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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라락

바람같이 손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비유가 아니라 진실로 열 개의 손과 오십 개의 손가락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소금기가 섞인 따가운 칼바람이 부는 오후, 먼지 쌓인 음침한 보급창고 안에서 오-링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김현수 일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길고 긴 이등병 생활을 어제부로 청산하고 상큼한 기분으로 일병의 일과를 시작한 그에게 떨어진 것은 오-링 800개 포함 총 스물두 건의 수입. 군무원은 그에게 50개 단위로 들어있는 해외수입품 오-링과 기타 물품의 수량이 정확한지 파악하고 규정대로 5배수로 재포장하는 퀘스트를 친히 하사하였다. 오-링은 최악의 물품이었다. 조금 굵은 고무줄이란 느낌을 가진 그 악마의 물건은 뜯어서 일일이 세어보지 않는 이상 겉으로 봐서는 개수파악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서로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상한 하얀색 분말이 묻어 있는 관계로 찝찝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는 국민의 혈세를 허투루 낭비할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모 제약 광고처럼 뜯고 세고 나누고 포장하고 뜯고 세고 나누고 포장하고를 반복하였다. 김 일병이 자랑하는 그 섬세한 손놀림은 빠르게 수입품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김 일병 이것 좀 들어줄래?”

“예, 박 서기님.”

무아지경으로 손을 움직이던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일어나 달려가 박수진 서기가 건네주는 물건을 받아들었으나 힘에 부친지 이내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그냥 내가 옮기지 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하고는 흥얼흥얼 ‘배 서기 벳 걸, 박 서기 굳 걸.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이상하게 개사한 가사를 흥얼거리며 볼트가 들어있는 30kg 박스를 양 손에 한 박스씩 들고 총총히 2층으로 올라갔다.

저장병 일병 김현수. 특기 섬세한 손놀림, 약점 제로의 뮤지클(근육박약).

 

산간벽지 중에서도 오지의 마법사로 불리는 어느 이름 모를 산골 꼭대기에 위치한 수색대대 1생활관의 개인 정비 시간. TV와의 거리에 비례해 점점 높아지는 머리 위치는 마치 계급 순으로 내림차순을 하기라도 한 듯하다. 그 중에서도 맨 앞에서 머리와 바닥의 거리가 0으로 무한 수렴하는 오창진 병장의 괴성이 온 대대에 울려 퍼진다.

“소녀시대! 아악! 소시 짱!”

컹컹컹 아우우울 까악까악

이에 호응하듯 산골 주민인 각종 야생동물들의 울음소리가 즐비하게 울려 퍼지며 바야흐로 인간과 동물의 화합의 장이 도래하였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믿을 수 없는 고효율의 에너지가 생산되며 생활관 온도계의 눈금이 단숨에 영하 15도에서 영하 12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열광하는 소리에 떠들썩한 한 때, 출입문이 벌컥 열리며 김수로 상사가 나타났다.

“!”

“오창진이 어딨나! 나랑 같이 지금 순찰 좀 가지.”

“추, 추웅성! 오창진 병장은 지금 여기에 있습. 응?”

“어, 어라? 방금까지만 해도 TV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는데.”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부릅뜬 눈이 몇 쌍인데 그 눈을 피해서 그새 사라졌단 말인가?

모두가 당황해서 우왕좌왕 하며 관물대도 열어보고 침상 밑도 살펴보고 심지어 창문 밖을 살피는 놈도 있었다.

“약삭빠른 놈! 분명 목소리를 듣고 왔는데, 그새.”

10년 짬밥을 결코 허투루 먹은 그가 아닌데도 이런 녀석은 처음이었다. 결코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붙는 지옥견이란 그의 별호는 그의 섬세한 후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유독 한 명에게만 통하지 않았다.

“오창진이 그놈 보는 즉시 행정반으로 보냇!”

김수로 상사는 분함을 억누르고 밖으로 사라졌다. 쿵쿵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갔냐?”

“?”

천장 형광등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들자 천장 벽지가 툭 떨어지며 흐릿한 형체가 드러났다. 그 형체는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더니 점점 뚜렷해져서 오창진 병장으로 변했다. 그야말로 등화불명의 묘리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은신술의 정수였다.

“막내야, 벽지 챙겨라.”

“오, 오 병장님! 어떻게 미리 알아채고 은신까지.”

이 인간이 째는 건 평소에도 많이 봐왔지만 이제는 이런 경지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 병장은 여유만만 다시 시작되는 2PM의 차례에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퍼득 퍼득 퍼드드드득

그 때 다시 형광등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이상한 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안한 자유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창진 병장의 시선이 TV를 벗어나 천장을 향한 그 순간 깜빡거리는 형광등은 그의 평화는 곧 산산조각이 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으, 으아악! 에프킬라! 라이타! 빨리 화벳 출동해라!”

종종 서울촌놈들이 전설의 벌새로 착각하곤 하는 거대 포레스트 박각시의 출현에 오 병장이 자지러졌다. 이내 5대기 화벳이 출동하여 박멸에 성공하였으나 소란이 너무 컸던 탓일까.

“잡. 았. 다. 오. 창. 진. 이.”

“해, 행보관님! 제, 제가 애들한테 전파 받고 곧 가려고 했. 으, 으아아악!”

귀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그에게 더 이상 병장의 가오는 없었다.

정찰병 병장 오창진. 특기 은신술, 약점 서울촌놈(벌레혐오증).

 

타닥 타다다 탁탁

분명 키보드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니터 상에 떠오른 워드 프로세서는 믿기 힘든 속도로 검은 글자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휘유~”

장장 마흔다섯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 작성을 마친 천유진 상병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 스케쥴러의 우측 하단에 표시된 시간은 벌서 공두 시. 초번초 근무를 나갔다 왔어도 복귀해서 라면을 먹고 커피 한 잔 하고 씻고 잠이 들었을 시간이다. 뿌듯하게 결과물을 바라본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고 무엇을 꺼내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캬아, 작업 후에 마시는 음료의 그 달콤시원함이란!”

그렇게 뿌듯함을 느끼며 감상에 젖은 기쁨도 잠시.

번쩍! 우르릉

섬광굉음과 동시에 본체, 모니터, 프린터, 스캐너, 디카, 온열기가 다중연결 된 멀티탭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지더니 모든 전원이 나가버렸다.

“뭐, 뭐야 이거! 농담이지?”

깜짝 놀라 먹던 음료를 내던져버리고 떨리는 입꼬리와 눈매를 채 진정시키지도 못한 채 정신없이 컴퓨터의 전원을 켜 보지만 묵묵부답, 함흥차사다. 물론 문서작업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수시저장을 해놓은 덕에 문서는 고이 보존되어 있을 테지만 형광등도 켜지지 않고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걸로 봐서 컴퓨터는 그만 꼴까닥 하신 것 같아 보인다.

“하, 하하하.”

그녀의 허탈한 웃음은 덧니가 살짝살짝 보이는 것이 일견 귀여운 듯했지만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늦가을에 태풍이라니 말이 돼? 흐잉. 그나저나 피냄새가 진동을 하잖아. 아까운 내 피. 또 김일춘이를 닦달해서 몇 팩 더 얻어내야겠군.”

그녀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던 빨간 액체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선인장 화분으로 남김없이 쏙 들어가 버렸다. 주변이 정리되자 그녀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더니 이내 곧 정신을 차리고 노트북을 꺼내들고 다시 워드 작업에 몰두했다. 아무래도 오늘 취침은 포기해야겠다. 그녀의 입에는 어느새 또 하나의 팩이 물려 있었는데, 뚜렷이 수혈팩이라고 쓰여 있었다. 노트북의 불빛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는 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지만 눈 한 번 깜빡임이 없이 업무를 수행했다. 미동도 없는 천유진 상병과 미친 듯이 퍼져나가는 타자소리는 피처럼 빨간 열매를 맺은 선인장과 쏟아지는 빗소리와 더불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행정병 상병 천유진. 특기 염력, 약점 만성 헤모글로빈 결핍증(흡혈귀).





군복무 중 당직을 서다 심심할 때 끄적였던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설정이나 스토리 따위 없이 마음 내키는대로 쓴 거라 구성은 별거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있는거 몇 편 다 올리고 나면 극악연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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