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루에르- 영원의 신념 -1 - 12
라셀은 란과의 옛 이야기를 들춰내며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하였다. 목적지는 불분명하지만 라셀이 간다는건 분명 내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겠지. 궁금하긴 하지만, 라셀이 아무 말도 없는걸 보면 무슨 의도가 있을지도.
라셀의 뒤를 말 없이 따라오던 나의 눈에 낯 익은 풍경들이 펼쳐진다. 라셀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잿빛 산 앞, 그리고 그 옆으로 보이는 낯 익은 모습들. 나는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들에 조금씩 흥분을 늦츨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전에 로빈과 갔던 곳이였으니까.
아마 그때는, 사람의 행적을 찾아 이리저리 유랑을 하던 때로 기억한다. 사람이라곤 나와 로빈 단 두 명 밖에 없었고, 세상이 멸망한지 딱 1년하고도 며칠이 지난 날이였으니까. 운 좋게 주위를 걷다가 발견한 종이를 발판 삼아, 이곳 저곳의 지리를 파악할 겸, 우리들이 나중에 가야할 곳은 체크하기 위해 만든 엉성하지만 그래도 쓸모 있는 지도 한 장, 지난 밤에 불타오른 장작 하나를 연필 삼아 우리들은 이 세상을 도약하기 위한 첫 번째 발디딤을 시작했지. 그리고 이곳에서 마키 족을 만나고, 루에르 마을을 발견하고,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꽤 오래된 기억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얼마 지나지않은 시간이였단 말인가….
그리고 또 한 번의 놀라운 광경, 수십 년 전의 세상인 이곳에 세워진 작은 건물 하나. 호수를 두고 저 들푸른 잔디 위로 잔잔히 모습을 감춘 모습. 라셀은 그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뒤를 따라 묵묵히 걸어오던 나 역시, 라셀이 향하는 곳을 돌아보니 당황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 건물이 여기에 있으며, 그 오랫동안 그 건물이 남아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꾸자꾸 든다. 그렇지만 라셀이 이곳으로 온 이유도 무슨 뜻이 있기 때문일거라 생각한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 끼익 」
거칠게 열리는 문틈 사이로 자그마한 빛이 새어 나온다. 달빛과 직선 방향에 위치한 건물이다보니, 그 근처로 달빛의 기운이 제대로 발하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 잔디가 하얀 빛을 받으니 금빛으로 변하는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자, 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호기심이 깃든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문고리를 잡아 당기며 안으로 들어가던 라셀은 멍하니 잔디를 구경하고 있는 나를 보고는 나의 팔을 잡아 당기며 안으로 끌어 들였다. 자칫하면 넘어질 뻔 했으나, 운 좋게 자리에 우뚝 멈춰선 나는 슬쩍 건물 안을 둘러보며 라셀에게 말했다.
" 여긴 어디지? 그냥 평범한 폐가는 아니겠고…. "
신기하면서도 조금은 으슥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물 안은 웬일인지 한기를 품은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라셀은 그런 나의 물음에도 대꾸는 하지 않고, 무언가를 찾는 듯한 분주한 손길이 이곳 저곳에 닿는다. 다행히도 이 안은 달빛에 비춰 사물의 모습이 조금씩 형체를 보이기 때문에 뭔가를 찾기엔 수월해보였다.
한참동안 무언가를 뒤지던 라셀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집어 들었고, 그가 무언가를 발견한 것을 본 나는 조심스럽게 라셀에게 다가가며 그에게 물었다.
" 뭘 찾은거지? 아까부터 급히 찾는걸보니 중요한 것 같은데."
그러나 이번에도 라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내 옆을 지나치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아까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를 보며 나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간다.
낡은 책상 앞으로 걸어간 라셀은, 아까 집은 물체를 올려 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엇을 찾았길래 아까부터 라셀의 표정이 저리 안 좋은지 가서 묻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아까부터 이상한 라셀의 행동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대체 이곳은 어디며, 어떻게 이 건물이 현대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이 건물은 나무로 지은 이곳에 있는 여느 다른 건물과 다름이 없었지만, 나와 로빈이 발견한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현대식 건물이였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분명 이 건물은 무슨 연관이 있는게 틀림없다.
" 라셀, 여긴 어디지? 여기가 어디길래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거지? "
" …여긴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장소다. "
" 비밀…장소? "
" 수색꾼으로써 찾아낼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는 법, 그럴 때마다 나는 이곳에 와서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풀곤 했다. 어쩔 때는 이곳에 와서 편히 쉴 때도 있지만…. "
라셀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웃음에선 쓸쓸함이 묻어 나왔다.
" 나는, 나만의 장소를 만들기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 남들에게 피해 받지않고, 나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거든. 그래서 이렇게 작지만 아늑한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지. "
" 네 말의 요점은 뭐야? 그런 얘길 하려고 날 데려온거야? "
" 아니, 물론 이런 얘길 하려고 여기까지 온게 아니야. 원래는 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너에게 주려고 여기까지 왔지만, 왠지 이곳에 오니까 옛 생각이 나서 말이야…. 왠지 지금 말하지 않으면 평생 나 혼자만이 안고 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 그러니까 나보러 네 옛 이야기를 들어주란 말이야? "
" 물론, 듣고 싶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단지 나는 네 녀석으로 인해 마음의 평온을 느끼고 싶을 뿐이야. 싫다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게. "
" 아니, 상관 없어. "
" 뭐? "
" 어처피 날이 밝기 전까진 아무 것도 못할테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거든…. "
나는 슬쩍 라셀을 쳐다보며 말했다. 라셀은 의외에 대답을 한 나를 보곤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인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는 그의 얼굴엔 자그마한 기쁨이 보였다.
" 이미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도통 머릿속에서 잊혀지지않는 한 녀석이 있거든. 이 건물도 그 녀석과 함께 만든거야. 나 혼자였다면 불가능 했을 이 작업을 그 녀석이 도와준거야. 덕분에 그 녀석과 힘을 합쳐 가까스로 이 건물을 세웠고, 나는 그 녀석이 도와준 답례로 이곳에서 그 녀석과 재밌는 생활을 했지. 그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쉴 공간이 필요 했던거야. 그러던 참에 나를 만난거고, 물론 그 전부터 그 녀석과는 친한 사이였지만 말야. "
옛 생각에 잠긴 그의 입가에 작은 별들이 묻어 나는 것 같다. 반짝이는 달빛 사이를 조명 삼아, 그의 모습이 하얗게 변해간다.
" 그 녀석은 내가 수색꾼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그런지 신참인 나를 골려 먹는 재미로 살았지.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금방 그 녀석의 장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내가 아까 전에 말했던 얘기 중에 란의 여자가 죽었다는 말이 있었잖아. 그걸로 인해 내가 계급이 올라갔거든. 웃긴 노릇이지, 나는 아무 것도 한게 없는데 갑작스레 계급이 높아졌을 뿐더러, 오랜시간 수색꾼에서 머물러 있던 그 녀석과 동급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더 이상한게 뭔지 알아? 그 녀석은 내가 자신과 같은 계급이 된게 기뻤던 모양이야. 순전히 그 녀석은 나를 골탕 먹일 생각으로 나를 약올린게 아니라, 하루 빨리 나와 같은 계급이 되어서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게 바램이였나봐. 그래서 그런지 상부에 명령 또한 그 녀석과 함께 다니는걸로 명령이 떨어졌거든. 그렇게 그 녀석과 같이 다니다보니 어느새 그 녀석과 친해졌지. 아, 전에도 조금은 친했지만 더욱 돈독한 우정을 가질 수 있었지. 아마 나랑 그 녀석이 생각하기론 그때가 아마 제일 기쁘고 행복했던 때라고 생각해. 그때처럼 이곳 저곳을 활보하며 다닐 순 없으니까…. "
라셀이 말이 조금 흐려졌다. 웃으며 말을 이어가던 그의 얼굴은 조금씩 상념이 내려 앉는 듯 보였다.
" 그러던 어느날, 상부에서 지시 하나가 내려왔어. 그건 바로 쿠피디타스를 사용해서 현재로 가라는 것, 난 깜짝 놀랐지. 그 녀석 또한 현재에서 온 녀석일 뿐더러, 내가 이곳에 오기 이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게 믿겨지지 않았거든. 나는 당연히 그 녀석이 이곳 사람인줄 알았지 뭐야. 하지만 별 상관 없었어. 그 녀석이 이곳 사람이든, 우리가 살던 현대의 사람이든, 아무 쪽이든 좋았던거야. 어처피 내가 지금 이 녀석을 만나고 있고, 내 옆에 있는 한 이 녀석은 절대로 내 곁에서 떨이지지 않는다란 믿음. 그 믿음을 나와 그 녀석 손에 하나씩 묶고 우리들은 쿠피디타스를 사용해서 현재로 향했지. 오랜만에 향하는 고향의 발걸음은 가벼웠어. 오랜시간을 비워둔 탓인지,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세상을 휩쓴 핫 아이템들, 돌아온 우리들에겐 한 마디로 경악을 금치 못할 일들이였거든.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기상천외한 일들을 뒤로 하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지. "
" 본래의 목적? "
" 응, 우리들이 현재에 온 이유는 과거에 존재하는 쿠피디타스가 현재에도 존재하는지에 대한 유무를 파악하기 위함이였어. 그래서 우리들은 일주일동안 여러 곳에 있는 쿠피디타스를 확인하고 다녔지. 다행히 쿠피디타스는 멀쩡하더라고. 우리들은 쿠피디타스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쿠피디타스를 사용했지. 그런데 그 녀석이 갑자기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더군. ' 너 먼저 돌아가, 나는 이곳에 할 일이 남았어. ' 라고. 나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윽박 질렀지만, 그 녀석의 얼굴을 보니 차마 뭐라 할 수가 없더라고. 뭐, 나 혼자 가더라도 돌아오지 못하는건 아냐. 잿빛 산 정상에 위치한 쿠피디타스를 사용해서 돌아올 수 있다는걸 확인했기 때문에 그리 악착 같이 안된다고는 못했어.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안 좋은 느낌이 든거야.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녀석을 데리고 오지 못한 이유는, 그 녀석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였어. 오랫동안 과거에 있던 탓에 동생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게 조금은 찜찜했는지 그 녀석은 동생만 보고 금방 오겠다며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냈지. 나는 끝까지 그 녀석을 데리고 가고 싶은 생각 뿐이였지만, 언제 다시 동생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올지 몰라서 그렇게 그 녀석을 그곳에 남겨두고 나 홀로 이곳으로 돌아왔지. 그때는 미처 몰랐어. 그 녀석이 동생을 만나러 간 날, 나 혼자 그런 그 녀석을 남겨두고 홀로 과거로 떠난 날이, 세상의 종말이 들이 닥친 날일지는…. "
" 그렇다는건…설마. "
" 그래, 그 이후로 그 녀석을 만날 수 없었고, 그날이 있던 뒤로부턴 쿠피디타스가 제대로 발동하지 않았지. 한 마디로 나는 다시 현대로 돌아갈 수 없었지. 그 때문에 그 녀석 또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어. 그로부터 1년, 그리고 오랜시간이 지나 지금까지 그 녀석을 만날 수 없었어. 그럼에도 나는 줄곧 여기서 그 녀석을 기다렸어. 다시 한 번 나를 보고 방긋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 하지만 그 녀석은 오지 않았어. 영영 그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지…. "
라셀은 소리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생생하게 돌아왔는지, 그는 몹시 슬퍼하는 모습이였다. 괜히 이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했는지, 라셀은 황급히 소매로 눈을 비비며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 그 녀석을 잃고, 아니 잃어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우리로서는 그렇다고 볼 수 밖에 없어. 이미 1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지금까지도 그 녀석이 나타나지 않는걸 보면 알 수 있지. 나는 이미 그 녀석을 포기했어. "
" …! "
라셀의 입 밖으로 나온 한 마디의 단어로 인해, 순간적인 분노를 느낀 나는 라셀의 멱살을 붙들며 그에게 소리쳤다.
" …포기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마!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고 함부로 죽었다고 생각하는거야? 그 녀석이 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텐데,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이유가 있을텐데! 그런 그 녀석에게 하는 말이 포기? 포기는 그렇게 쉽게 하는게 아냐! 어디선가 무사히 있을거다. 어디선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며 나를 만나는 그날까지 묵묵히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찾고 또 찾아야지. 뭐? 포기? 나는 한 번도 너처럼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어! 만일, 만일 내가 너처럼 포기를 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나는, 나는…. "
부르르 떨리는 입술 뒤로 감춰진 작은 슬픔과 혼돈. 지금껏 아무 탈 없이 잘 지켜온 나의 신념이 방금 전 라셀이 내뱉은 말 하나로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를 붙잡고 있는 두 손은 너무나도 꽉 쥐었는지 힘이 되려 빠질 지경이였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 녀석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뚫고 튀쳐 나올 말을 꾹꾹 참아내며 그 녀석에게 다시 한 번 말하였다.
" 절대, 절대로 포기란 말을 쉽게 하지마. 네가 포기한다는 말을 내뱉을 때도, 어디선가 너를 기다리며 꿋꿋이 살아 남고 있을테니까. "
나는 라셀의 멱살을 놓으며 밖으로 나갔다. 차마 밖으로는 표출할 수 없었던 화가 활화산처럼 분출하며 나의 몸을 하늘 위로 내던졌다. 쓸쓸히 불어오던 찬 바람이 어느덧 싸늘한 칼날처럼 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마저 나는 차마 울분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껏 그렇게 걸어왔으니까. 어디선가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라는 단어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포기하는 그 순간에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아픈 고통을 참아 내며 전진할 수 밖에 없다. 그게 내가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며, 그렇게하지 않는다면 나는 제대로 버텨날 기력조차 남아나지 않을테니까….
P.s :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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