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야. 넌 아무 것이나 잘하지?」
「응! 난 엄마 딸이니까!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상냥하게 웃던 나의 어머니. 그리고 그 칭찬에 어쩔 줄 몰라서 그녀를 안았던 기억. 그리고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어머니. 그리고 까르르 웃는 나.
「그러니까 착한 우리 딸 좋은 대학 가는거다?」
「응! 나 엄마랑 약속할께! 난 무엇이든지 잘하는 딸이니까!」
「그렇구나. 소리는」
그녀의 약지에 나의 약지를 건다. 그리고 살며시 흔들며 나는 노래를 부른다.
「약속, 약속! 이 약속 안지키면 바보! 약속, 약속! 이 약속을 안지키면 바보! 두 손가락 손에 손에 깍지 끼고 약속! 약속! 이제는 약속! 이 약속 안지키면 바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래. 그렇다. 그때 만큼은 행복했던───
[무엇이든 잘할 수 있지? 우리 딸, 우리 딸, 우리 딸───]
「─────」
요즘 들어서 이런 꿈을 자주 꾼다. 그녀, 즉 나의 어머니가 죽은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어머니의 바램이 나의 목을 죄어온다. 미칠 듯 죄어온다.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는건가?
「제발 그만해요───」
왠지 감정적으로 변해서 머리맡에 베고 자던 베게를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세운 무릎 위로 이마를 얹는다. 생각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거죠. 어머니」
도대체.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거죠───
[행복]
「행복인가요?」
[불행]
「불행인가요?」
[난 너의 행복을 바래]
「정말입니까?」
[─────]
「─────」
베게를 주으러갈 생각 조차 없었다. 귀찮다. 이 모든 것이 귀찮을 뿐이다. 난 깊어가는 생각을 접은 체 자리에 누웠다. 당현한 말이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문득 슬픈 마음이 들었다. 왼팔을 얼굴 위에 얹는다. 보이지 않아. 아니, 밤이니까 당현한걸까. 아니면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걸까?
「도와줘───제발」
왠 일인지 그때의 꿈을 꾸고 울어버린 탓인지 그 꿈은 꾸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무엇을 바란 것일까?
「소리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는 별로 사교성이 좋지 못한 편이다. 그것이 도대체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 앞에서 말을 걸고 있는 그녀는 내 유일한 친구이다.
「아? 미희구나? 아니, 별로」
그녀는 싱긋 웃어보이며 내 옆에 앉는다. 딱히 그녀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난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아마도 그때의 일 때문이겠지.
「소리야. 넌 혹시 좋아하는 노래 있니?」
「노래라? 아는 노래가 없어서 말이야」
그녀가 장난스러운 듯이 싱긋 웃어보인다. 그리고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난 약간 놀랐다.
「약속, 약속! 이 약속 안지키면 바보! 약속, 약속! 이 약속을 안지키면 바보! 두 손가락 손에 손에 깍지 끼고 약속! 약속! 이제는 약속! 이 약속 안지키면 바보!」
「그게, 무슨 노래야?」
「흠,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익숙한 노래야. 아마도 옛날에 들었던 일종의 약속을 하는 노래인가봐」
「아, 그런가?」
또 기억 나버렸다. 그때의 그 노래.
「약속, 약속! 이 약속 안지키면 바보! 약속, 약속! 이 약속을 안지키면 바보! 두 손가락 손에 손에 깍지 끼고 약속! 약속! 이제는 약속! 이 약속 안지키면 바보!」
「우리 딸 잘할 수 있지?」
「우리 딸이니까」
「좋은 대학 갈 수 있지?」「소리야? 소리야?」
「우리 딸이니까. 잘할 수 있을꺼야. 소리야」「소리야? 소리야!」
잠깐의 망상 속에서 헤어나온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이 나를 쳐다본다. 무엇 때문일까?
「너 갑자기 쓰러져선 이제까지 자고 있었어」
「그런가?」
보아하니 이곳은 양호실 인듯 하다. 역시 이곳은 어색하다. 딱히 와본 곳도 아니고.
내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비틀거리는 바람에 그녀가 나를 부축해주었다.
「조심해」
「미안해」
「으응, 아니」
도대체 나에게 그녀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녀에게 나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나를 이토록이나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잠시 후 종이 쳤다. 아마도 너무도 많이 잔 탓이겠지.
「미안한 걸. 나 때문에 수업도 못하고」
「아니야. 공부는 다음에 하면 돼」
「그런거───절대로 아니야───」
「소리야?」
「───아무 것도 아니야」
그녀가 어리둥절한 듯 나를 쳐다본다. 나는 싱긋 웃어보이곤 걸어간다. 밖을 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마도 역시 너무도 많이 잔 탓이겠지.
힘겨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간다. 그래봤자 집에는 불빛하나 보이지 않을 테지만.
「다녀왔습니다」
무언가 슬퍼져서 그렇게 힘차게 외쳐보인다. 왠지 혼자이고 싶지 않다. 사실 혼자가 좋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아니, 거짓말이다. 절대로 거짓말이다.
[우리 딸 다녀왔니?]
「다녀왔어요」
[우리 딸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지?]
「제발 이제 그만해요───」
양 손으로 귀를 막고 주저앉아버린다. 이제───제발 이제 그만해───
「그만하라고! 이제 정말 지쳐버렸다고───」
[우리 딸 왜그래? 우리 딸은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잖아?]
「아니야. 당신의 딸인 나는 무엇이든지 잘하는 당신의 이상 속 아이가 아니야───!」
[우리 딸 왜 울고 있어? 무엇이든 잘하는 우리 딸 울면 안되지?]
「제발───이젠 그만해───!」
[울지마. 우리 딸. 다음에 더 잘하면 되잖아. 알겠지?]
「누가 도와줘. 누군가 날 도와줘. 날 이곳에서 꺼내줘. 누군가가 필요해───」
「도와줘───」
망상 속에서 다시 빠져나온다. 그녀가 정말 바라는 건 무엇일까?
[행복(幸福)]
[불행(不幸)]
[공부(工夫)]
[성적(成績)]
[일류대학(一流大學)]
[자기만족(自己滿足)]
[대리만족(代理滿足)]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행복]
[보상심리(補償心理)]
[우리 딸.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지? 그러니까 엄마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 알았지? 우리 딸?]
[응! 나 엄마랑 약속할께! 난 무엇이든지 잘하는 딸이니까!]
「───!」
그렇다. 잊고 살았다.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것을.
뭔가 허무함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로 바라던게 이것인가? 정말로 이것을 바란 것인가?
「결국엔 그것이였군요? 보상작용(補償作用). 당신은 그것을 원했군요?」
「결국 당신은 제가 아닌 제 능력을 사랑했던 것이군요?」
「제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길 바랬던 일종의 보상(補償)」
「제가 사랑했던 어머니가 사실은 제가 아닌 제 능력을 사랑했군요」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릴적 잊혀졌던 그 기억. 사랑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 그러나 '내'가 아닌 '나의 것'을 사랑했던 어머니.
저벅저벅. 천천히 베란다를 향해 걸어간다. 밖에는 빵빵거리는 차 소리와 함께 밤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어쩌죠. 저도 이제 그만 쉬고 싶은데」
그리고 난간 위에 올라가 섰다.
「걱정하지마세요. 전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이것이 바로 맹목적 사랑(아가페, agape)이라고 하는걸까요? 아니, 그래도 어머니도 저를 사랑했으니 필리아(philia, 나에게 이로운것을 사랑하는 '유아적 자아'가 행하는 사랑)일까요?」
「이제 그만 가주시겠어요? 어머니───」
눈을 감았다. 그에 따라 흘러내리는 나의 눈물들. 힘차게 뛰어내린다. 빠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사람은 죽기 직전 가장 큰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는데. 하지만 육체적 아픔보다 정신적 아픔이 더 크기에 육체적 아픔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도 기쁘게───
「이젠 당신을 만날 수 있겠죠? 저는 그냥 바보로 남고 싶습니다」
「저를 그렇게 가슴아프게 했지만───,」
「하지만 사랑했습니다───어머니───」
p.s 하지만 어쩌죠. 이제 그만 쉬고 싶은데.
이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