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에르 61

by 아인 posted Feb 2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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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루에르

- 망각의 덫 - 

8



  “ 네가 어떻게 이곳에 …. ”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지금 내 앞에 닥친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곳에 이 남자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면서도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천하태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고,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 어떻게 네가 …. ”

  입 안에 맴도는건 이 말 뿐이였다. 어떻게 네가 이곳에 있는지, 왜 네가 이런 곳에 있는지. 이 두 물음만이 가득 찰 뿐이였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나와는 상반된 태도로 뭐가 그리 이상하다며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쳐다봤고, 더더욱 황당함을 감출 수 없던 나는 당황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 네가 … 네가 어떻게 이런 곳에 있는거야? 이곳은 … 이곳은 …. ”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맞닿은 내 입술이 말하기를 거부라도 하는 듯이 꽉 달라 붙어 벌려지지가 않는다. 그를 마주보며 그의 입에서 이 상황을 설명케하기 위해선 나의 말이 필요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내 자신은 그러기를 말리는 듯 싶었다. 
  이상행동을 보이는 나를 보며 라셀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 바닥에 쓰러진 책 몇권을 책장 위에 조심스레 정리해놓던 그의 손길이 문득 어느 한 책에서 멈춘다. 그리곤 한참을 머뭇거리는 듯한 행동을 취하던 그가 이내 뭔가 굳게 다짐한 표정을 지으며 꺼내든 책을 내 쪽으로 빙그르르 건네준다.
   책을 건네 받은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사뭇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 이번엔 또 뭐지? 또 무엇으로 나를 현혹할 생각이야!! ”

  바닥으로 책을 집어 던지며 라셀에게 소리쳤다. 라셀은 그런 나의 행동을 봐도 별로 놀랍지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반쯤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는 흙에 얼룩진 책 표면을 손으로 탈탈 털며 내게 말한다.

  “ 아무리 화가 나도, 애꿎은 책에게 화풀이는 아니지 않나? 책은 아무 잘못 없다고, ”

  살짝 화가 난 듯한 그의 눈초리에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 너 … 어떻게 된. ”

  “ 똑같은 말은 반복하지 말라고, 어처피 다 설명 할테니까. ”

  책에 묻은 먼지를 말끔하게 털어낸 그가 책장에 책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나는 여유로워 보이는 그의 태도에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여기서 내가 화를 낸다 한들, 나아지는 것은 없을 뿐더러, 그에 대한 나의 미스테리만이 남을 뿐이다. 어찌해서 저 남자가 이곳에 있으며, 어떻게 이곳에 멀쩡히 머물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선, 그가 내게 먼저 말을 하기 전까지 나는 두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금은 다짜고짜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 아닌, 좀 더 냉정하게 이성을 찾고 상대방과의 오해를 차차 풀어 나가야하는 단계인 만큼, 내가 그를 바라 보는 눈초리를 그리 탐탁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와는 달리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조금은 답가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 보고 싶었어. 잠시나마 너를 보게 될 수 있어서 기쁘기도 하고. ”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라셀이 입이 열었다. 그는 나를 볼 수 있음에 기쁘다며, 갑작스레 두 볼을 붉히며 쑥쓰러운 듯한 미소를 짓는다. 말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던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과 행동에 적잖이 당황한 듯한 행동을 취하며 그에게 버럭 소리쳤다.

  “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썰렁한 소리 그만하고, 본론이나 얘기하라고! ”

  “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였으니까,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라고, 옛말에 그런 말이 있잖아? 급히 먹은 떡은 맛있다. ”

  체한다겠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군. 나는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라셀을 쳐다봤고, 라셀은 자신의 실수를 모르는지 하핫 웃으며 나의 어깨를 툭툭 친다. 나는 그런 라셀에게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어서 빨리 얘기하라며 그를 재촉했고, 그는 알겠다며 일단은 건네준 책에 표시된 부분을 펼쳐 보라며 내게 말했다.

  “ 이 페이지에 뭔가 담겨져 있는건가? ”

  “ 뭐, 일단은 펴보면 알겠지? ”

  라셀은 뭐가 그리 웃긴지 쿡쿡 웃음을 참으며 내게 빨리 책을 펴보라며 권했고, 나는 그런 라셀의 모습을 보며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표시된 페이지를 슬며시 펼쳐 보았다.

  “ 이건 … 쿠피디타스? ”

  그가 표시 해둔 페이지엔 떡하니 쿠피디타스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 이게 뭐 어쨌다는거야? 이건 그냥 사진이잖아. ”

  무슨 대단한걸 보여주나 했더니, 그냥 쿠피디타스 사진이 있었다. 나는 라셀을 바라보며 반쯤 어이상실한 표정으로 그에게 투덜대자, 그가 한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 그 사진 말고, 그 밑에 쓰여진 내용을 봐. ”

  라셀은 손가락으로 책 페이지를 콕 찝으며 말했고, 나는 그가 가리킨 곳에 젃힌 글자들을 읽어 갔다. 그리고 이내, 그 책에 적힌 뜻 밖의 사실에 놀란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라셀을 쳐다봤다. 라셀은 예상 했다는 듯한 제스터를 취하며 내게 말했다.

  “ 역시나 모르고 있던거네. 뭐, 그 점이 나한테는 더욱 좋을테지만 말야. 그나저나 큰일인걸, 이것도 몰랐다면 지금까지 네가 한 행동들은 다 헛고생일텐데 … 뭐, 이제부터 내가 도와줄거니까 걱정은 말라고. ”

  엄지 손가락을 번적 들며 씨익 웃는 그의 얼굴에 주먹이 날아갈 뻔 했다. 

  “ 그런데, 정말 저기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야? ”

  “ 아 물론, 사실이야. 네가 본 그대로라고. ”

  라셀은 당연하다는 식의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페이지에 적힌 내용들을 되새기며 읽어 내려 갔고, 끝내 그 자료가 거짓이 아님을 확인한 후에야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벌써부터 기진맥진하지 말라고, 이제부터 내가 할 말을 들으려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할 걸. 더군다나, 내가 어떻게해서 이곳에 왔는지도 일일이 설명해야하니까 말야. 그런데 너는, 내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에 대해서 궁금하지도 않나보지? ”

  라셀은 미심적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나는 그런 라셀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럴 일 없다며, 당장 네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털어 놓지 않으면, 널 이대로 마키 족에게 넘겨서 개죽음 시키겠어라는 반 협박적인 언어를 뱉으며 그에게 말했가. 그러자 라셀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러지 말라며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 진심이야. ”

  나는 진심이였다.



  20분 동안 이어진 대화 속에서 나는 그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와, 그가 이곳을 오면서 숨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지난 일들에 대한 의문점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 그렇다면, 네 녀석이 이곳에 온 이유도 …. ”

  “ 물론, 이 세계의 멸망과 상관 있는거지. 하지만 아직까지도 의문들이 모두 풀린건 아냐, 단지 그 모순들을 조사하기 위해 나 같은 녀석들이 몇명 있을 뿐이니까. ”

  “ 그런거냐 …. ”

  나는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슬픈 눈망울로 땅바닥을 바라봤다. 뭔가 알 수 없는 만감이 교차하며, 무언가가 들끓는 듯한 기분 또한 느껴진다. 라셀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더니, 이내 자신의 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네준다.

  “ 그건 뭐지? ”

  “ 막상, 널 만나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오기 전에 미리 할 말을 적어 놓고 왔지. ”

  “ 풋, 그런거냐. ”

  라셀이 건넨 쪽지를 받아 들며 살짝 웃어본다.

  “ 지금에서는 너한테 이런 저런 말들은 못하겠지만,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너도 무언가를 깨닫고 있을테지. 그럼, 그때 가서 보자고. ”

  라셀은 마지막 인사를 하며 이곳을 떠났다. 분명 그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테지, 나 역시 그 녀석에게 묻고 싶은 말이나 듣고 싶은 말이 많았음에도 참고 이렇게 헤어지는건. 머지 않아, 다시 만날 그날 기약하며 서로 미루는게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서도, 그가 내뱉은 말들은 내겐 너무 충격적이고, 주옥 같은 말이였지. 더군다나 쿠피디타스에 관한 얘기는 더더욱 ….

  “ …. ”

  하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한 일들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어느 정도 이 세계에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든, 그 고비를 뛰어 넘을 만큼의 재량을 가진 나로서는 더 이상 무서울게 없겠지만 ….



  나도 모르게 옛 생각을 하고 만건가 …. 나도 참 태평한 녀석이군.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알면서도 이렇게 늦장을 부리다니 …. 나도 아직까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건가? 이 벽 너머로 남 모르게 끙끙거리는 로빈을 두고, 나는 대체 어떠한 선택을 해야하는 것일까 …. 

  “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너도 무언가를 깨닫고 있을테지. 그럼, 그때 가서 보자고. ”

  너 또한 그런 속 편한 소릴 했다는 것에 나 또한 안심하는 터이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두 개의 쿠피디타스가 서로 무슨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진 정확하진 않지만서도, 한가지 확실하게 안다면 지금 내 오른손에 들려 있는 이 메달이겠지. 푸른 달의 모양을 지닌, 아주 고요하면서도 고독한 ….
  그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아직까지도 미궁에 빠져 있지만, 그가 내게 하려던 말을 굳이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그때 그와 나눴던 대화들 중 신경이 쓰이는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라셀은.

  “ 아마도 나완 달리 열심히 하고 있을테니까, 별 걱정은 안되지만 말야. 그래도 그녀가 다쳤다면 조금은 가슴이 아프겠지? ”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를 보는 내 시선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본인 역시나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테지. 지금에 나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건 로빈, 그녀 뿐이다. 그녀를 고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한다. 설령, 나의 사지가 뒤틀리고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리고,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는 그녀를 위해서도 나는 도저히 이 발걸음을 멈출 수만은 없다. 그러니, 그러니까 ….

  " . "

  이 메달이 내 손에 있는 한, 난 절대 멈추지 않을거다. 무슨 일이 내 앞에 닥쳐도, 나는 그것을 무너 뜨려서라도 앞을 나아 갈 생각이며, 언젠간 다시 만나자는 그 녀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P.s : 우여곡절 끝에 작성된 61편입니다. 이런 고비가 몇번이나 찾아오는걸 보면, 조금은 쉬어야 할 단계에 온걸까요? 하지만 5월달까지 완결 낸다는 생각으로 힘 내겠습니다.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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