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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5 02:48

루에르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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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루에르

- 고동치는 보물 - 

13




  

  " 그게 정말인가? 그곳에도 라이제르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게. "

  " 그래 맞아, 비록 살아있는 몸은 아니였지만 그가 그렇게 말했어. 그 때문에 페니턴트라는 병을 알고 있는거고. "

  " 그런가 …. "

  아침 일찍 그가 있는 서재로 간 나는 그에게 지난 일들에 대해 하나 둘 알려주었고, 그의 딸인 라이제르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어르신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딸조차 구천을 떠돌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한걸까, 그의 한숨에는 짙은 비애가 담겨있었다.

  " 그 사람 역시 그 병을 고치는 방법을 모르는건가? "

  " 만약 알고 있었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었겠지. 아쉽게도 그가 병의 이름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는 죽은 뒤라고 했어. "

  " … 그럼, 우리 라이제르도. "

  그는 사색에 잠긴 얼굴로 또 한번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나도 그리 마음이 편한건 아니다. 내가 도울 수만 있다면 그를 도와 라이제르를 살려주고 싶지만, 지금 내가 아는건 병의 이름과 증상 뿐. 그 병을 고칠 방법도, 그 병을 아는 자도 별로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와 이 남자 뿐. 우연찮게 병의 이름과 증상을 들은 로빈도 듣기만 했을 뿐, 이 병의 심각성을 모른다. 그때 로빈이 잠시 주방으로 가고 나서 어르신과 단 둘이 나눈 대화 속에서도 그 정도의 정보 뿐이였다.
  그 남자는 책장 쪽으로 걸어가 낡디 낡은 책들 중 몇권의 책을 꺼내들곤 제자리로 돌아와 내게 책 한권을 건넨다. 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내게 책을 통해 정보를 나눠주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 책은 내가 알려는 자료와는 달리 거리가 먼 내용을 다룬 책이였다. 나는 그에게 건네받은 책을 조심히 펼쳐내어 책의 내용을 읽어보았고, 역시나 내가 짐작했던대로 내가 알고 싶은 내용과는 상관이 없었다.

  " 이걸 갑자기 내게 왜 주는거지? 이 책은 나랑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

  나의 말에 그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자신이 들고 있는 책을 읽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다시 되물으려하던 나는 그냥 책을 덮고는 옆에 있는 책장에 책을 꽂아두고 조용히 서재 밖을 나섰다.

  「 끼 이 익 ―… 」

  서재 문을 열자 그 앞에는 라이제르가 서있었고, 여느 아이들과 같이 명랑하고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라이제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홀연히 자리를 피했다.

  " 후우 …. "

  저런 어린 아이가 머지않아 죽게 되다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이런 끔찍한 짓을 … 아니, 이미 세상은 우릴 버렸다. 1년 전 그날 이후로 이 세상은 인류를 버린거야. 더 이상의 자신의 몸에 기대지말라는 지구의 외침일까? 아님, 순전히 자연재해로 일어난 비극일까. 그게 어찌됬던 상관은 없다. 이미 세상은 멸망했고, 더 이상 남아있는 인류가 몇이 될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단지, 1명의 사람이라도 찾고 싶은 나의 욕망일 뿐이다. 그러나 이 생각도 불연히 떠오른 것, 지금 나의 목표는 다른 곳에 꽂혀있었다.

  " 루에르 씨? "

  바닥을 주시하며 걷던 중, 로빈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방금 잠이 깬 로빈이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서있었고, 나는 그런 로빈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 벌써 일어난거야? 조금 더 자두지 않고. "

  " 충분히 잤어요. 그런데 루에르 씨는 이른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신거에요? "

  " 잠시 서재에 들렀어. "

  " 서재요? "

  " 응, 그 자와 라이제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한번 가봤는데, 역시나 그도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 같아. "

  " 그런가요 …. "

  로빈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나는 로빈에게 잠시 마을 한바퀴 좀 돌고 오겠다며 집 밖을 나섰고, 로빈은 그런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슬며시 발걸음을 돌린다.



  집 밖으로 나서니 여느 마을과 같이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제와는 달리 나에 대한 경계가 수그러들었는지 그들이 나를 보는 눈초리가 조금은 무뎌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게, 어제처럼 그런 모습으로 나를 봤다면 나는 여기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을지도 … 뭐, 원래는 이곳에 하루만 지내고 떠날 생각이였지만, 지금은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남겨있다는걸 알기에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그 소녀를 구할 방법을 연구하는 수 밖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바빠지며, 휑했던 마을 안의 거리도 어느 정도 사람의 발걸음으로 가득했다. 그 남자의 말대로 이들의 행동과 태도는 모두 그 소녀와 관계 있는 일이였나, 만약 그렇다면 그 아이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이해가 가겠군. 더군다나 그 소녀를 두 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그 남자의 애환도 말이야. 단지, 그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그 아이를 멸시하고 박대하다니, 이미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황폐해진게 아니였을까 ….

  「 쿵 」

  어디선가 묵직한 물건이 떨어진 듯한 소리와 함께 근처에서 울려퍼지는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마을 주위를 걷던 나는 그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황급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짐들이 우수수 떨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 커다란 짐들 사이에는 사람이 깔려 있는 것 같았고, 주변에서 그걸 본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방황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체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 괜찮으세요? 조금만 기달려요, 금방 꺼내줄게요! "

   나는 황급히 그 사람 위에 쓰러진 짐들을 하나 하나 옆으로 집어 던졌고, 주위에 벌벌 떨고 있던 사람들이 나의 모습을 보고 하나 둘 내 주변으로 몰려든다. 예상보다 짐의 무게가 커서 조금씩 팔과 어깨에 무리가 오는 듯 싶었지만, 도저히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옅어가는 그 사람의 숨소리와 목소리에 나는 더욱 다급히 짐을 옮겼고, 내 주위에서 이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는 그들에게 얼른 도와주지않고 뭐하는 짓들이냐며 소리쳤지만, 그들은 내 말을 사뿐히 무시하고 멍하니 바라볼 뿐이였다. 이곳은 이상하다. 같은 사람임에도 구하려는 자와 방관하는 자가 있다는거에 놀라고 웃길 뿐이다. 더군다나 이 짐에 깔린 사람은 이 마을사람, 그런데도 이들은 한 핏줄과 같은 사람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인가? 손이 떨리고, 그들에 대한 무서움이 커질 때 쯤, 서서히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많은 짐에 깔려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여자아이였고, 그 아이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낯 익은 모습이였다. 나는 황급히 그 소녀를 짐들 사이에서 꺼내었다.

  " 괜찮니? 어디 다친데는 없는거야? "

  나의 안쓰러운 목소리에 소녀가 정신을 차린 듯, 몽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가녀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그 소녀를 바닥에 눕혀놓았다.

  ' ! '

  흥분이 가라앉고 조금의 여유가 생기니 그 소녀의 얼굴이 햇빛에 비춰 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소녀의 얼굴을 보자 벙찐 얼굴을 하며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화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소리쳤다.

  " 대체 이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해주지 않은겁니까? 고작, 이름도 낯선 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순간에 죽음으로 몰아갈 뻔한 소녀를 구하지 않은겁니까? 당신들이 그래도 사람이야!! "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 하나면 될텐데도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는 듯한 표정들로 나와 소녀를 연신 쳐다본다. 그리곤 이내 발걸음을 돌리며 자리를 피했고, 나는 그런 그들에 대한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황급히 소녀를 등에 업었다.
  그저 인류에게 낯설고, 이 병의 치료조차 불가피한 상황에 그들은 그런 행동 밖에 취할 수 없었다. 단지 이 소녀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않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멸시 받고, 도리어 도움조차도 받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이 되었다. 왜지? 왜 그것 하나로 이렇게 사람이 비참해질 수 있는거지? 그저 남들과 똑같은 삶을 누리고 싶은 뿐인데, 왜 이들은 그런 눈으로 이 소녀를 바라보는 것일까. 그들은 이 소녀가 죽음으로써 모든게 끝이 날거라는 생각을 했던걸까?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자, 모자란 사고방식이 이끌어간 세상의 변화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손에 일구어지고, 사람의 말로써 표현될 수 밖에 없는, 나는 이런 세상을 위해 지금껏 걸어온건가? 내가 꿈꾸던 세상이 이런 세상이였단 말인가? 만약, 내가 원하던 세상이 이런 세상이라면, 나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사람이 사람으로 인해 변하고, 사람으로 인해 비참해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은 나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관이다. 정말 찾으려던 세상이 이런 세상이라면, 난 더 이상 이 모험을 하지 않겠다.



  마을에서 좀 벗어난 한 우물가에 멈춰선 나는 등에 업힌 소녀를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소녀는 거친 호흡을 내쉬며 힘겨워보였고, 나는 그 소녀를 보며 가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그 남자에게 데려간다면 그 남자 역시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겠지, 아니면 나보다 더욱 그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하겠지만 말이다. 이 마을에서 이 소녀를 치료 해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의사도 이 마을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겠지. 그저 이 소녀만 사라지면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을거란 망상에 빠진 채로 이 소녀가 죽기를 간절히 원하겠지. 직접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1년간 로빈과 모험을 떠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내가 할 수 있는건 이것 뿐이겠지. 

  「 쪼로록 」

  나도 참 바보 같다. 지난 시간동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걸까. 로빈과 달리 내가 해줄 수 있는건 이마 위에 차가운 수건을 올려주는 것 밖에 없는건가. 더군다나 이 소녀는 감기가 아닌, 일시적인 후유증일텐데 이런게 도움이 될리 없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조금 불편하니 어쩔 수 없이 했지만.

  ' …. '

  어느 틈에선가 새근 새근 잠을 자는 소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지금껏 누릴 수 없던 행복과 편안함을 꿈 속에서나마 느낄 수 있다는게 다행일 뿐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 소녀가 원하는건 꿈 속에서의 자유가 아닌, 현실에 대한 그리움일텐데 … 나로서는 도저히 이 소녀의 아픔을 나눌 순 없을 것 같군.
  해가 반쯤 기웃거릴 쯤에 소녀가 눈을 떴다. 아까보다는 혈색이 좋아보이는 얼굴을 하며 눈을 껌뻑거린다. 주변환경이 아까와는 달라서일까, 적응이 뎌딘 듯한 소녀가 멀뚱히 나의 얼굴을 주시한다.

  " 정신이 드니? 다행이다. 난 네가 심하게 다친 줄 알았거든. 그만해서 정말 다행이야, 라이제르. "

  " … 절, 아세요? "

  " 응?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낸 그 소녀가 경계를 하는 눈초리로 나를 쓰윽 훑어본다. 이 녀석, 날 기억 못하는건가? 하지만 아까 전에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줬을텐데, 나를 모른다면 그렇게 해맑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건가? 아님, 아까 전의 충격으로 인해 단기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건가? 하지만, 그 정도 충격으로 그런 병에 걸릴리가 ….

  ' . '

  어라, 그리고보니 아까 전에 봤을 때에 옷차림과는 영 다른 옷인데? 내가 건물 밖으로 나와서 이 녀석을 발견하기까지는 채 5분도 안걸렸을텐데. 더군다나, 이 소녀는 내가 발견하기 이전부터 상자에 깔려 있던 것 같던데 …. 뭐지? 뭐가 어떻게 된거야?!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할 말을 잃은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괜시리 이 상황을 웃어 넘기려 했지만,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 소녀를 보자 웃음이 싹 사라진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다.

  " 저기, 라이제르. 혹시 머리라도 다친거야? "

  " 제 이름은 라이제르가 아닌데 …. "

  " 에? 아, 그래?? 그렇구나 …. "

  이 소녀는 라이제르가 아닌건가 … ? 하지만, 아니라고해도 너무 라이제르랑 비슷하다 못해 똑같은데, 정말 이 소녀가 라이제르가 아니라고? 그렇담, 이 소녀는 대체 누구야?
  나는 황당한 웃음을 지으며 대충 이 상황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이 소녀와 라이제르가 매치가 너무 잘되서 이 웃음이 황당해서 웃는건지 아님, 어이가 없어서 웃는거지 모르겠다. 그 소녀는 내 모습에 더욱 의심스러운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나를 경계한다. 나는 그 소녀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가갔지만, 그럴수록 소녀는 나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뒤로 물러난다. 난 벌써부터 꼬마아이한테 미움을 받는건가 … 뭐, 어쨌거나 무사해서 다행이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런데 이 아이가 정말로 라이제르가 아니라면, 왜 그들은 이 아이를 보고도 못 본 채로 지나간거지? 혹시 이 아이를 라이제르로 착각한게 아닐까? 마을사람들은 그 소녀를 피하다못해 무서워하니까, 하루 빨리 마을에서 사라졌으면 했던거야. 그렇기 때문에 이 소녀는 라이제르와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위험에까지 몰고 갔으니.

  ' …. "

  어떻게 보면 이 소녀 역시 피해자인건가 ….
  가까스로 소녀를 달랜 나는 그 소녀의 이마에 달라 붙은 수건을 떼어내어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소녀는 나에 대한 오해를 알고는 미안하든 사과의 말과 함께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으로 조심하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 저기 …. "

  소녀가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불러세웠다. 나는 소녀에게 무슨 할 말이 있냐며 물었고, 그 소녀는 빨갛게 변한 수줍은 얼굴로 내게 이름을 물어본다. 내 이름을 알고 싶다며 쑥쓰러운 듯 머리를 목을 긁적거리는 소녀를 보며 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 소녀에게 말했다.

  " 루에르, 루에르라고 불러. "





  P.s :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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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탓하지마라.

시간을 흘려보낸건 나 자신이다.

시간은 주어진게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연히 나라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그 시간의 흐름에 어떻게 따라가느냐의 내가 증명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증명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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