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에르 74

by 아인 posted Mar 3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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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루에르

- 영원의 신념 - 

1 - 8



  라셀의 입 밖으로 튀어 나온 말은, 잠시동안 나를 벙어리로 만들어 주었고,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라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 …그 소녀가, 로라였다고? "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이리도 가까이 있었음에도 나는 대체 어딜 향해 보고 있던걸까?


  " 말도 안돼…어떻게 이런…. "


  말이 다 나오지 않는다. 중간에 끊긴 말 뒤로 실 없는 나의 웃음만이 잔잔하게 흘렀다.

  그 뒤로 몇 분간은 라셀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염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동자로 흘러가는 구름만을 바라볼 뿐이다. 지평선 아래로 자츰 사라져가는 태양과, 그 뒤로 보이는 희미한 색의 달이 그의 뒤를 따라 올라온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나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 내리며 지나가자, 멍청히 하늘을 주시하던 나의 시선이 슬쩍 라셀을 향해 옮겨간다.


  " 그럼 넌 처음부터 알고 있던거야? 그녀가 로라라는걸. "


  내 물음에 라셀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응, 이곳에 온 뒤부터 줄곧 알고 있었어. "


  " 그런데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어? "


  "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로라를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은 너잖아. 그렇기 때문에 나는. "


  " 아니, 미처 생각지도 못했어. 이렇게 가까운 곳에 로라가 있을지는…. "


  " …. "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로라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몰랐고, 더군다나 나를 도와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로라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랄 뿐이였다. 역시 그때 느낀 느낌은 기분탓이 아니였어. 그녀가 로라였기 때문에 란의 모습이 비춰진거였어. 처음, 이곳으로 온 내게 란이 그랬던 것처럼, 부녀지간의 끈은 놓아지지 않았던거야. 내가 혼란에 빠졌을 때 란이 도와준 것처럼, 그의 딸인 로라 역시 나를 도와주려는거야. 처음보지만 낯설지 않은 이 느낌을 말이야.


  "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 "


  " 말 안해도 알아. 왜 그녀가 이 마을 촌장이 아닌지에 대해 묻고 싶은거지? "


  " …. "


  라셀은 다리를 살짝 꼬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때, 네가 이곳을 떠난 직후, 마우 마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


  " 이상한 일? "


  " 내가 전에 네가 부순 쿠피디타스가 다시금 생성 됬다고 말한 적 있지? 그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 설명을 못해줬는데. 사실은 쿠피디타스가 생성되기 이전에 있었던 전모를 알려줄게. "



 

  “루에르가 쿠피디타스의 힘에 이끌려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 란의 부탁을 받아 제 스스로 쿠피디타스를 깨트린 루에르가 그간 쌓였던 피로가 누적됬는지 힘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때 마침 뒤를 따라 올라온 수색꾼들의 눈에 띈 루에르는 다행스럽게 마우 마을로 향했다. 그와 함께 그 위에서 란의 장열한 최후를 지켜본 라셀은 무슨 생각인지 그들과 함께 내려가지않았다. 그러나 수색꾼들은 그런 라셀을 보며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축 처진 루에르를 부축해서 조심스럽게 마우리스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마우 마을로 향할 때쯤, 홀로 마우리스 산 정상에 남아있던 라셀은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며 방금 전, 마키와 함께 벼랑으로 떨어진 란을 찾기라도 하는 듯 힘겨운 그의 발걸음에 바람소리마저 애처로운 듯 쓸쓸히 불어온다. 벼랑 끝에 가까스로 멈춰선 그의 눈빛은 멍하니 낭떠러지 밖으로 머물렀고, 금방이라도 다시 란의 목소리가 들려올 듯한 기분이 들지만, 메마른 허공엔 바람소리만이 잔잔하게 흘렀다.


  " …결국 너마저도 떠난거냐, 그래도 너만은 무사할거라 생각했는데. "


  그도 란의 죽음이 믿겨지지 않는지 한동안 벼랑 끝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의 죽음은 그리 탐탁치않아. 아직 네가 마우 마을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대체 뭐냐. 이것으로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하지마. 너와 함께 이 아래로 떨어진 마키가 말했듯이, 너의 자손에게 큰 피해가 닿을거야. "


  그의 눈가에 자그마한 슬픔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이대로 울게 된다면 란의 죽음이 헛으로 끝나게 될테니. 


  " 그러나, 우리 수색꾼이 가만두진 않을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이름을 걸고 네 자손만은 꼭 지켜줄게. 어떤 일이 있어도 꼭. "


  그는 웃었다. 허탈함에 웃는 웃음이 아닌,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확신에 찬 미소였다. 

  벼랑 끝에서 무언(無言)의 약속을 한 라셀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곤 바닥에 싸늘하게 남겨진 쿠피디타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산산조각이 난 쿠피디타스는 더 이상 수호신이 아닌, 그저 하찮은 고철 덩어리로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심상치않은 기운이 흘렀다. 


  " 이대로 두고 가기엔 너무나도 아깝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해도 일단은 가져가는게 도움이 될테지. 더군다나 수색꾼들 누군가가 이 쿠피디타스에 대해 철저히 알아낸다면, 그건 우리 수색꾼들에게도, 이 세상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


  그는 바닥에 떨어진 쿠피디타스의 조각을 하나씩 주워 담아 자신의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다시는 오지 않을, 그의 모습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보였다. 


  " …언젠간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


  그의 웃음이 바람을 타고 그가 떠난 자리를 메꾸었다. 그의 말은 대체 무슨 뜻이였을까? 하지만 기어코 그 말은 란을 위로 하려는 의도가 담긴 말은 아니였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자신을 위로하려는 자기만의 위로법이였을지도….

  그날 밤, 영문을 모른 채 사라진 루에르 때문에 마을사람들과 수색꾼들은 혼란에 빠졌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방 안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던 루에르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였다. 그들은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혹시 마을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찾고 있는 루에르는 그곳에 없었다. 그들이 사라진 루에르를 찾고 있는동안, 현대로 돌아간 루에르는 현재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온걸 자책하며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걸 알 도리가 없는 그들은 날이 밝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그를 찾아 헤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헤매고 다닐 때, 아무런 행동도 없이 물끄러미 그들을 지켜보던 라셀은 한숨을 푹 내쉬며 슬그머니 촌장댁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전부터 마을의 기둥이 되었던 촌장댁 안은 싸늘한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본래 이곳엔 오랜 전통과 질서를 지키려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 즉, 이 마을 대대로 촌장이란 자격을 부여 받은 자들의 장소.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침묵으로 가득한 이곳엔 라셀의 발걸음만이 촌장댁에 울려 퍼졌다.

  라셀은 아무 말 없이 건물 안을 걸어다녔다. 그리고 이윽고 다다른 어느 한 방에서 머무는 듯한 그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앞으로 당기자 힘 없이 열리는 모습에 라셀의 한숨을 더욱 슬퍼진다.


  「 끼 익 」


  애처롭게 느껴지는 문소리가 라셀의 이목을 움직인다.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서는 라셀은 한적한 분위기가 맴도는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아른거리는 불투명한 시야 앞에 조금씩 불빛을 밝히는 호롱불이 어두운 방 안을 물들였다. 불그스름한 빛이 가득 채우자, 조금씩 그 빛을 받아 보이는 방 안의 사물들. 자그마한 테두리 안으로 조금씩 형체를 들어내는 것. 이곳엔 란의 형상이 담겨있다.


  " …. "


  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쓸쓸한 기운만이 감도는 이곳엔 그의 침묵까지 더해져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빛으로 가득찬 방 안을 서슴없이 돌아다니며, 이곳에 머물렀던 자들의 흔적을 뒤밟아본다.

  문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발자국으론 4번의 움직임이 닿은 곳. 작은 서납장으로 보이는 물체 하나가 라셀의 눈에 들어온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서납장을 꺼내며 그 안에 든 물건들에 손을 대본다. 이러면 안되는걸 알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 …. "


  물건의 정체를 본 뒤부터 라셀의 침묵은 그 무게를 더해갔다. 무어라 말할 수도 없고, 말한다고해도 변하지않는. 그런 결과를 알기에 그는 더욱 더 입을 닫았다. 그에 손에 들린 누런 종이 한 장만이 이 상황을 모두 설명해줄 뿐. 라셀은 슬그머니 방 안을 빠져나간다.

  마을은 아직도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조금은 수그러들은 듯, 그들의 모습엔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그들 사이로 유유히 지나가던 라셀은 근처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 수색꾼들 중 한 명에게 다가서며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을 그 남자에게 건넨다. 영문을 모른 채, 라셀의 손에서 자신의 손으로 종이를 건네 받은 그의 눈이 살짝 흔들린다.


  " 이건…. "


  그의 입술이 떨린다.


  " 뭔가, 알고 있는거라도 있어? "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눈동자에 라셀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 미안하지만, 나도 알고 있는게 없어…이미 오래된 사건이잖아? "


  바위에 앉아 아쉬운 탄식을 내뱉는 그를 보자, 라셀의 기대도 산산이 부숴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듯, 씨익 웃으며 그에게 건네준 종이를 돌려 받고는 또 다시 어디론가로 향한다. 앉아서 숨을 돌리던 그는 아무 말 없이 떠나는 라셀의 뒷모습을 보며 궁금한 듯 그에게 소리쳤다.


  " 어디 가? "


  그의 물음에 라셀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까도 그랬듯이 무언의 침묵을 지키는 그의 뒷모습에 그를 부르던 그 남자의 얼굴에도 금방 포기의 미소가 흘렀다. 그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가 향하는 곳을 주시할 뿐, 목적지는 모르지만 그가 향하는 곳엔 답이 있을거란 기대에 찬 확신일까? 아님 그 정도로 그가 자신에 찬 발걸음에 안심이라도 하는걸까. 


  " …. "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묵묵히 앞을 향해 걷던 라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묵묵히 지켜보는 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지금껏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서서히 열며 그 남자에게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간다.


  " 미래에서, 나는 미래를 꿈꾼다. "


  " …. "


  " 지난 과거를 후회하는건 부질 없는 짓이니까. 잠시 여길 떠나겠어. 얼마가 걸릴진 모르지만, 아마 다시 만나겠지.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말야. "


  그의 웃음엔 작은 별이 닿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긴 그의 웃음은 한 점의 악도, 한 점의 선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그는 그가 하고자픈 말을 했던걸거다. 다시 후회하지않도록, 후회한다면 나 자신을 버릴 정도로.

  라셀 주변에 동그란 물방울들이 대지에서 하나씩 올라온다. 하나가 두 개가 되고, 두 개가 세 개가 되던 물방울의 수가 점점 늘어날수록 라셀의 모습은 그 물방울 안에 갇혀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물방울과 함께 모습을 감춘 그의 모습은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 …미래인가, 녀석다운 말이야. "


  바위에 앉아 소리 없는 웃음을 짓던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라셀과 다시 만나는 날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 약속이 영원하다면…언젠간 닿을 날이 있을거라 본다. ”


P.s :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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