 환상 ' 그리고 ' 기억 '.

  • ?
    가온  2012.02.05 02:22

    좋습니다. 긴글이여도 계속 읽다보니 빠져드내요 ㅋㅋ ...

    기억은 미즈오 환상은 미즈오와의 내용을 제외한 모든것인가요 ?_?

    잘 읽었습니다~ 2화 3화도 기대할깨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