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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5 23:57

루에르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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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루에르

- 고동치는 보물 - 

14




  

  내 이름을 안 소녀는 부끄러운 듯, 입을 열까 말까 망설이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줬다. 그 소녀의 이름은 ' 라이젤 '. 라이제르의 쌍둥이 언니였다.



  그 소녀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언제부턴가 갑자기 이상행동을 보이는 라이제르와, 그 아이를 바라보는 마을사람들에 시선이 따가웠다했다. 그의 아버지 루연은 그런 라이제르의 머리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쓰다듬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자신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오직 아버지인 루연은 라이제르에게만 관심을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라이젤은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동생인 라이제르를 싫어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매일 밤, 자신이 모르는 내면의 라이제르를 통제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는 라이제르의 모습과 그런 라이제르를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모습에 그러할 마음도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 뿐이 아니였다. 라이제르와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라이젤 역시 마을에 미움을 받고 있었고, 방금 전에 상황도 그리 이상할 것 없다며 쓸쓸한 웃음을 짓는 라이젤을 보니 나의 가슴이 아려온다. 그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고 여느 아이처럼 평범한 생활을 꿈꾸는 라이젤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이였다. 더군다나, 하나 밖에 없는 아버지조차 자신보단 라이제르를 더욱 아끼니, 이 소녀에게 한이 없다면 이상하겠지. 나는 라이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간 겪었던 고생과 슬픔을 어루만져우었지만, 그 하나로 모든게 날아갔다고는 할 수 없다. 그 병을 고치기 전까지는.



  나는 라이젤과 함께 라이제르와 그의 아버지 루연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아침을 훨씬 넘긴 시간이였지만, 로빈은 그런 나를 기다리며 문 밖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그간 힘들었음에 그걸 표현하지않고 꿋꿋이 나의 곁을 지키는 로빈에게 고마운 마음 뿐이다. 나는 벽에 기대어 잠들어있던 로빈의 어깨를 살포시 두드렸고, 나의 손길에 로빈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곤 입에 흐르는 투명한 자국을 잽싸게 닦으며 베시시 나를 보고 웃는다.

  " 지금 오신거에요? 그런데 그 아이는 누구죠? "

  내 뒤에 찰싹 달라 붙어 쫓아오는 라이젤을 본 로빈이 궁금한 듯 물었고, 나는 로빈에게 아까 있었던 이야기를 알려주며 라이젤을 소개했다. 로빈은 라이제르와 꼭 닮은 라이젤을 보곤 놀란 듯, 믿기지않는 눈으로 라이젤의 이곳 저곳을 훑어보곤, 이내 라이젤의 볼을 잡아 당기며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라이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라이젤은 그런 로빈의 행동에 살짝 놀란 기색으로 황급히 내 뒤로 숨는다. 나는 수줍어하며 내 뒤에 철썩 달라 붙은 라이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찰싹 」

  서재 안에 울려퍼지는 기분 나쁜 소리에 어느센가 라이젤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는 화난 듯 씩씩거리며 라이젤을 무섭게 노려봤고, 뒤에서 이 광경을 본 라이제르도 당황한 듯한 눈으로 라이젤을 바라본다. 

  " 너, 내가 말했지? 절대 마을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그런데 내 말을 무시하고 함부로 마을로 나가? 너, 아버지를 깔보는거냐!! "

  이유불문, 다짜고짜 라이젤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다그치며 라이젤의 의사는 전혀 묻지 않았다. 라이젤은 훌쩍거리며 아무 말 없이 자신을 혼내는 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였다. 나는 울고있는 라이젤을 감싸며 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냐고 소리치며 그의 행동을 저지했고,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남의 가족사에 신경 쓰지말라며 당장 비키라며, 금방이라도 일을 저지를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않고 굳건히 그의 행동을 막아서며 라이젤과의 거리를 유지 시켰다. 그러자 그는 약간 이성이 나간 듯한 눈으로 나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과 함께 나를 향해 소리친다.

  " 함부로 마을에 들어온 것도 모잘라, 이제 내 딸까지 마음대로 하는거냐? 내 앞에서 비켜라, 그렇지않으면 네놈도 가만두지않겠다! "

  " 무작정 라이젤을 혼내는 것보단, 이 아이가 왜 마을에 나갔으며 무슨 이유로 혼자서 마을을 떠돌았는지에 대해 물어보는게 먼저 아닌가? 다짜고짜 애를 때리면 너한텐 뭐가 남지? 그저 자신의 딸에게 상처를 주는 것 밖에 더 되? "

  이미 그는 반쯤 이성이 나간 듯, 내 목소리가 들리지않는지 당장 눈 앞에서 꺼지라며 내게 소리친다. 나는 그럼에도 꿋꿋이 라이젤을 지키며 서있었고, 그럴수록 그의 눈동자는 반쯤 뒤집히며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기세로 노려보며 내게 말한다.

  "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설치는거지? 네가 라이제르의 고통을 아는가? 지금까지 라이제르가 겪어온 고통과 슬픔을 아냔 말이다!! "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우습다는 듯한 말투로 내게 말하던 그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웃는다. 그의 터무니 없는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그의 멱살을 붙잡으며 그에게 소리쳤다.

  " 그럼 너는 딸 하나를 지키기 위해 다른 딸 하나를 버릴거냐? 라이제르의 행복을 위해서, 라이젤의 행복은 무참히 밟아버린 생각이냐고!! "

  "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 네가 뭘 안다고, 네가 뭘 안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

  「 우당탕 - ! 」

  이성을 잃고 나에게 달려드는 그를, 나는 그의 몸을 들어올려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그가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자, 이 상황을 지켜보던 라이젤과 라이제르가 깜짝 놀라며 그들의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황급히 달려간다. 로빈은 생전 처음보는 나의 행동에 적잖이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를 노려보며 도저히 그가 내뱉은 말에 대한 흥분이 가라않지않아 애꿎은 책장을 걷어찼고, 이내 바닥에 쓰러져있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 정말로 네 딸의 행복을 원한다면, 먼저 네 곁을 맴도는 라이젤을 신경 써라. 너는 아버지의 자격이 없어. 라이제르에 눈이 멀어 너만을 바라보고 사는 라이젤의 가슴에 못을 박았으니까. 더군다나 너는 그런 라이젤에게 손찌검까지 했으니 말야. 그것만으로도 너는 라이젤과 라이제르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어. "

  " 네가 뭘 안다고 아까부터 계속 지껄이는거지? 네가 라이제르의 아픔을 알아? 내 딸 라이제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네가 잘 아냔 말이야! "

  " 똑같은 말 계속 반복하지마라. 너는 계속해서 내게 그런 말을 하지. 그런데 너야말로 라이제르에 대해 모르는거 아닌가? "

  "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나는 지금껏 라이제르를 위해 모든 것을 해왔다. 그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이다! "

  " 그렇다면 넌 왜 처음부터 이 마을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지? 너가 정말로 라이제르를 아낀다면 제일 먼저 그들에게 라이제르의 병명을 알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는게 맞지않나? 그런 도움도 못 구할만큼, 너는 마을사람들에게조차 신뢰를 받지 못하는건가? "

  "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냐 … 그들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일리 없지 않는가!! 그들은 이미 우리 라이제르를 기피하고 있어,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

  " 그건 당연한거 아닌가? 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병이 주위에 머문다면, 그 누구가 그 사람을 꺼려하지않냔거냐? 사람이라면 당연히 보이는 행동과 태도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가 그 병에 대해 알리고, 그 병에 걸리지 않는 도움의 손길을 준다면 그들 역시 그 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이 수그러들 듯, 너 역시도 라이제르를 위해 그런 말쯤은 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지금 너의 모습은 뭐지? 오직 딸 하나를 위해 다른 딸에게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 아이를 지켜준다는 명분만 내세우고 그 딸을 위해 하는 일이 없지 않냔 말이야! "

  순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왜 맺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끓는 나의 기억의 조각이 흩어져 나온 듯, 나의 눈물이 따갑게만 느껴졌다. 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 있는 딸들을 돌아보며,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라이젤과 라이제르의 얼굴을 어루만질 뿐이였다. 
  
  " 내가 아는 촌장은 너 같은 녀석이 아니였어. 자신의 마을과 자신의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몸을 절벽 끝에 떨어트리는 녀석이였다고. 그런데 너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거지? 도대체 네가 원하는 삶은 무엇이였길래 그런 무거운 자리에 함부로 올라가있냔 말이야 …. "

  나는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서재 밖으로 뛰쳐나갔다. 괜시리 코 끝이 찡하고 시야가 불투명하니 걷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한숨이 절로 나오고 어쩐지 모르게 기운이 쏙 빠지니 나도 모르게 복도에 주저 앉아버렸다.

  「 끼 이 이 익 ―… 」

  서재 밖으로 나온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로빈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다. 벽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은 나를 보며 쓸쓸한 눈빛을 보내던 로빈이 덩달아 내 옆에 앉아 슬쩍 나를 바라본다.

  " 우셨어요? "

  " 아니, 안 울었어. "

  " 그런데 왜 …. "

  " 단지 조금 답답했을 뿐이야.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울분을 토해낸 것 뿐이야. "

  자연스레 탄식이 새어나왔다. 지금까지 꾹꾹 참아냈던 감정들을 갑작스레 뛰쳐나와서인지 여간 당황스러운게 아니다. 여태껏 참아낸 기억들을 왜 갑자기 나는 밖으로 표출했을까, 단지 그 남자의 행동이 바보 같고 어리석어서? 아님, 그에게서 란의 모습이 보여서? 익숙해질 때도 됬는제, 아직까지도 그 자리를 맴돌고 있는 내 모습이 바보 같게만 느껴진다.



  “ 부디, 내 딸 로라를 부탁하네. ”

  “ 너흰 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



  더 이상 그 악몽과도 같은 기억에 휩쓸려 지내기도 버겁다. 잊으려해도 잊혀지지않는 그 날의 기억을 꽁꽁 숨겨놓는 것도 불가능하다.나 혼자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언제까지나 이 기억을 나 혼자서 이끌어가는 것조차 나는 너무나도 힘이 든다. 만약 그 누군가가 내게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면, 나는 그 손을 붙잡을 것이다.

  " …. "

  나의 사지를 뒤트는 이 속박은, 이미 나에겐 무의미하다.




  P.s : 4화 ' 고동치는 보물 ' 끝.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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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탓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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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증명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