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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창고에서 일과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창고 안은 점점 매서워지는 바닷바람이 줄줄 새어 들어와 싸늘한 냉기로 가득했고 반대로 햇빛은 한정된 채광창으로 희미하게나마 빛을 투영시켜 오히려 바깥보다 쌀쌀했다. 박 서기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고 나는 먼지로 가득한 오래된 물건들의 먼지를 털고 있었다.

“쿨럭 쿨럭”

안 그래도 약한 기관지에 먼지 털기 퀘스트는 좀 무리였나 보다. 목이 칼칼하고 코는 근질거려 왔다. 그러자 왠지 좀 침울해졌다. 집에서 이거 십분지일만 했더라도 효자로 소문이 났을 테지. 작업 속도가 느려졌다. 어찌보면 정말 한가한 병종이다. 세고 쓸고 닦고 하다가 물건 찾아서 내보내고. 반대로 남는 건 없다. 들어가고 나가는 군수품은 꽤나 많아서 의외로 쉬는 시간은 적다. 가늘고 길게 일하는 것이다. 배부른 소리겠지만 그냥 전투부대로 갔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그러면 무공이라도 강해지겠지. 무공훈련 시간에는 그저 손을 빨리 움직이는 수련 뿐 고유의 병과무공도 없다. 창고엔 먼지가 많아서 내공도 잘 쌓이지 않는다. 의무복무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는 좋지만 무공 측면에서는 최악이다. 아, 어디 기연 좀 없나. 기연도 산골 깊숙한 부대에서나 발을 헛디뎌 절벽이라도 떨어지면 얻는 거지 만날 창고만 오가는데 뭐가 나오겠어. 실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다시 먼지 털기에 집중하며 상자를 하나 집어 든다. 어휴, 요즘 스마트폰이 여기 쌓인 먼지보다 얇겠다. 어디 보자. 1956년이라. 우리 부대 창설일보다 오래 된 물건이다. 이건 상자를 새로 갈아야겠어. 위치를 잘 기억해 둔 다음 상자를 들고 책상으로 이동해서 물건을 꺼내고 보니 상자 안쪽이 이상한 무늬로 가득했다. 이게 뭐람. 글씨 같은데?

‘만년거암이 단단하다 하나 낙수와 산들바람에 예정된 미래는 한낱 흔한 모래알일 뿐이요, 천년고목이 굳건하다 하나 미욱한 벌레와 새의 부리에 언젠가는 넘어 자빠지기 마련이다. 인내와 끈기보다 강한 것은 없으며 대장부의 결심만큼 굳은 것은 없으니 한 마음을 먹은 이 앞에서 온전한 형상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중략) 임심비결.’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눈앞에서 번쩍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아아, 하늘도 무심하지만은 않구나. 기연 기연 타령을 하니 정말 기연이 날 잡아 잡수쇼 하고 뚝 떨어지다니! 중간중간 벌레 먹은 흔적으로 온전치는 않았지만 내 감은 이건 정말 대박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얼른 종이에 옮겨 적고 상자는 밖으로 가지고 나가 태워버렸다. 음, 좀 치사시럽지만 이제 내 밑천이 될 무공인데 나도 먹고 살아야지. 가슴이 쿵쾅쿵쾅 요란스레 뛰고 있었다.

세 달 후.

어느덧 일꺾이라는 칭호를 달게 되었지만 그다지 변한 것은 없었다. 기연을 만났다고 생각한지도 오늘로 정확히 백 일이 지났다. 원래 무공이란 게 단기간에 큰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초조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사라진 부분 때문일까? 아니면 구결대로 정말 긴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무공인 것일까. 호호백발의 손자의 아양을 볼 할아버지가 되어서 고수가 되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순간 짜증이 팍 밀려와 저절로 주먹이 휘둘러졌다. 뭐라도 화풀이를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어 되는대로 후려갈기고 보니 팅 하는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내가 뭘 쳤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철제 캐비닛이 우그러져 있었다. 이게 원래 찌그러져 있었나 싶은 차에 손이 은은히 아렸다.

“사고 쳤네.”

믿기진 않지만 내가 한 일 같아 한 번 기가 흐른 길을 되짚어 보았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서 실험삼아 캐비닛을 슬쩍 밀어봤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짜증이 팍 밀려왔다. 뭐야 이거. 왜 됐다 말다 하는 거야. 누구 약 올려? 짜증을 담아 이번엔 양손으로 밀쳤더니 기우뚱 세상이 기울어졌다.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어어 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는 새에 앞으로 뒤로 기울기를 두어 번 반복하던 캐비닛은 결국 뒤로 넘어가 버렸고 쿵쿵 소리를 내며 도미노처럼 창고 반대편까지 여덟 줄이 고대로 쓰러졌다.

“대형사고 쳤네.”

이거 물건 무게까지 족히 1톤 가까이 될 텐데 이게 넘어가? 생각을 채 정리할 틈도 없이 박수진 서기님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창고 안은 캐비닛이 쓰러질 때 내뿜은 먼지로 마치 방역이라도 한 듯 희뿌옇게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일 듯 말 듯 내보이고 있었다.

“내 인생 어느 때고 한 번 쯤은 지진을 경험할 날이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 그게 오늘 이곳인 줄 알았으면 여기 있을 걸.”

태연한 박 서기님의 말에 난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오로지 이건 영창감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긴 지옥이야. 지옥일 수밖에 없지. 왜냐구? 지옥견이 사는 곳이니까. 그래도 견사치곤 깨끗하네. 가스난로도 켜져 있어서 따뜻하고. 쳇, 내무실엔 얼음이 얼고도 남을 정도인데 지 사무실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구만. 내 군생활은 도주의 연속이라 할 수 있어. 처음 전입온 날부터 지옥견에게 찍힌 데다 일병이 꺾이고 견장을 찬 이후로 풀린 군번에 배가 아팠는지 줄기차게 날 찾아대는 그 후각을 요령 있게 피해 다녀야 했으니 무리는 아니지. 왜 찍혔냐고? 아니, 좀 들어 봐. 내가 개념 없이 무슨 총을 챙겨온 것도 아니고 말이야. 신교대에서 수건 좀 많이 챙겨왔기로서니 그렇게 갈궈댈 수 있는 거야? 솔직히 빨기 귀찮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누가 먼저 내 팬티를 훔쳐갔다구. 내 참 더럽고 치사해서. 그놈은 남이 입던 팬티 훔쳐 입을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짜증나서 막판에 그냥 수건이나 디립다 챙겨왔지. 아, 그랬더니 더블백이 뭐 이리 빵빵하냐고 한 번 까보고는 똘끼충만한 녀석이 왔다고 싹을 잘라버린다는 거야. 먹는 건 또 엄청 좋아해서 책상에 먹을 건 가득 쌓아두고 다니거든. 나 이등병 때 말년 병장 한 명이 심심했는지 몰래 그거 하나 꺼내먹고 쓱 입 닦았는데 그걸 어찌 알았나 찾아내서는 조지더라구. 그래서 아무도 거기에 손대는 사람이 없었는데 혼자 꿀단지 꺼내먹듯 꺼내먹는 게 참 눈꼴이 시어서 기회 한 번 노렸지. 복수의 그날을 꿈꾸며 은신술 하나에만 매달렸는데 수색대대라 그런지 은신술 하나는 끝내주더라고. 상병 쯤 되니 아 좀 됐다 싶대. 그래서 하나 먹어봤더니 모르더라. 하나가 둘 되고, 둘이 넷 되는 건 정말 시간문제였어. 꼬리가 길면 잡힌다던가. 재수 없게 뒤지고 있을 때 딱 들어온 거야. 분명 퇴근 도장 찍고 나가는 걸 봤는데 놓고 간 과자가 아쉬워서인지 다시 들어온 거지. 눈치 채고 딴청을 딱 부렸는데, 그 짬에 탁 하면 척이지. 정말 문자 그대로 날 잡아먹으려 들더라구. 시치미를 뗐지. 아 꺼내는 거 봤냐고. 펜 가지러 들어왔는데 웬 생사람 잡냐고.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다. 짜증나지. 그 후로 대놓고 뭔 일 있으면 부르고, 심심하면 부르고, 짜증나는 일 있으면 화풀이 하려고 부르고. 돌아버리겠대. 그래서 숨고 숨고 숨다보니 이제는 후임들이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나 하고 톰과 제리 보듯이 하더라. 하여튼 지옥견 말고도 여기가 지옥인 이유는 또 한 가지 더 있어. 여긴 나에겐 지옥이지만 벌레들에겐 천국이거든. 참새만한 나방은 기본이고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말벌에 모기약을 홍수처럼 뿌려야 약기운에 죽는다기보다는 익사한다는 것에 더 가까울 정도로 건강한 모기. 그 밖에 뭐라 표현할 수 없이 요상하게 생긴 벌레들이 가득해. 자고 일어났더니 침낭 속에서 지네가 갑툭튀! 한다거나 전투화 속에 돈벌레가 주무시고 계실 경우.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 돋지 않아? 이것들에 비하면 지옥견 정도의 비주얼은 봐줄만하다고 할 수 있지. 그나저나 날 데려다놓고 뭘 하러 갔길래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난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깊게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았어. 무심코 던진 시선에 천장 구석에서 손바닥만 한 시꺼먼 게 보이길래 뭔가 싶었지.

“바, 바퀴닷!”

정신이 번쩍 들었어. 더듬이만 움직이고 있는 저건 분명히 바퀴벌레야. 가슴이 서늘해졌지. 바퀴벌레는 정말 최악의 생명체니까. 바퀴벌레로 뭐 그렇게 귀신 본 마냥 호들갑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경험담을 들어보면 좀 이해가 갈 거야. 내가 고등학교 때 한창 게임한다고 컴퓨터 앞에서 살던 때가 있었는데 마우스 옆에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거야. 당연히 식겁해서 마침 물 마시던 컵이 있길래 냉큼 덮어놨지. 그런데 차마 처리할 용기가 없어서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지도 생명인데 굶어 죽을 거 아냐. 그래서 한 일주일 정신없이 게임을 즐기다가 문득 생각나서 이젠 죽었겠거니 싶어서 무심코 컵을 들어 올렸어. 그때까지만 해도 컵은 버려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수백 수천 개의 검은 점이 사방으로 후다닥 흩어져 버리는 거야. 컵이 있던 곳에는 뭐에 뜯어 먹힌 듯이 반쯤 밖에 남지 않은 바퀴벌레뿐이고. 그리곤 잠시 기억이 없어. 손에 올라온 그것의 정체를 봤기 때문이지. 바퀴벌레 새끼더라. 제 어미를 파먹고 기회가 오자 바로 탈출한 거야. 그 끔찍한 광경을 본 것도, 기절한 것도 억울한데 엄마한테 뒤지게 맞았어. 아오 그 생각하니 스팀 오르네. 신의 안배인지 마침 책상 위에 에프킬라도 있겠다, 내 주머니 담뱃갑 안에 라이타도 있겠다. 생각할 것 없이 화벳모드로 들어갔지. 저 지옥의 생물은 박멸해야 해. 라이타를 켜고 에프킬라를 막 뿌리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지옥견이 들어왔어.

“오창진이 오래 기다렸.”

갑자기 그의 얼굴이 샛노래지더니 사자후가 터져 나왔어.

“얌마, 그거 뿌리면 안.”

“행보관님? 왜 그러시.”

쿠아아앙

이렇게 난 두 번째 기억의 공백을 맞이하게 된 거야.

  • ?
    그르르친구 와르르 2012.02.29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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