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에르 6화 : 영원의 신념 1

by 아인 posted Apr 1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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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루에르

- 영원의 신념  - 

1

67 - 81





  “ 날 … 믿는가? ”


  아니, 믿지 않아. 하지만 믿지 않는 것도 아냐. 이 세상을 살아 오면서 많은 생각과 후회도 해봤어. 그 결과, 나는 그 누구도 믿지 않으면 안돼. 그렇다고 누구든 쉽게 믿으면 되는 것도 아냐. 누군가의 대해 알고, 누군가의 대해 모른다면, 나는 아무런 행동도 못할거야.


  “ 할 수 있겠어? ”


  나도 잘 몰라. 그냥 한번 해보는거지. 못한다고 뒷걸음질 쳐봤자 나아지는건 없어. 나는 이미 뒤로 머물 때가 없거든. 나의 퇴보 아닌, 진보로 움직여볼거야.


  ” 너라면 할 수 있다. 너라면 알 수 있을거다.”


  과연, 그럴까? 네 말대로 그렇게 쉽게만 풀린다면 좀 좋겠지만 나한테는 더 없이 무거운 짐일 뿐야. 네가 그런 말로 내 힘을 북돋아봤자, 나는 지금 너무나도 지쳐 있을 뿐이야. 정령, 날 도와주려면 그렇게 지켜만 보지 말라고.


  ” 조심해, 이제부터 이건 네 손에 달렸어. ”


  말은 했지만 역시나 나는 아직 너무나도 떨려, 이걸 정말로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은 안 들어. 그냥 어거지로 등 떠밀려 하는 행동 같아.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내 의지가 더 많겠지만 말야.


  ” 꼭, 무사히 돌아와라. 내가 아닌, 그녀를 위해서. ”


  조금은 가슴이 저려와. 쉽게 움직일 순 없을 것 같아. 나에겐 너무나도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어. 쉽게는 할 수 없을거야. 그래도 네가 그렇게 말하고 나에 대한 기대감이 많다면 … 나는 할거야, 이 세상을 위해서,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다시 한번 재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만들 기회로 ….


  ” 미안해, 루에르 ….”


  다시는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할거야. 정작, 사과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은 내가 아닌 너니까. 줄곧 미뤄왔어, 너에 대한 사과를, 오늘만 오늘만을 넘기며 너를 뒤에서 보며 울 수 밖에 없었어. 늘 네가 내게 말했던 그 한 마디를, 쉽게 내뱉지 못한 나에 대한 실망 뿐이야. 내 자신은 쉽게 하지 못하는 말을, 너는 그토록 쉽게 하는 모습에 나는 정말로 내게 잘못이 없는 줄 알았거든.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침대에 누울 때면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라. 그때마다 나는 계속해서 후회를 하고 말아. 나는 너한테 한 번이라도 미안하단 말을 해본 적이 없어, 사과를 해야 하는건 난데, 되려 내가 너에게 사과를 받을 뿐이였어. 가슴이 아픈건 너였을텐데, 누구보다 더 나에 대한 실망과 아픔에 고통을 받았을 사람은 바로 넌데, 나는 그런 너에게 그런 모진 말 밖에 할 수 없었어. 나는 너를 그런 존재로 밖에 본 적이 없던거야. 한 번이라도 너를 소중히 여겼다면 지금의 나는 이렇게까지 슬프진 않을텐데 ….


  " 난 … 지금까지 너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두 다리 쭉 뻗고 잔 적이 없어. 줄곧, 너에 대한 생각 때문에 나는 도저히 쉽게 잠에 들 수 없었어. 세상이 멸망하고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네 생각에 자꾸 눈물만 흘러. 이런 나를, 너는 용서할 수 있겠어 … ? "


  ' 난 그저 … 너를 그릴 뿐인데 …. '


  미안해, 미안해 … 정말 미안해 …. 네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맨 바닥에 사과를 하는 나를 미워해. 한 번이라도 내게 너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네게 이런 말을 할거야.


  " 미안해 … 지금까지 네게 하고 싶었어. 미안해 … 정말 미안해. "


  사과의 대한 기억, 또는, 추억의 눈물 …. 난,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다. 눈 앞에 있던 행복을 두고 곁에 없는 뭔가를 찾아 멀리 떠나버린 내 자신이 바보 같고 추악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늘 내 곁에 있었구나 …. 


  ' 나 역시 바보지만 … 너 역시 바보구나 …. '


  힘들어도 괜찮은 척, 내게 기대는 모습, 다시는 볼 수 없는걸까? 언제나 너의 그 미소를 볼 수만 있을거라 생각했어. 지금까지 봐왔던 네 얼굴을 계속해서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루가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수년이 지나도 네 얼굴만은 생생하게 떠오를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 나는 너의 얼굴도,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아.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도, 다 널 만나기 위해서인데, 정작 중요한 네 얼굴이 떠오르질 않아 … 난, 대체 지금까지 뭘 위해 달려온거지? 널 만나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 하나 버릴 각오로 달려 왔는데, 나는 네 얼굴조차 기억도 못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너의 모습이 점점 옅어지며 흐릿한 실루엣만 남겨져. 나의 기억 속엔 너란 존재가 자츰 지워지는 듯해. 그럼에도 난 널 원해, 널 만나고 싶어, 또한 사과하고 싶어, 지난 날 내가 했던 모든 업보를 네게 사과하고 싶어. 미안하다고, 정말 내가 바보 같았다고, 지금껏 네게 한 모든 잘못을 용서 받을 순 없겠지만, 너에게 사과만 한다면 조금은 후련해질 것 같아. 그러면 너는 내게 소리 없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겠지.


  " 미안한건 나야, 루에르한테 그런 짐까지 짊어지게 해서 … 미안해, 루에르. "


  사과하지마.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네가 나한테 사과를 할 필요는 없어. 너는 내게 지난 날들의 잘못을 모두 사과를 받아야만 해. 그래야만이 나는 조금 더 네게 한 발자국 더 다가 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 그러니까 … 너는 내게 사과하지마. 사과를 하면 할 수록 내 마음은 찢어져서 붉은 눈물자국만이 남으니까, 그런 추한 모습을 네게 보여주기 싫어. 바보 같이 눈물 흘리는 내 모습을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언제까지나 나는, 너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니까, 너에게만은 듬직한 녀석이 되고 싶으니까, 힘들 때 내 어깨를 빌려주고, 슬플 때 조용히 네 곁에 머무는, 난 그런 녀석이면 족해. 그럼으로 너의 웃음을 찾을 수만 있다면 ….


  ' 난 … 모든걸 버릴 수 있어. 널 위해서라면 모든지 …. '





   “ 정신이 들어? 정신이 드냐고! ”


  “ 정신이 들었으면 말 좀 해봐. ”


  “ 다행이야 …. 난 또 혼자가 될까봐 … 두려웠어. ”





  이 목소린 ….





  “ 루에르 씨? 왜 그러세요? ”


  “ 일어나셨어요? ”


  “ 루에르 씨? ”


  “ 루에르 씨! ”


  ” 루에르 씨 …. ”


  



  로 … 빈?





  “ 내 이름은 로빈이야. 네 이름은? ”





  ….





  “ 루에르. ”





  난 뭔가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서도. 내가 줄곧 꿋꿋히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건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란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나 혼자였으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나는 잠시동안 과거의 눈이 멀어 미처 보지 못했던걸지도 …. 나는 역시 바보였던건가, 날 위해서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의 얼굴을 채 바라보지 못할 것 같아. 내 혼자만의 힘이였다면 절대 불가능 했을 일들을, 그들의 도움으로써 실행헤 옮길 수 있었다는 생각을 망각한 나의 대한 화가 한순간에 피어 오른다.


  ' 난 혼자서 이런 곳에 온게 아냐, 모두, 모두의 힘으로 인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아무 것도 모르는, 아무런 지식과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무책임한 녀석으로 남아 잇을 날 위해 그들의 희생이 있었어. 나는, 그들의 희생을 못 본 척 넘어갈 생각이었나? '


  잊지 말아야 한다. 내 목적이 무엇인지,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고, 그것을 마무리 짓기 위해 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나는 그 갈피를 잡아야 한다.


  〃드디어 생각을 바로 잡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말해봐라, 정말로 네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네가 바라는게 무엇인지, 말해봐라, 너의 대답은 무엇이지?〃


  무겁고 비장한 분위기가 주위에 소리 없이 흐른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는 언제부턴가 돌아오는 의식을 부여 잡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까지고 나는 이런 상황을 몇번이나 대면해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시간을 허비해가며 할 시간적 여유는 없다. 지금껏 내가 바라던 모든 염원과, 내 뒤를 묵묵히 따라와준 그들의 목소리에 나의 각오는 점차 짙어져만 간다.


  “ 자, 말해봐라. 너의 대답은 무엇이지?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건 대체 무엇이냐. ”


  …….


  "  … 거다. "

 

  〃­뭐?〃


  " 돌아갈거다. 네 녀석의 방해가 없던 그때로!! "




 이곳에 온지도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 끼이익 」

  

  모든게 낯설었다. 내가 기억 했던 세상과는 정반대의 세상.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었다.

  집 밖으로 나서자 낯 익은 얼굴의 한 노인이 시뿌연 입김을 내뱉으며 집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의 발 밑에는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지게들이 바닥에 살포시 놓여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온 몸의 소름이 돋았는지, 부들 부들 떨고 있던 어르신이 흘깃 내 쪽을 바라본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나를 발견한 어르신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묻는다.


  " 벌써 일어난건가? 아직 아침 해가 밝으려면 2~3시간은 걸릴텐데. "

  

  " 잠이 안 와서 일찍 나와봤습니다. "


  " 그런가? 하긴 그 나이 때는 피가 들끓는 시기니까. "


  " 오늘 할 일은 뭐죠? "


  " 오늘은 별거 없어, 그냥 간단히 산에 올라서 장작 몇개만 주워 오면 되니까. 어제처럼 그렇게 빡세진 않을걸세. "


  " 다른 분들은 …. "


  " 자칸과 라칸은 집에서 뭔가 챙겨 올게 있다고 조금 늦는다고 했고, 바론은 잠시 촌장 님이 불러서 촌장댁에 갔어. "


  " 촌장 … 님이요? "


  " 바론 빼고는 10분 후면 모두 올테니까, 우리 먼저 산에 오르자고. "


  어르신은 바닥에 놓여진 지게를 어깨에 메고는 자리를 뜬다. 나는 어르신이 들고 온 지게 중 하나를 등에 짊어지고는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사흘동안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정말 바람 같은 일들의 연속이였다.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음에도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 앞에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쿠피디타스를 봉인하던 그때, 내 앞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 여긴 …. "


  간지러운 산들바람이 나의 목을 간질이며 나의 의식을 깨웠다. 주변은 온통 푸른 빛을 띈 수풀들과, 어두어지려는지 시뻘건 하늘에선 광채나는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수그러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직감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은 내가 알던 그 세계가 아니라는 것. 방금 전까지 두 발로 디디고 있던 땅과는 다른 세계의 땅이라는 걸, 나도 모르게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산 아래로 보이는 낯 익은 풍경의 마을과, 그 뒤로 보이는 가슴을 조여오는 통증을 불어 일으키는 한 건물도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고, 나는 다시 한번 시간과 공간을 초월 했다는 것에 대한 눈물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산 아래로 천천히 마을 쪽을 향해 걸어갔다.

  전에 왔던 마을과는 사뭇 다른 냄새와 분위기가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라셀이 말했던 것처럼 이곳은 내가 전에 왔던 곳이 아닌, 그 이전에 있던 마을이였다는 생각이 자츰 내 머릿 속을 훑고 지나갔다. 아쉽게도 내가 원하는 세상, 즉 그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아니였지만, 내가 그토록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 부디, 내 딸 로라를 부탁하네. ”


  내 가슴 속에 맺혀 있는 붉은 악몽을 깨트리기 위해서다. 언제까지나 이런 한을 품고 세상을 헤쳐 나갈 순 없다. 과거의 속박에 계속해서 묶여 있다면 난 역시 파멸에 치닫고 말테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끈질기고 무거운 짐을 벗어나야 한다. 그게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며, 다른 이들의 내게 부탁했던 임무다.

  마을 안엔 사람들의 냄새로 가득했다. 내가 그 전에 방문 했던 마을과는 전혀 상반되는 마을이 나는 조금은 놀랍기도 했다. 파멸과 불운의 연속이였던 세상 속에 겨우 건전했던 마을 역시도 사람들의 추악한 모습과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눈물로 인해 고약한 악취를 풍겼지만, 이곳은 달랐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한치의 슬픔도 서려 있지 않는 듯 싶었다. 그들의 입가엔 반짝이는 보석이 달린 듯, 눈부시는 그들의 모습을 나는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제일 먼저 촌장댁으로 향했다. 마을 구조는 약간씩은 달랐으나, 그 이전의 마을과 현재의 마을의 모습은 거의 바뀐게 없는 듯 싶었다. 그 말은 즉, 이곳에 있는 촌장은 옛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 그렇다는건 이곳 촌장이 틀림없이 그 사람 밖에 없다는 생각에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촌장댁을 향하는 도중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얼굴에도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 마키 족인가 뭔가하는 부족과는 자매결연을 맺은 사이네. ”


  그때 어르신이 내게 말했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그렇다는건 정말로 옛날엔 마키 족과 이곳 사람들은 서로 상부상조를 하며 부족과 마을의 발전을 위해 서로 힘을 썼다는 결론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둘 중 한 곳이라도 균형이 무너지면 서로에게 불똥이 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하루 하루를 버텨나가는거겠지. 그렇지 않다면 이 마을 그 누구도 나를 견제하지 않는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분주히 움직이는 듯 싶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활기 찬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겨 촌장댁으로 향했다.

  촌장댁을 향하는 길은 전과는 달리 꽤나 고급스럽게 바뀐 듯 싶었다. 울퉁불퉁했던 길과는 달리, 노인분들도 쉽게 걸어갈 수 있도록 개선을 해 나간 모습이 두 눈에 딱 들어온 정도로 변해 있었다. 전에 란이 이 마을을 위해 해왔던 것처럼, 그의 자손 역시 그의 뒤를 따라 마을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다는건가 …,


  「 툭 」


  주변을 둘러보며 걷던 도중, 맞은 편에서 불안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던 누군가와 부딪쳤다. 무언가를 한아름 들고 있었는지,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분홍색 비단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무릎을 굽히고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는다. 그 모습에 잠시 멍청히 서 있던 나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떨어진 물건들을 주웠다.


  "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한 눈을 팔았네요. "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사과하는 나를 보며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 아니에요.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들고 왔더니 … 죄송합니다. "

  

  그녀는 되려 내게 사과하며 미안함을 표했다. 


  " 그럼. "


  그녀는 다시 한번 내게 고개짓을 하며 서둘러 어디론가 달려갔고,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피식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황급히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에게 왠지 모르게 낯 익음을 느꼈다. 

  그녀가 미처 보지 못하고 남겨 놓은 사각형 물체를 집어 들은 나는 슬쩍 뒤를 돌아 봤다. 하지만 이미 멀리 가버린 듯,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꽤, 중요한 물건 같았는데. "


  뭐, 나중에 만나면 다시 주기로 하고 일단은 촌장댁으로 가자.

  늦춘 발걸음을 다시 움직여 서둘러 촌장댁으로 향했다. 곧 있으면 해가 완전히 잠기고 어두컴컴한 밤이 될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갈데도 없는 내가 어디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촌장댁에 가서 도움을 요하고자 했다. 물론 그들이 쉽게 내 요구를 들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내가 알던 란이 있던 마을이고, 이 마을의 촌장을 잇는 자가 그의 딸이라면 … 거의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초행길은 아니였지만 왠지 모르게 가는 방향이 조금은 뒤틀린 것처럼 쉽사리 촌장댁이 보이지 않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미 오래 전에 촌장댁을 발견해야 했으나, 무슨 일인지 촌장댁의 모습은 커녕, 마을과도 동 떨어진 듯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한 공간에 혼자 떨궈진 것처럼 주위는 아주 고요했다. 나무에 가려져 희마하게나마 달빛을 의존해 걷긴 했지만, 그 달빛으로 사람의 모습을 찾기엔 조금은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설령 촌장댁을 찾지 못했도 일단은 마을에 가까이 갔으면 했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나는 조금씩 마을과 멀어지는 듯 싶었다.

  마을의 번창과 동시에 촌장댁으로 향하는 길의 보안이 더욱 더 철저해진걸까? 조금씩 몽롱해지는 기분과 함께 두 다리를 지탱하던 내 두 발이 조금씩 피로해지는 것을 느꼈다. 

  2~3초간 눈을 감고 걸으면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 같은 기분에 애써 졸음을 내쫓기 위해 애꿎은 두 뺨을 쳐내며 간신히 인내심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마을을 찾기는 커녕,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잠에 들지 모른다. 그리고 다음날 눈을 뜨고 일어 났을 땐, 생전 처음 보는 곳에서 아침을 맞을지도 ….


  「 털썩 」


  더 이상 힘을 낼 수가 없었는지 다리에 힘이 빠져 제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가뜩이나 앞도 보이지 않아서 순전히 내 감으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어서 더 걷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곳에 온 뒤부턴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 배는 고플 때로 고팠기 때문에 안 그래도 모자란 힘을 더 못 쓴 것 같다. 이대로 모든걸 놓고 잠을 잔다해도, 다음날이 되면 또 다시 눈을 떠서 마을로 향하는 길을 헤맬게 분명하다. 잠깐의 숙면 때문에 피로는 어느 정도 날아갈진 몰라도 공복감은 감출 수 없을거다. 그렇게 되면 나는 기력을 잃고 어디에서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벗어나야한다.


  「 꼬르륵 」


  물도 한 모금 못 마신 상황에서 배는 계속 꼬르륵거리며 밥을 달라 아우성을 친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에 나뭇잎 같은거라도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렇게 했다간 애꿎은 공복감만이 더 커질 것만 같다. 나는 혹시나하는 마음에 두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 봤지만, 역시나 아무 것도 없었다.


  " . "


  문득, 아까 전에 바닥에서 주웠던 물건이 떠오른 나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뭔가가 들어 있는지 흔들면 흔들 수록 뭔가가 있는 소리와 함께 내 식감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그냥 단순한 나무인지 알았는데 그 안에는 무언가가 가득 들어 있는지 감칠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론 먹을 수 있는거면 좋겠다시퍼 황급히 뚜껑을 열어 보았다.


  " ! "


  사각형 물건에 들어 있던건 다름 아닌 쌀이였다. 나는 그 안에 쌀이 있음을 알고는 주저 없이 쌀을 입 안으로 집어 넣었다.

  와그작 와그작 소리를 내는 여느 쌀과는 달리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하며 자연스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쌀에 또 한번 감동을 한 나는 이내 쌀이 든 물건을 그대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쉽게도 큰 포만감을 주진 못했지만 어느정도 기력 회복엔 도움을 준 것 같다. 나는 입가에 묻은 쌀까지 마저 씹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서둘러 다시 배가 고파지기 전에 마을을 찾도록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공복감이 줄어 들고 약간의 포만감이 생기자 발걸음에도 힘이 들어 있는 듯 싶었다. 그리고 조금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아까 만났던 그녀와의 기억도 새삼 머릿 속에 들어왔다. 

  그때 그녀가 품 안에 소중히 들고 갔던게 모두 쌀이였다는 것에 조금은 의아스러운 점도 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신분이 좀 높은 것 같던데, 대체 그녀는 어디로 그 많은 쌀들을 가지고 갔던걸까? 단순히 쌀을 어디론가 옮기는거였다면 그렇게 따로 따로 담아가지 않아도 됬을텐데, 아니 그보다도 그 무거운 쌀을 여자 혼자서 운반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만약 정말로 그 쌀들을 어디론가 운반하려는거였다면, 빠른 시간 내에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여자 혼자의 힘이 아닌, 건장한 남자 여럿이 동시에 운반하는게 더 빨랐을텐데.


  " …. "


  왜 그녀는 혼자서 그런 힘든 일을 자초했던걸까 ….  하필이면 그런 늦은 시간에 혼자서 말이야.

  그녀에 대한 의문을 품기를 몇분. 조금씩 바닥나는 쌀의 효능에 나는 다시 지쳐가고 있었다. 조금 포만감을 지니고 있을 때 한 발이라도 더 먼저 마을을 찾아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걸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계속해서 가던 길을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더군다나 걸으면 걸을 수록 희미해지는 시야 앞에서 점점 내 의식도 흐려지는 듯 하다.




  어둠의 장막이 걷힌 듯, 주위에선 새하얀 불빛이 나의 의식을 불러 들였다. 

  배고픔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길바닥에 쓰러져 버렸는지, 온 몸에선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 싸늘한 기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신 듯, 내 몸을 꽉 붙잡던 한기가 떨어져 나간 듯한 포근함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나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바람의 느낌은 아니였다. 따뜻한 온기가 가득 찬 사람의 손길, 가느다라하면서도 촉촉함이 느껴지는 그런 촉감에 잠시 정신이 돌아 온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본다.


  " 정신이 드시나요? "


  " 여긴 …. "


  " 제가 묵고 있는 방이에요. 움직일 수 있으세요? "


  낯 익은 얼굴의 한 소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그 소녀를 바라본 나는 몽롱한 정신이 바짝 경직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떻게 된거죠? 제가 왜 이곳에. "


  " 길바닥에 쓰려져 계신걸 제가 모셔 왔어요. "


  " 아, 감사합니다. "


  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 그런데 왜 그런 곳에 쓰러져 계셨죠? 혹시 누군가에게 습격이라도 당하신건가요? "


  " 아니요. 단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지쳐서 쓰러진 것 뿐이에요.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하진 않았어요. "


  " 그래요? 다행이에요. "


  그녀는 안도하며 방긋 웃는다.

  정신을 차린 나를 보며 그녀는 죽을 갖다 준다며 일어났다. 나는 깜짝 놀라며 그럴 필요 없다며 사양했지만, 그녀는 그럴 수는 없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종종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밖으로 나간 뒤 홀로 방 안에 남은 나는 멍청히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을 해보았다. 

  아까 그 소녀의 말로는 이곳이 자기가 지내는 방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보통 여자들의 방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경건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묵직한 느낌이 든다. 내가 살던 세상과 이쪽 세상은 조금은 다를지 몰라도, 여느 여자들 방과는 달리 사뭇 이상한 감이 없지 않게 풍겨온다. 더군다나, 여자의 방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규모에 할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 이런 곳에 혼자 사는건가? "


  족히, 집 한채가 들어갈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방의 넓이에, 나는 도통 방금 전 그 소녀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대체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였다.


  「 드르륵 」


  도무지 다물어지지 않은 입을 가까스로 다물자, 문을 열고 바삐 들어오는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상 위에 올려진 죽을 조심조심 내 쪽으로 들고 걸어왔고,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을 받기 위해 두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천천히 내 앞으로 상을 내려 놓는다.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죽에선, 군침을 자극하는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녹아 버릴 것만 같은 팥앙금과, 더불어 불긋한 빛을 띄는 모습에 나는 잠시 혼이 빠져 나간 듯한 얼굴로 멍하니 쳐다봤다.


  " 저희 마을에서 제일 맛있는 곳에서 갖고 온 팥죽이에요. 식기 전에 드세요. "


  그녀는 내게 숟가락을 건네주며 말했고, 숟가락을 건네 받은 나는 조심스럽게 팥죽을 한 숟갈 떠서 입 안에 갖다 넣었다.


  " 아, 뜨거! "


  너무 맛있게 생긴 바람에 팥죽이 뜨거운걸 잠시 잊은 나는 숟가락 위에 봉긋하게 올려진 팥죽을 후 후 불어 입 안으로 넣었고, 팥죽의 교유의 향이 입 안 가득 퍼지면서, 잠시동안 잔뜩 움추러든 몸이 팥죽처럼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입 맛엔 맞으세요? "


  "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팥죽에서 이런 맛이 나는지. "


  " 팥죽은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


  싱그러운 그녀의 웃음이 더욱 더 나의 식감을 자극했는지, 김이 피어오르는 팥죽에 뜨거움까지 잊었버린 채로 쉴 새 없이 팥죽을 떠 먹었다. 

  그릇 가득 차 있던 팥죽은 어느새 바닥이 보였고,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 한 수저를 뜬 나는 꽉 찬 포만감에 만족스러움을 느끼고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내가 식사를 끝마칠 때까지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소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 이곳에선 처음 뵙는 분 같으신데, 혹시 다른 마을에서 오셨나요? "


  그녀는 궁금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고,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입가에 묻는 팥죽을 닦으며 슬쩍 입을 열었다.


  " 아뇨, 그런건 아니지만. "


  " 그럼 … ? "


  " …. "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는 말을 이 소녀가 믿어 줄리 없고, 그렇다고 다른 마을에서 온건 더더욱 아니니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련 마을에서 이곳으로 워프된거니, 그렇게 되면 나는 아련 마을에서 온건가? 


  " 어디에서 온건 중요하진 않으니까, 말하기가 어려우시면 안 하셔도 되요. 단지 처음 뵌 분이라서 호기심에 물어본거니,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그녀는 애써 말할 필요는 없다며 미소를 짓고는 상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디에서 오셨든, 무슨 이유로 이 마을에 오신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여기서 묵도록 하세요.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고, 또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폐가 안된다면 당분간은 여기서 머물도록 하세요. "


  내 쪽을 보며 실실 웃던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나는 방금 그녀가 한 말이 내심 마음에 걸린다. 


  “ 자네, 갈데가 없다면 나랑 같이 가는게 어떤가? ”


  그때도 내게 그런 말을 한 녀석이 있었는데 … 왠지 그 소녀, 낯설지 않다.


  「 드르륵 」


  나 홀로 있는 방 안으로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전에 나간 그녀인줄 알았으나, 검은색 천을 몸에 두른 3~4명의 남자들이 나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안에 든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 손님을 정중히 모시라는 촌장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


  " 촌장님의 명이라면 …. "


  " 네, 이 마을의 촌장이신 로라 님의 말씀이십니다. "


  !





  “ 봉인을 성공하면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확실한거야? ”


  “ 물론, 진심이다. 너가 그 봉인을 성공하기만 한다면 분명히 너는 다시 과거로 갈 수 있어. 다만. ”


  “ 다만? ”


  “ 다시 간 과거는 네가 알고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일 수도 있어. 봉인은 단순히 그런 용도 밖에 쓰이지 않아. 자신이 사용 할 방법과, 누군가의 의자와는 상관 없는 본인 그 자체의 움직임이라면 너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거야. 그렇게 되면 네가 본래 가려 했던 곳과는 엇갈리게 될 수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큰거야. 그곳이 이곳이 될 수 있고, 그곳이 다른 세상이 될 수도 있으니까. ”


  “ 한마디로 도박이라는거네. ”


  “ 도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피해요소가 크지.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거야. 죽느냐, 사느냐.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권은 없어. 이대로 있는다 한들, 나아지는 점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저 우리들은 택하지 못할 선택을 해야 한다는거야. 그래서 그 선택을 내가 아닌, 너에게 맡기는거고. 어처피 나에겐 그럴 결정도 무의미해. 이건 네가 해야 할 선택이야. 만약, 너의 염원이 쿠피디타스에 담긴다면, 너는 기필코 그곳으로 갈 수 있을거야. ”


  “ … 결국, 나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는건가. ”


  “ 하지만 명심해. 어떤 상황이 닥쳐도 너는 절대로 주저 앉으면 안돼. 그렇게 됬다간 너는 물론이고 이 세상은 더 이상 가망이 없어져. 알겠어? 네가 멈춘다면 우리들도 더 이상 나아갈 기회를 잃는다는거야. 알겠어? 네 자신을 믿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거야. ”




  나는 정령,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내 소망이 이루어진건가. 단순히 운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운은 필시 나를 믿고 의지했기에 이뤄진거였나?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한치도 잊을 수 없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단순한 고통이 아닌, 극심한 고통으로 하루를 보냈던 내 앞에 드디어 그 끝을 맺을 수 있었다.


  “ 부디, 내 딸 로라를 부탁하네. ”


  그 남자와의 길고도 먼 약속을, 오늘이 되어서야 겨우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 그럼 가시죠. 촌장님이 계신 곳으로. "


  그들은 나를 호위하며 방 밖으로 나섰다. 나는 드디어 로라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도 흥분을 가라 앉힐 수 없었다. 


  " 이 복도만 지나면 촌장님이 계시는 곳이 나옵니다. "


  그들은 내 주위를 철통보안하며 나를 무사히 촌장이 있는 곳으로 데려간다.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한 그들의 모습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복도만 지나면 그토록 만나고 싶던 로라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른 생각은 수그러 들었다.

  복도를 지나자 그들이 말한대로 멀찍히 떨어진 곳에 낡은 듯하면서도 우직함이 느껴지는 방 한개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며 천천히 그곳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 촌장님, 모셔오라던 손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


  나를 문 앞까지 인도하던 한 남자가 문 앞을 서성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컴컴했던 방 안엔 조금씩 빛이 들어오며 이내 환해진다. 방 안에 고요히 앉아있던 누군가의 실루잇에 불빛에 비춰졌고, 빛에 그을린 검은 실루엣을 지닌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 오라는 듯한 손짓을 한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그는 슬쩍 나를 돌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좌우로 잡아 당겼고,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코를 찌르는 향내에 본능적으로 코를 막았다.


  " 대체 이런 곳에 누가 …. "


  미처 내 말이 끝나기 전에 그들은 나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뒤에서 대기하던 3명의 남자가 황급히 문을 닫고는, 뭔가로 문을 잠그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내 바깥에 있던 그들의 움직임이 조용해진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앞서 들어간 그를 보며 이게 무슨 일이라며 묻자, 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잠시 촌장님과의 대화를 누군가가 엿들을까봐 임시방편으로 문을 닫아 놓으거니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그는 이만 자리에서 물러 나겠다며 조용히 자리를 피한다.


  " 저, 저기 잠시만. "


  " 네 녀석인가? 함부로 내 마을의 발을 디딘 녀석이. "


  굵직한 목소리가 나의 고개를 움직인다.


  " 처음 보는 녀석인데, 네 놈은 누구지? 누군데 감히 내 마을에 들어온거냐! "


  낮으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붉은색의 비단옷을 입고 있는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나를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나를 노려봤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슬쩍 주위를 훑어 봤다.


  " 넌, 누구지? 분명 이곳엔 촌장이 있다고 했는데 …. "


  " 네 놈이 감히 누구한테 반말을 하는거냐! "


  " 시끄러워! 왜 아까부터 계속 소릴 지르는거야? 나는 분명 이곳에 촌장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왜 네 녀석 말곤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거야? "


  " 이 자식 …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 진정, 네 녀석을 부른게 누군지 몰라서 하는 말이냐? "


  " 촌장이 불렀다고 했다. 그런데 왜 너와 저 남자만 이곳에 있는거야? 촌장은 어딨는건데? 나는 촌장을 만나러 왔다고! "


  "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녀석이군 …. 너를 부른 녀석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몸께서 불러서 온거다. 그런데 감히 나를 두고 다른 이를 찾아? 대체 누구냐, 나 말고 이 마을에서 촌장 행세를 하는 녀석이! "


  !


  " … 뭐? 너 지금 무슨 말을. "


  " 네 녀석을 부른건 바로 나다. 감히 누구의 허락도 없이 이 마을에 함부로 들어 온게냐. 누구의 허락을 맡고! "


  " 네가, 네가 … 촌장이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 "


  " 아직도 나에 대한 예의는 찾아 볼 수 없는 녀석이군. 당장 이 녀석을 마을 밖으로 내쫓거라! "


  " 알겠습니다. "


  문 옆에서 대기를 하던 남자는 나의 어깨를 붙잡으며 나를 일으켰다.


  "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어떻게 네 놈이 촌장일 수가 있는거지? 이곳에 촌장은, 이곳에 촌장은, 네가 아니란 말야! "


  " 웃기는 소릴 하고 있군. 여봐라, 당장 그 녀석을 치워. "


  " 알겠습니다. "


  내 두 팔을 굳게 붙잡은 그가 나를 끌고 문을 향해 걸어간다.


  "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


  " 앞으로 이 마을에 발 디딜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아. 나는 마음이 넓어서 한 번 정도는 봐주는 편이거든. 하지만 다음번에는 그냥 넘어가진 않겠어. 죽지 않을 정도로 고문을 해서 너를 죽여 버릴지도 몰라. "


  " 이 자식 … ! "


  란, 이게 어떻게 된거냐 ….




  뭐가 어찌된건지 모르겠다.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온 나는 분명히 이 마을의 촌장은 란의 딸 로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뜻 밖에도 빗겨 나갔고, 이 마을의 촌장은 로라가 아닌 다른 남자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던 나는 발버둥을 치며 그 남자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지만, 그는 그런 나를 벌레를 보는 마냥 내쫓아 버렸다. 나를 그 남자가 있는 곳까지 데리고 가던 남자들은 하나 둘 내 팔과 다리를 붙잡으며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붉게 흘러 내리던 하늘이 어느덧 검은 색의 침묵을 띈다. 나를 붙들고 건물 밖으로 나온 그들은 그대로 나를 내팽개치며 안으로 들어간다. 나 같은건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말이다. 아무런 손도 못 써보고 바깥으로 쫓겨난 나는, 흙투성이의 손을 바지에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를 매몰차게 쫓아낸 건물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그 부지를 떠났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걸까, 내 생각대로라면 이곳은 내가 갈망 했던 이 세계의 멸망이 오기 전의 마을이 분명하다. 내가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간 마을과의 외관도 별로 달라진건 없다. 단지 그때보다 더욱 발전하여 그때는 상상도 못할 풍경이 보여졌다고 해도 이곳은 내가 찾던 그곳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달라질건 없었다. 지금 이 마을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자가 로라가 아닌 그 남자라는 점. 더불어 이곳에 있어야 할 로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 내가 사라진 이후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걸까. 도저히 머릿 속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분명 나는 이곳에 있는데 마음 한 구석이 공허한 것도 모잘라, 멍해지는 기분과 어찌 할 수 없는 방관하기만 하는 나를 멍청하게 바라 볼 수 밖에 없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깊고 그윽한 밤이 되자, 시끌벅적했던 마을도 어느세 고요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갈데 없는 나는 마을 주변을 돌아 다니며 이 상황을 어떻게하면 이해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품으며 이곳 저곳을 방랑을 하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낯 익은 얼굴의 소녀가 마을 입구에서부터 지친 발걸음으로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휴우, 겨우 일을 끝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그분에게 호되게 혼났을테니까…. "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걷던 그녀는 문득 자기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곤 발걸음을 멈췄다.


  " 어…. "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입모양을 띄었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는지 한동안 ' 어…. ' 란 말만 되뇌이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조금은 어색한 자리를 피하기 위해 그 소녀의 옆을 지나치려하자, 나의 왼팔을 붙잡는 그녀의 손길에 잠시 멈춰섰다. 나는 슬쩍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뭔가가 떠올랐다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한다.


  " 추운데 왜 밖에 나와 계세요? 혹시 절 기다리신건가요? "


  그녀의 물음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그녀는 이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나의 어깨를 툭 친다.


  " 어서 들어가요. 밤공기가 차요. "


  나는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그대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방금 전 쫓겨났던 그 건물 안으로 다시금 발길을 내딛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나를 반겨주는 따뜻한 온기에 사르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곳 날씨는 내가 왔던 곳과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내가 떠났을 땐 곧 겨울을 맞이할 바람으로 가득했고, 이곳 날씨 역시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 어깨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고, 나는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빨갛게 붉어진 뺨을 손으로 비비며 자리에서 앉았다.

  방바닥에 살포시 앉아 추위를 떨쳐내던 내 옆으로 그녀가 걸어온다. 그녀는 언제 들고 왔는지 모를 찻상을 바닥을 내려 놓으며 내게 찻잔을 건넸고, 찻잔 안에는 붉은 홍차가 가득 들어 있었다.


  " 따뜻할 때 드세요. "


  찻잔을 들고 멍하니 앉아 있던 나를 보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 이렇게 밤공기가 차가운 날엔 밖에 계시지 마세요. 요즘 감기는 무섭다고 하잖아요? "


  그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말하는 모습이 꼭 로빈의 모습과 겹쳐 보여졌다. 그리고보니 로빈도 내게 이런 말들을 했었는데….

  홍차를 머금고 잠시 생각에 빠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느낀 나는 입에 가득 들어 있던 홍차를 넘기며 슬쩍 찻잔을 내려 놓았다. 무릎을 꿇고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내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빈 찻잔에 다시금 홍차를 따른다.

  아무 대화 없이 한참을 홍차만 마시던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 이 마을에서 봤을 때 처럼 아름다운 색을 띄는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 소녀를 보며 생각했던 것처럼, 왠지 모르게 이 소녀는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지 무언가로 인해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 그녀는 내게 큰 힘이 될 것만 같다.


  " 그런데 여긴 어디죠? 밖에서 보니깐 보통 건물은 아닌 것 같던데…. "


  장시간의 침묵을 깨트린 나의 물음에 그녀의 눈빛이 갑자기 밝게 빛났다. 마치 내 말을 오랫동안 기다린 것 마냥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부담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 저 그런데. "


  " ? "


  " 요근방에선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어디에서 오셨어요? "


  " 네? "


  그녀의 반응이 이상하다. 분명 내가 이곳에 왔을 때도 지금과 같은 말을 했는데 …. 


  " 아직도 저에 대한 불신이 있으신건가요? "


  " …. "


  " 어디에서 왔든, 어떤 일을 하신 분인지에 관한 얘기는 묻고 싶은 생각도, 알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단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뭔가를 계속 끙끙 앓고 있는 모습을 보는게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에요. 누구시길래, 이런 곳에서 홀로 이곳 저곳을 방랑하며 쓸쓸히 돌아다니시는거죠? "


  나를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상 위에 놓여진 찻잔을 하염없이 쳐다만 보았다. 다른 이의 눈에 보일 정도로 나도 모르게 나를 무분별하게 노출시킨건가. 

  고요하던 분위기가 점차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자, 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가 벌떡 일어나서 어디론가 걸어간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듯 했지만, 이내 방향을 바꿔 가구들이 즐비해 있는 왼쪽 벽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한 서납장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슬쩍 내 쪽을 돌아보고는 조용히 내 앞으로 걸어온다.


  " 여기요. "


  " 이게 뭐죠? "


  " 별거 아니에요. "


  그녀가 내게 건넨건 다름 아닌 낡은 쪽지 하나. 꽤나 오래 전에 쓰여진 편지 같아 보인다. 


  " 이걸 왜 저한테…. "


  " 며칠 전의 한 남자가 절 찾아 와서 건네줬어요. 당신을 보면 건네 주라고요.  "


  " 나한테…? "


  건네 받은 편지를 조심스레 펼쳐보는 나를 보며 소녀는 은근슬쩍 자리를 비켜준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의문의 남자한테서 건네 받은 편지에 대한 궁금증이 속출함과 동시에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서 보내진 편지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한다.


  " …이건. "


  펼쳐진 종이 안에는 낯 익은 글씨체가 나를 반겼다. 그 안에는 뭔가 중요한 내용이 담긴 듯한 느낌이 느껴진다. 나는 천천히 편지에 담겨진 내용을 소리 없이 읽어 내려갔다.


  ‘ 네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무사히 이곳에 왔단 얘기겠지. 그 점에 대해서 나는 너에게 큰 경의를 표하는 바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네 힘으로 네 스스로 해냈으니 말이야. 역시 너를 믿는건 현명한 선택이였어. 그 누구보다 너를 믿는다는건 조금은 도박성이 섞인 선택이였거든. 잡담은 그만두고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알려주는 사실을 꼭 머릿 속에 기억하길 바래. 네가 처음 이곳을 온 후와 이 편지를 읽은 후에 심정은 어느정도 상상이 간다.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황당하기 그지 없겠지. 하지만 네가 본 그대로가 맞아. 이 세상은 네가 알던 세상과는 뒤바뀌어 있다. 원래 네 생각대로라면 이곳. 즉, 루에르 마을의 촌장은 그 남자가 아닌 란의 딸이였어야만 해. 당연히 그래야하는거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은 달라졌다. 쿠피디타스가 네 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네가 쿠피디타스로 인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 뒤부터 세상은 어느순간부터 틀어지기 시작한거야. 내가 너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세상이 이렇게 된건 모두 너 때문이라는거야. 지금 너로서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어처구니 없겠지만 앞으로 네가 볼 상황들을 일일이 생각해보면 내가 너에게 왜 이 말을 했는지 이해 할 수 있을거야. 다만 네가 이 말을 이해 했을 때는 네가 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다짐 했을 때겠지만 말야.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는 너에게 그리 복잡한 얘기는 할 수 없어. 단지 지금 당장 네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인해 머리 아파오는 너에겐 큰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지금 네가 알아야 하는건 이게 아닌 다른 곳에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의 너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진정 네가 알아야만 하는 일에만 전념하기만 해. 그렇게하다 보면 언젠간 네가 알아야 할 진실 중 하나를 발견 할 수 있을테니까. 나머지는 다음 편지에서, 그때까지 몸조심해. - 라셀 ’


  나에게 편지를 보낸건 다름 아닌 라셀이였다. 그는 내가 이곳에 무사히 도착할거라는걸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그가 내게 바라는건 편지에 쓰였다시피 아직까진 별로 내게 알려준건 없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난 뒤에 알려준다는 말 뿐이였다. 그렇다는건 라셀은 나중을 대비하여 미리 이곳에 와서 내게 건네 줄 편지를 몇 장 써서 이곳에 남긴건가? 그런데 왜 하필 이런 곳에 남긴 의도가 뭔지 궁금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안전한 곳도 아닌, 제 3자의 손에 남긴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 …. "


  그런데 그 말은 뭐였지. 로라가 이 마을의 촌장이 되지 못한 이유가 다 나 때문이라는게.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한 내 모습도 라셀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단건가? 하지만 왜지? 왜 그렇게 된게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걸까? 그날, 내가 쿠피디타스를 부수고 현대로 돌아온 뒤, 현대에 남아 정신을 추스리고 있던 나를 뒤로하고, 그곳에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속셈이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한걸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 ! "


  그리고보니 그때 라셀이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 시공의 균열? ”


  “ 그래, 시공의 균열. ”


  “ 그건 또 뭐야? ”


  “ 이름부터 뭐가 느껴지지않아? 말 그대로 쿠피디타스로 인해 잦은 시공을 이동하다보면 생기는 위험 같은거야. 원래는 한 번 시간이동을 하게 되면 약 한달간의 휴식기간이 필요해. 한마디로 시간이동이란 것 자체가 큰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주 사용하다보면 쿠피디타스의 능력이 떨어질 뿐더러, 쿠피디타스의 능력이 떨어짐과 동시에 일어나는 작은 위험들이 발생 할 확률이 높다는거지. ”


  “ 그렇다는건 쿠피디타스를 한달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괜찮다는거네. ”


  “ 대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냐. 우리 수색꾼들이 알아본 결과, 언제부턴가 쿠피디타스의 능력이 조금씩 퇴화하는 것을 볼 수 있어. 그 이유는 즉, 오랫동안 방치해놓은 쿠피디타스가 자신의 능력을 쇠퇴시키고 있다는거지. 그 말은 자주 사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제때 제때 사용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가 있다는거야. ”


  “ 그럼 어쩌라는거야? 이도 저도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하면 되는건데?”


  “ 그땐 그걸 사용하는거야. ”


  “ 뭘? ”


  “ 너, 사로이가 네게 그 돌을 넘긴 이유가, 내가 사로이에게 그 돌을 네게 넘기면 다시 그 돌의 능력을 부활 시킬 수 있다고 해서 넘겨준줄 알고 있지?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냐. 그 돌로 인해 망가질 수 있는 쿠피디타스의 시간을 제어함으로써 오랜시간 이곳에서 쿠피디타스가 자신의 능력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남을 수 있던 이유야. 지금 네가 갖고 있는 쿠피디타스는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서 시공을 움직일 순 있지만, 돌이 효력을 잃고 단순한 돌멩이로 남겨진 지금. 그 돌을 사용하는건 매우 위험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로이에게 네게 그 돌을 넘기라고 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야. 네 힘으로 그 돌을 갱생시켜. 그렇게만 한다면 넌 다시 그 쪽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넌 절대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 영영 이곳에서 그곳을 생각하며 제자리 걸음만 걸을테니까. ”


  “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지? 어떻게하면 그 돌을 갱생 시킬 수 있는데? ”


  “ 그 돌을 부활 시키는 방법은…. ”




  쿠피디타스의 봉인. 그걸로 인해 다시금 돌의 능력을 갱생 시켜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모두 라셀의 정보에 의존한 결과물 뿐이다. 하지만 라셀은 내게 말했다. 이 일을 헤쳐 나가려면 내 스스로의 힘이 필요하다고. 내가 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한거다. 지금에 나로서는 그 녀석을 찾아가 한쪽 뺨을 냅다 때려 버리고 싶지만…해야 한다. 해내야만 한다. 지금은 라셀이 말한 것은 뒤로 하고 지금 내게 제일 중요한 일들부터 차례 차례 풀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시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 하겠지만….


  " 왜 그러시죠? 그 편지에 이상한 말이라도 쓰여져 있었나요? "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보며 그녀는 살짝 위축된 듯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한치의 미동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소녀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저 소녀 뿐이라면 나는 그녀의 힘을 빌려 볼 생각이다. 그래 맞다. 이 세상은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 나갈 수 없어. 그 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버틸 수 없는 곳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누군가의 힘이 절실히 필요해.


  " 날…도와줄래요? "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라셀이 내게 그런 말을 한 의도와 어떻게하면 내가 이 고민을 떨쳐 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라셀은 내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단지 그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이 고난에서 벗어나라는 의도를 품은 그의 시커먼 뒷모습만을 남길 뿐, 그는 끝까지 내게 침묵을 유지했다.

  나를 순순히 도와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당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도 말하지도 않은 나의 부탁을 그렇게 쉽게 받아 들인다는건 조금은 의문스러운 점이다. 이 소녀는 다른 사람에 대한 꺼리낌이 남들보다는 덜 하는걸까? 아니면 그럴 정도로 나를 신뢰하는건지는 아직까진 모르겠다. 그녀의 진심을 밝혀 내기 전까진 그리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녀는 나를 도와준다는 이유 하나로 어디론가 나를 데리고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건 별로 없지만, 마을 서재로 간다면 어느부분은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미소에 나는 쉽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웃음을 보면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할까나, 한편으론 조금은 미심쩍은 그녀의 행동을 대놓고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 소녀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 드르륵 」


  서재의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서는 소녀.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는 내 앞으론 한 점의 불빛도 허용되지 않은 암흑 그 자체였다. 애써 들고 들어온 호롱불은 전혀 쓸모가 없을 정도로 그 안은 너무나도 어둬웠다.

  어느세 까맣게 내려 앉은 먼지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것처럼 꽉 막힌 시야와 갑갑해오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던 도중, 앞으로 거침 없이 나아가던 소녀의 발걸음이 멈춘걸 본 나는 뒤늦게 그녀의 뒤로 멈춰섰다.


  "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있는건가요? "


  나의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런게 아니라며 잠시 뭔가를 본 것 같다는 말을 하다 이내 말 끝을 흐리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그녀의 행동에 조금 의심쩍은 눈빛을 보냈지만 단순히 잘못 본거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 네, 그럴게요. "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녀의 대답에 당황한건 다름 아닌 나였다. 보통 낯선 사람의 부탁이라면 대놓고 거절을 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몇 초간의 고민을 해야 할텐데. 이 소녀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다. 

  나는 잠시동안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소녀를 바라봤다. 나를 도와준다는 소녀의 대답은 기쁘지만, 한편으론 꺼림찍한 기분도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이 소녀를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걸 어느정도 느끼기에 나는 소려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며 그녀에게 물었다.


  " 어떻게 그렇게 바로 대답할 수 있는거죠? 조금이라도 고민을 하고 이게 정말 옳은 선택인가하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나요? 그런데 당신은…. "


  " 그게 이상한가요? 전 단지 도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한 것 밖에 없는데요. "


  그녀의 반응도 내가 생각치 못했다. 이 소녀는 정말로 나를 도와주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나에게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이 아닌, 진심을 담아서 내게 대답을 해준 그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생겼지만 반면에 더욱 의심이 증폭되어 그녀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 제가 누군지 알아요? 저는 저에 대한걸 당신에게 말한 적도 없는데, 더군다나 저와는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저를 도와준다는 말을 하실 수 있는거죠? "


  따지는 듯한 나의 말에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당하다는 식의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그게 뭐가 중요하죠? 당신이 누구든, 뭘하던 사람이든 저는 별 상관하지 않아요. 단지 지금 당신은 이 마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손님이고, 저는 그 손님을 맞이하는 것 뿐이에요. 그런데 그 손님이 저한테 도움을 청하는데 제가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단칼에요. "


  " 제가 손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혹시나 제가 이 마을에 나쁜 짓을 하러 온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 "


  "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이곳에 발을 딛기도 전에 그들의 손에 죽었을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알 수 있어요. 당신은 절대 이 마을의 해를 입히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걸. 더군다나 당신은 이 마을의 해를 입히긴 커녕, 이 마을에 가득찬 악의 허물을 벗겨주러 왔다는걸, 당신은 이 마을을 그들로부터 구하러 와줬다는걸 말이에요. "


  " 그걸 어떻게 알죠? 제가 이 마을을 구하러 왔다는걸 어떻게 아냐고요. "


  " 그건…. "


  그녀의 말이 멈췄다. 말문이 막힌 듯 부자연스럽게 뚝 끊긴 대화의 흐름에 나는 고개를 한 쪽으로 돌려 씁쓸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뭔가 입 안 맴도는 무언가를 끄집어 내려는 듯한 고충이 보였으나, 쉽사리 입 안에 맺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지 깊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연다.


  " …느껴졌어요. "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느껴졌다니. "


  " 왠지는 모르겠지만…느껴졌다고요. 당신은 절대로 이 마을을 혼란에 빠트리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걸. "


  " 단지 그것 뿐이에요? 그것 때문에 나를 도와준다고 한거에요? "


  " …. "


  그녀는 이윽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 첫인상을 보고 느낀 감정에 휘둘려 순순히 나를 도와준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본 사람에 대한 믿음과 순진한건지 멍청한건지는 모르는 순수함. 대체 이 소녀는 나를 보고 무엇을 느낀걸까? 정말로 이 소녀는 내가 이 마을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걸까? 정말로 그녀가 나를 보고 느낀게 그렇다면…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이 소녀가 나를 보고 느낀 그대로를 내가 실천할 수 밖에 없는건가.


  " …. "


  이 소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전에 찾아온 이곳에도 이런 능력을 가진 녀석이 있었는데…역시 그 마을의 본질은 바뀌진 않았단건가.




  " 다 왔어요. 여기에요. "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던 소녀의 발걸음이 멈추자, 꽤나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책장 하나가 눈에 띈다. 여느 다른 책장들과는 달리 무거운 분위기를 띄는 책장을 보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 이 책들 중에 분명히 당신을 도와줄만한 정보를 가진 책이 있을거에요. "


  " 그럼 서둘러 찾아보도록 하죠. "


  " 아, 잠시만요. "


  책장을 향해 손을 뻗던 나를 보며 그녀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며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


  " 제가 깜빡하고 잊어 버린게 있는데, 잠시만 옆으로 나와 보세요. "


  그녀는 나를 옆으로 밀어 붙히며 책장 쪽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허리를 반쯤 숙이며 책장 2번째 칸에 손을 집어 넣으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손놀림으로 황급히 그 주변을 샅샅이 뒤적거린다. 그리고 한참 뒤에 무언가를 찾은 듯 한 손에 뭔가 묵직한게 들린 채, 그녀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운다.


  " 받으세요. "


  그녀의 먼지 투성이의 손에서 건네 받은건 다름 아닌 책 한 권이였다. 나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두 손에 들린 책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 ! "


  그녀가 건넨 책장 안에는 새하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 이건…. "


  " 그분이 쓰신 또 다른 편지에요. 만약 이곳에 오게 된다면 꼭 보여 달라고 하셨거든요. "


  그녀가 시뿌연 먼지를 툭툭 털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라셀의 두번째 편지라는건가? 그렇다는 말은 라셀은 내가 이곳에 온걸 미리 짐작이라도 했단건가? 나는 재빨리 책장 속에 끼어진 편지를 집어 들고는 서둘러 편지를 펼쳤다. 그 안에는 역시나 익숙한 글씨체로 내게 무언가를 알려 주려는 라셀의 말이 담겨 있었다. 나는 갑작스레 흥분한 마음을 서서히 가라 앉히며 조심스럽게 편지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아마도 네가 이 편지를 본다는건 네가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것과,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기대어 움직인다고 볼 수 있겠지. 둘 중에 뭐가 됬든간에 결과는 똑같다고 보고 첫번째 편지에 이어서 너에게 몇가지 부탁을 하려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네게 당부할 말이 있어. ’


  내게 당부할 말…?


  ‘ 전에 네가 이곳을 떠나기 전, 너에게 중요하다고 이건 꼭 명심하라고 했던 말 기억해? 쿠피디타스의 능력은 제한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무한하다는 것, 그렇지만 일정한도가 넘어가면 그 능력은 빛을 바랜다는거 말야. ’


  라셀은 무언가를 내게 말하려는 듯한 내용으로 나의 시선을 끌었다. 쿠피디타스의 능력은 제한적인 듯 싶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에도 어느 한 부분의 헛점이 존재한다.


  " ! "


  혹시, 그때의 그 말을 말하는건가?




  “ 쿠피디타스의 능력은 한계에 다다르지 않으면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어. 하지만 그 기간의 법칙은 꼭 따라 줘야지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고. 그러나 그 법칙을 깨더라도 그 돌의 능력만 있다면 언제라도 쿠피디타스는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어. ”


  “ 그렇긴하나 현재로써는 불가능하단 말을 하는거지? ”


  “ 빙고. 지금으로써는 택도 없는 말이지. 하지만 그 돌이 없다고해서 전혀 불가능한건 아냐. 단지 그만의 틀을 만들어서 움직이기만 한다면 이 점은 어떻게서든 개선할 수 있지.”


  “ 그만의 틀이라고? ”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기억해. 쿠피디타스는 예로부터 만물의 보석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 세상에 없는 능력을 갖고 있어.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시공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다른 쿠피디타스도 이러한 금쪽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하지만 이 능력에도 단 한가지의 오점이 존재하고 있지. 그건 말 안해도 알겠지?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만물의 보석이라고 알려져 있는 쿠피디타스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 했던 것과는 달리 마구 사용할 수 없으니 제 이름값을 하는거지. 그 말은 즉, 쿠피디타스의 시공의 능력이라는 것은 어떠한 틀 안에 갇힌 채로 한달의 한번씩 사용됨으로써 쿠피디타스의 능력을 보존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그로써 쿠피디타스는 변함 없이 그 모습 그대로 능력을 유지함과 동시에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거지. 하지만 그런 쿠피디타스에도 헛점이 있었으니, 한달의 한번씩 휴식을 취해야하는 쿠피디타스의 능력을 무언가의 힘으로 한달의 공백 기간을 가져야하는 틀에, 허점을 만들어서 잠시동안은 그 틀 안에 봉인되 있어야 하는 능력을 끄집어냄으로써 다시 한번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거지. ”


  “ 그럼, 그 틀을 깨부수는게 돌의 능력이였단건가? ”


  “ 그렇지. ”


  “ 그런데 그 얘기를 왜 또 다시 꺼내는거야? 그 얘기라면 전에도 했잖아.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 대체 내가 왜 이 말을 여러번 반복하면서까지 네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


  “ …? ”


  “ 너, 쿠피디타스의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 뭐? 그야…. ”


  “ 훗, 역시 아무 생각이 없는군.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꼭 기억하도록 해. 방금 전의 한 말은 이 말을 하려고 꺼내기 위함이니까. ”




  그때 라셀은 내가 이런 말을 했다. 


  “ 쿠피디타스의 능력은 제한적이지만 무한하고, 무한하지만 소모적이라는 것. 한마디로 힘의 크기가 커질수록 쿠피디타스의 능력은 쇠퇴한다. 더군다나 한달의 한 번씩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사용한다 한들, 그때의 힘의 크기는 모두 소멸된게 아니야. 조금씩 조금씩 쿠피디타스에 축척될 뿐이지. 그 말은 즉, 쿠피디타스를 계속해서 사용하다보면 언젠가는 쿠피디타스는 소멸된다. 단지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


  지금껏 쿠피디타스는 사용된 적 없는 본래의 모습 그 자체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멸망한 이후 몇 번이고 사용된 그 능력 앞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쿠피디타스는 본연의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쿠피디타스를 사용할 때 가해지는 힘의 규모가 클수록, 쿠피디타스의 퇴화는 점점 빨리 진행된다고 한다. 


  " …. "


  그렇게 된다면 나는 다시 현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되겠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쿠피디타스는 지금까지 짧은 시간 안에 총 3번의 시공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렇다는건 그동안 쿠피디타스에도 몇 번의 충격이 가해졌다는거다. 계속해서 쿠피디타스를 사용해서 과거와 현재를 혼동한다면 큰일일 뿐더러, 쿠피디타스를 하나 잃는 셈이 되니, 내 쪽에서는 큰 손실을 입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점을 보안시킴과 동시에 본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마키 족이 가지고 있던 수호신의 돌. 그 돌만 있다면 몇 번이고 쿠피디타스는 시간이동을 할 수 있다. 물론 힘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돌은 또 다시 평범한 돌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때, 또 다른 쿠피디타스는 봉인하는 도중에 빛을 발한 돌을 보곤 잠깐이나마 희망을 가졌지만, 이곳에 오자 돌연히 빛을 잃은 후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게 남은 기회는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짐작해서 알 수 있었다.


  ‘ 네가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오고 갈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내가 너에게 부탁하는 일들은 그곳에서의 첫번째 임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걸 유의하도록 해. 그럼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하나씩 알려줄게. ’




  「 끼 이 익 」


  자욱한 먼지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 있어요? "


  " 아니요, 사당엔 아무 것도 없어요. 금속으로 보이는 그 어느 것도요. "


  콜록거리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탄식을 내쉬었다. 이곳이라면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너무 그들을 얕잡아본걸까? 하지만 그들이 가져갔다는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들이 정말로 관련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을 뿐더러, 그저 내 추측일 뿐이라는 생각에 자괴감만 들 뿐이였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간게 아니라고 볼 수도 없다. 내가 이곳에 오기 이전에 그들이 먼저 가져갔을 수도 있다. 그 점에 대해선 라셀이 증명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내용의 편지를 썼을리가 없을테니까. 


  " 아직 할 일이 남은건가요? 아님 다시 한번 들어가서 찾아볼까요? "


  " 아뇨, 그러실 필요까지 없어요. 이미 너무 날이 어두우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날이 밝으면 그때 찾으면 되니까요. "


  나는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 뒤를 따랐다. 어찌된 영문인지를 모르겠지만, 라셀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그것들 안에 있을거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사라진 그것을 먼저 찾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음과 동시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나도 한 번쯤 대면하고 싶을 뿐이다. 


  " …. "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 내가 너에게 이 세상을 맡긴다는 부담스러운 말을 했던거 기억하지? 지금도 너는 내가 왜 네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을거야, 너에게 맨 처음 그 말을 했던 사로이도 그 사실은 모르니까. 하지만 나는 네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 이 세상과 그쪽 세상은 별로 다를게 없다는 것, 사실적으로나 비사실적으로나 이쪽 세상이 그쪽 세상이고, 그쪽 세상이 이쪽 세상인 것처럼 달라지는건 없어. 단지 그때 살았던 사람들의 피를 잇고 그들의 후손이 이 땅에 남는 것이니까, 한마디로 우리는 그 사람들과 함께 공존을 한다는 것과 매한가지인거지. 내가 왜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하냐면, 이래야만이 너에게 더욱 깊이 와닿을 것만 같아서야. 단순히 말하면 재미 없고, 그렇다고 너무 복잡하게 얘기하면 넌 나한테 화낼거잖아? 그러니까야,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면서 빙빙 돌릴 수 밖에 없는 것. 너에게 말해주고 싶은건 이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너는 더 힘이 들고 더 생각할 수 없게 될테니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생각보단 몸소 실천하는게 중요해. 이게 어떻게 된거고 이게 어떻게 해야만 풀리는 수수께끼 이전에, 왜 이 일을 풀어야하는걸까하는 의문. 나는 지금 너에게 묻고 싶어. 너는 왜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꿋꿋이 여기까지 왔는지를. 네가 어떻게하면 그렇게 묵묵히 왔는지를, 나는 모르겠지만 너라면 알 수 있어. 너에게 가장 중요한게 무엇이며, 네가 그쪽 세상을 가려던 이유를. ’


  라셀이 내게 한 말을 없었다. 단지 그가 끄적여낸 편지 안에는 나 자신이 해결해야하는 문제라며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를 지켜볼테니, 한 번 직접 이 문제를 풀어보라는 듯한 의도의 내용만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게 그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그는 그 많은 말들 중에 이 말을 했는지를. 그는 모르겠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가 내게 하려는 말을.


  " 결국…나한테 맡기는건가. 명색이 수색꾼이라는 자가 한낱 민간인한테 일을 떠밀다니…자격미달이군. "


  나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가 나한테 하려던 말. 즉, 내가 이곳에 왔어야만 하는 이유. 그건 다름 아닌 란과의 약속 때문이겠지. 그때 내게 남긴 란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어서, 그 녀석이 죽기 전 내게 했던 말을 잊지 않아서겠지. 그러나 내 안에서는 그게 답이 아니였다. 내가 왜 그토록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는지, 단지 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는 조금은 애매하고도 커다란 이유,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그게 아니였어. 나는 그저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뿐이야. 평화롭고도 평범한, 그리고 사람의 냄새가 가득한. 그런 세상을 원했던거야. 1년이란 세월이 지났어도, 그때와 지금은 너무나도 달라진 세상이라고 해도 돌아가고 싶었던거야.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지금껏 한치의 망설임 없이 움직였던거야. 그게 내가 바란 진짜 이유니까.

 

  ‘ 난 믿어. 네가 이 일을 멋지게 해낼 수 있다는걸 말야. 사실, 네가 아니면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은 없다는걸 알지만서도 왠지 알 수 있어. 너는 그럴 놈이니까. 하지만 명심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그냥 이루고 싶은 일은 격의 차이부터 크니까. 제일 먼저 선택해야할건 그거야. 넌 그 선택을 올바르게 행해야해. ’

 

  이것으로 라셀의 편지는 끝이 났다. 두 번째 편지를 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 저기, 혹시 그 사람이 저에게 또 남긴건 없나요? "


  " 아뇨, 그게 마지막이였어요. 그 뒤부턴 당신이 알아서 한다고…. "


  " 그래요…? "


  라셀. 넌 그 정도로 날 믿는거냐. 아무 단서를 주지 않아도 내 스스로 그 단서를 찾아 움직일거라고 생각했던거냐고. 원래 이 상황이 되면 네 말 뜻을 알고 내 스스로 움직이겠지만, 미안하게도 아직까지 내가 아는건 별로 없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과 네가 남긴 편지의 의도는 서로 상반되는 성격이니까.


  " 아, 그리고보니 그 분이 말씀하신게 있었어요. 그 편지를 보고나면 말해달라고. "


  " 그게 뭐죠? "


  " 검은…별이라고 했나? 아무튼, 검은 별을 찾으라고 그 분께서 말씀하셨어요. "


  " 검은 별? "


  " 네, 검은 별이라고 말해주면 아실거라고. "


  라셀이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 검은 별. 라셀은 무슨 의도로 내게 이런 말을 남긴거지? 


  " …검은 별? " 


  ! 

 기억났다. 




  “ … 쿠피디타스는 총 4개의 물체로 이뤄진 존재며, 그 4개의 물체가 하나가 되는 순간 그들의 본래의 모습으로 바뀐다. 우리들은 그 물체를 이렇게 부르기로 하였다. ”


  디 … 디시 … 디일 … 루? 라고 읽는걸까. 디시디일루, 대체 이 물체는 무슨 힘을 가졌길래 그런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게 되는거지? 나는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가던 도중, 책에 기재된 ' 쿠피디타스의 능력 ' 이란 머릿말에 시선을 멈추고 말았다.


  “ 쿠피디타스의 … 능력? ”


  구미를 당기는 듯 싶으면서도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을 불어내는 내용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눈으로 읽어갔다.


  “ 푸른 달, 붉은 태양, 검은 별. ”




  책 안에 적혀 있었다. 쿠피디타스는 본래 4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단지 그 모양이 구형을 이룬 물체지만 본래는 그 구형들이 하나가 되어 본체를 이룬다고. 그 본체의 이름이 디시디일루. 4개의 쿠피디타스가 이루어진 본래의 이름이다. 그 중에서도 푸른 달의 형상이 박힌 쿠피디타스. 즉, 시공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붉은 태양과 검은 별의 능력은 도중에 라셀이 말을 걸어 읽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 하나의 쿠피디타스가 더 있었다. 하지만 그 쿠피디타스는 무라는 말만 적혔을 뿐, 능력이나 설명 같은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작성자가 미처 필기하지 못했다고 보기에는 여간 의심스러운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왜 하필 라셀은 내게 그 말을 남겼는지, 내게 원하는게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아내는게 중요하다.


  " ! "


  검은 별, 쿠피디타스, 그리고 디시디일루. 푸른 달과 붉은 태양, 그리고 검은 별이 만나 하나의 형상을 띈다. 그 형체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모습이며, 그것을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한다. 


  “ ”


  그렇다는건 이곳에 검은 별의 형상이 박힌 쿠피디타스가 있다는건가? 원래대로라면 이곳에 있어야 할 쿠피디타스는 푸른 달이 각인된 쿠피디타스여야한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건 달이 아닌 별? 더군다나 이 마을의 촌장이여야하는 자는 다름 아닌 로라, 그러나 이곳에 있는건 처음 보는 남자와 그의 주위를 감싸는 4명의 검은 남자. 검은 별과 검은 남자. 검은 별과 4명의 남자. 쿠피디타스와 이들은 무슨 관계가 있는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마을의 촌장이 로라가 아닐리 없어!


  " 왜, 왜 그러세요?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셨는데…. "


  " 여기, 사당이 어디에 있죠? "


  " 네? 갑자기 사당은 왜…. "


  나는 그녀에게 설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황급히 서재 밖으로 달려갔다. 라셀의 말이라면 그곳에 쿠피디타스가 있을거다. 달빛에 비춰 검게 그을린 자국으로 남아있는 별의 형상을 말이다.




  오랜시간을 거슬러 다시 한 번 찾아간 사당 앞.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는 모습에 슬쩍 마음이 설레인다. 이 안에 라셀이 말한 검은 별의 형상을 띈 쿠피디타스가 있을거다. 만약, 이 안에 쿠피디타스가 있다면 그때 라셀이 말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봉인을 시도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한개 한개 봉인을 하다보면 언젠간 그 끝에 닿을거라고. 이번에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성공했다. 그렇다는건 두 번째도 성공할 수 있다. 마음 단단히 먹는거야.


  " 잠깐만요. 들어가시면 안되요! "


  긴장을 삼키며 문고리를 잡아 당기려는 순간, 그녀가 나타나 내 앞을 가로 막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매우 숨이 가빠오는지 헉헉거리며 나의 눈을 마주보며 사당 앞을 지키고 있었다.


  " 이 안으론 절대 들어가시면 안되요. 촌장님이 금한 장소라고요. "


  촌장? 


  " 마을사람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뿐더러, 외부인은 더더욱 들어가실 수 없어요. 만약, 이 모습을 촌장님과 관련된 분이 보시기라도 하시면 즉시 사형이라고요. 그러니까 어서 물러나요! "


  그녀는 도저히 내게 사당 안으로 발을 내딛는걸 용서치 않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내가 이 사당 안으로 들어가는걸 그 남자와 4명의 검은 남자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나겠지. 하지만 이렇게 꽁꽁 싸매어 놓은걸 보니 이 안에 쿠피디타스가 있는게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쓰러져가는 사당 때문에 그런 형벌까지 내리지 않을테니까.


  " …. "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이 앞을 뚫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내 앞을 굳게 막아선 그녀의 모습을 미처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도 내가 이 앞을 지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없을테지만. 


  " …. "


  그런데 쉽사리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가볍게 들리던 발목에 무거운 족쇄라도 채워 놓은 것처럼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 …. "


  저 소녀 때문인건가…. 




  그리고 이틀이란 시간이 지났다.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이 있던 나는, 그날 이후 다시 한번 사당에 찾아 갔지만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건 아무 것도 없었다. 자욱한 먼지 뒤로 보이는 제단만이 내 눈에 보일 뿐, 그 어디에도 쿠피디타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쿠피디타스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 다녔지만 역시나 쿠피디타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단서 하나 때문에 서둘러 내가 발길을 옮긴 곳은 다름 아닌 신사 앞. 예전에 내가 이곳에 왔을 때도 쿠피디타스는 이곳에 모셔져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향했지만, 미처 내가 생각치도 못한 일이 있던 뒤였다. 오래 전부터 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모신다는 신사를 누군가가 뽑아서 마을 밖으로 버렸다는거다. 더군다나 그 일을 시킨 장본인이 다름 아닌 이 마을 촌장이라는 것이였다. 이 마을의 안위와 평화를 지켜야하는 촌장이 그런 짓을 꾸미니, 마을사람들도 오죽하겠는가. 오랫동안 이 마을을 지켜준 신사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남들의 평온까지 산산조각 내버린 것에 대해 나는 큰 분노를 삭혔다. 지금 내가 이 마을을 위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나섰다간 나는 물론이며 이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을게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 밖에도 그녀는 내게 불평불만이 담긴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자신을 귀찮게 군다면 화를 넬텐데, 나에 대한 정보도 정체도 모름에도 그녀는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나의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그런 모습에 나는 점점 그녀에 대한 믿음이 커져갔다.

  「 드르륵 」

  오늘도 허탕을 치고 돌아온 나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드러 누웠다. 움직일 힘도 하나 남지 않은 나는 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봤다.

  " 오늘도 못찾은건가요? 마을이 작아서 그런 물건을 찾는건 그리 어렵진 않을텐데. "

  문을 닫으며 들어오던 그녀가 바닥에 누운 나를 보며 말했다. 

  " 이틀동안 찾아도 나오질 않는걸 보면, 누군가가 일부러 숨겨 놓은게 맞는 것 같군요. "

  " 숨겨요? "

  "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안 나올리는 없으니까요. "

  " 그럴까요…? "

  " …일단은 추측일 뿐이에요. "

  왠지 기운이 쭉 빠진다.

  " 그런데요. 전부터 궁금한게 있었는데. "

  " 뭔데요? "

  " 그 쿠피디타슨가 뭔가하는게 그렇게도 위험한 물건인가요? 저는 한 번도 그런 물건을 본 적이 없어서…. "

  그녀가 쑥쓰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 그때가 되려면 멀었지만, 그걸로 인해 미래는 엉망진창이 됬어요. 사람의 목소리도, 삶의 의욕도 잃어버린 말 그대로 지옥인 세상을. "

  " 지…옥이요?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후손은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거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암흑 그 자체의 삶을. 살아도 사는게 아니고, 먹어도 먹는게 아닌, 그저 무(無)의 세계. 나는 그런 곳에서 사람을 찾기 위해 지금껏 아둥바둥하며 걸어왔다. 그 덕분에 영원히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과의 만남을 할 수 있었고, 이 힘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도 알아갈 수 있었다. 그 점으로 보면 내게 이로운 점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 좋은 감정만이 남을 뿐이였다.

  「 똑 똑 」

  멀뚱히 바닥에 누워 곰곰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도중, 누군가의 노크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 또한 당황한 듯 허둥지둥하며 나를 서둘러 옷장 안으로 집어 넣었다.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4명의 검은 남자 중, 나를 그 남자가 있던 곳까지 안내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문 틈 사이로 들려왔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문 앞으로 달려갔고, 나는 조심스럽게 옷장의 문을 닫으며 슬쩍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들어오세요. "

  "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들어와도 좋다는 말에 그 남자는 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그 남자 단 한사람 뿐, 그 전에는 3명의 남자가 그 뒤를 쫄쫄 따라왔었는데…. 

  " 무슨 일이죠? "

  " 촌장께서 당신을 찾으십니다. "

  " 촌장님이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절 찾으시는거죠? "

  " 그건 저로서는 모르겠지만, 촌장님이 당신을 부르신건 맞습니다. "

  " 전 촌장님과 할 말은 없는데요? "

  " 그러지 마시고 순순히 따라오시죠. 촌장님의 명을 거스르는 짓은 무모하다는걸 잘 아시는 분께서 그러시면 안되죠. "

  " 전 안가요. 볼일이 있으면 그쪽에서 오라고 하세요! "

  살짝 화가 난 듯한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닫으려하자, 그 남자가 문을 막아서며 그녀를 노려본다.

  " 이러면 힘들어지는건 당신일텐데? 촌장님께선 인질을 데리고 계시다고. 네까짓걸 왜 촌장님이 살려뒀을거라 생각해? "

  " 당장 이 방에서 나가요. 빨리! "

  문고리를 두 손으로 잡아 당기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한 미소를 짓던 그 남자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는다.

  " 왜? 도망가고 싶어? 이 집에서 나가고 싶냐고.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도 되. 그 누구도 말리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명심할게 있어. 네 년이 도망가는 날에는 그 녀석들은 모두 끝이라고. 알아?! "

  그녀의 뺨을 후려치던 그 남자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방에서 빠져 나간다. 바닥에 주저 앉은 그녀는 욱씬거리는 뺨을 한 손으로 가리며 그 남자의 눈을 노려본다.

  " 그렇게 노려보면 뭐라도 될 것 같아? 웃기는 소리하지마. 어처피 너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해. 지금의 너는 무력, 그 자체라고. 너는 그냥 여기에서 촌장님이 하라는걸 하기만 하면 되. 쉽잖아? 다른 놈들이라면 그것보다 극심한 일을 주셨을텐데, 너란 이유 때문에 너는 이렇게 편히 먹고 잘 수 있는거야. 이런 특혜가 있는데 너는 고작 촌장님과의 만남을 거절하겠다? 이런 건방진 년이!! "

  「 탁 」

  " 그만해라, 한 번만 더 그랬다간 손모가지를 끊어버릴테니까. "
 
  " 넌 뭐냐? 뭔데 함부로 이 집에 들어온거야! "

  방 밖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는지, 그 남자의 심한 언행과 폭력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허공에 내지르는 듯한 그의 주먹질에 갑작스럽게 나타난건 의문의 주먹. 단 한 번의 주먹질로 인해 바닥으로 쓰러진 그의 얼굴엔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자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 괜찮으신가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하셨습니다. "

  " 다, 당신은…. "

  "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안색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

  누군가의 부축을 받고 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뒤로 낯 익은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나타냈다. 옷장 안에 쭈구려 앉아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라며 옷장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 라, 라셀?! "

  " 여~ "

  악당의 손에서 그녀를 구출하고 멋진 폼으로 들어온 자는 다름 아닌 라셀이였다. 어떻게 이 녀석은 무슨 일이 닥칠 때마다 짠하고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마치 누구와 짠 듯한 타이밍에 나는 살짝 라셀을 의심하는 눈빛을 쏘아 보낸다.

  "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네가 여기에. "

  " 못 올 이유는 없잖아? "

  " 못 올 이유는 없지만서도, 왜 하필 이런 타미잉에 맞춰서 나타나냔 말이야? "

  " 내가 안 나타났으면 이 분이 다치셨을텐데, 지금이라도 나타난게 다행이지. 어처피 너는 도와주지도 않았을거 아냐. 그 점으로 보면 내가 지금 나타난건 잘된 일이지. 안 그래? "

   " 그, 그렇긴 하지만…. "

  " 이야기는 나중으로 하고, 일단은 그 녀석 좀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

  " 이 녀석을?! "

  " 왜, 싫어? "

  " 싫은 이유는 없지만…. "

  " 그럼 데리고 들어와. "

  왠지 내가 이용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건 기분탓일까. 아무튼간에 그 녀석의 말대로 그 남자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나는 슬쩍 라셀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빨갛게 부어오른 뺨에 그녀는 슬픈 눈을 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라셀을 보며 나는 살짝 짜증 섞인 미소를 흘렸다.

  " 여기에 앉아 계세요. 촌장과는 제가 만나고 오겠습니다. "

  "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촌장님은 저와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

  " 몸상태가 안 좋다고하고 제가 다녀오면 됩니다. 그러니 여기서 안정을 취하고 계세요. "

  " …그럼 부탁드릴게요. "

  라셀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본다.

  " 따라 나와. "

  " 응? 아, 응. "

  순간, 라셀이 무섭게 느껴진건 내 착각이였을까. 갑자기 오한이 드네.
  방 밖에서 얘기할 줄 알았으나, 나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까지 나선 라셀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나를 쳐다본다.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쫄쫄 따라 걸어나온 나는 그의 시선에 살짝 위축된 모습으로 그를 쳐다봤다.

  " 어떻게 된거야? 마키 족은 어떻게하고 이곳에 온거야? "

  "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하는 말이 고작 그거냐, 하긴 그때도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았으니까. "

  라셀이 웃으며 말했다. 

  " 왜 그런거야? "

  " 뭐가? "

  " 왜 여기에 온거냐고. "

  " 내가 온게 싫어? 왜 아까부터 묻는 패턴이 똑같아. "

  " 내 의도는 그게 아니잖아! "

  " 그럼 네가 묻는 의도는 뭔데? 아, 혹시 이거 때문에 그러는거야? 걱정하지마, 나 한 사람 정도는 몇 번이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 "

  " 웃기는 소리 하지마! 그때 분명 네가 말했잖아. 그곳에서 가지고 온 쿠피디타스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능력을 사용하고 난 뒤, 한달간의 공백기간을 가진다고해도 그게 유효할지는 너도 잘 모른다고. 그게 두 번이 될지 한 번이 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왜 네가 이곳에 온거냐고! "

  " …그것 때문이냐. 그거라면 걱정하지마. 앞으로 몇 번은 더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것보다 의외인걸, 네가 날 걱정하다니. 이거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정돈걸? "

  능청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웃는 라셀의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때, 이 녀석이 말했던 대로라면 이제 그 쿠피디타스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몇 번 남지 않았을텐데…. 최악의 경우엔, 영영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 그런데, 용케 만났네. 내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빨리 만났어. "

  " 그게 무슨 말이야? 만났다니? "

  " 뭐야, 너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던거야? 아까 그 소녀가 바로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로라잖아. "

  !



  라셀의 입 밖으로 튀어 나온 말은, 잠시동안 나를 벙어리로 만들어 주었고,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라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 …그 소녀가, 로라였다고? "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이리도 가까이 있었음에도 나는 대체 어딜 향해 보고 있던걸까?

  " 말도 안돼…어떻게 이런…. "

  말이 다 나오지 않는다. 중간에 끊긴 말 뒤로 실 없는 나의 웃음만이 잔잔하게 흘렀다.
  그 뒤로 몇 분간은 라셀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염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동자로 흘러가는 구름만을 바라볼 뿐이다. 지평선 아래로 자츰 사라져가는 태양과, 그 뒤로 보이는 희미한 색의 달이 그의 뒤를 따라 올라온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나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 내리며 지나가자, 멍청히 하늘을 주시하던 나의 시선이 슬쩍 라셀을 향해 옮겨간다.

  " 그럼 넌 처음부터 알고 있던거야? 그녀가 로라라는걸. "

  내 물음에 라셀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응, 이곳에 온 뒤부터 줄곧 알고 있었어. "

  " 그런데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어? "

  "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로라를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은 너잖아. 그렇기 때문에 나는. "

  " 아니, 미처 생각지도 못했어. 이렇게 가까운 곳에 로라가 있을지는…. "

  " …. "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로라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몰랐고, 더군다나 나를 도와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로라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랄 뿐이였다. 역시 그때 느낀 느낌은 기분탓이 아니였어. 그녀가 로라였기 때문에 란의 모습이 비춰진거였어. 처음, 이곳으로 온 내게 란이 그랬던 것처럼, 부녀지간의 끈은 놓아지지 않았던거야. 내가 혼란에 빠졌을 때 란이 도와준 것처럼, 그의 딸인 로라 역시 나를 도와주려는거야. 처음보지만 낯설지 않은 이 느낌을 말이야.

  "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 "

  " 말 안해도 알아. 왜 그녀가 이 마을 촌장이 아닌지에 대해 묻고 싶은거지? "

  " …. "

  라셀은 다리를 살짝 꼬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때, 네가 이곳을 떠난 직후, 마우 마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

  " 이상한 일? "

  " 내가 전에 네가 부순 쿠피디타스가 다시금 생성 됬다고 말한 적 있지? 그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 설명을 못해줬는데. 사실은 쿠피디타스가 생성되기 이전에 있었던 전모를 알려줄게. "


 
  “루에르가 쿠피디타스의 힘에 이끌려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 란의 부탁을 받아 제 스스로 쿠피디타스를 깨트린 루에르가 그간 쌓였던 피로가 누적됬는지 힘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때 마침 뒤를 따라 올라온 수색꾼들의 눈에 띈 루에르는 다행스럽게 마우 마을로 향했다. 그와 함께 그 위에서 란의 장열한 최후를 지켜본 라셀은 무슨 생각인지 그들과 함께 내려가지않았다. 그러나 수색꾼들은 그런 라셀을 보며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축 처진 루에르를 부축해서 조심스럽게 마우리스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마우 마을로 향할 때쯤, 홀로 마우리스 산 정상에 남아있던 라셀은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며 방금 전, 마키와 함께 벼랑으로 떨어진 란을 찾기라도 하는 듯 힘겨운 그의 발걸음에 바람소리마저 애처로운 듯 쓸쓸히 불어온다. 벼랑 끝에 가까스로 멈춰선 그의 눈빛은 멍하니 낭떠러지 밖으로 머물렀고, 금방이라도 다시 란의 목소리가 들려올 듯한 기분이 들지만, 메마른 허공엔 바람소리만이 잔잔하게 흘렀다.

  " …결국 너마저도 떠난거냐, 그래도 너만은 무사할거라 생각했는데. "

  그도 란의 죽음이 믿겨지지 않는지 한동안 벼랑 끝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의 죽음은 그리 탐탁치않아. 아직 네가 마우 마을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대체 뭐냐. 이것으로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하지마. 너와 함께 이 아래로 떨어진 마키가 말했듯이, 너의 자손에게 큰 피해가 닿을거야. "

  그의 눈가에 자그마한 슬픔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이대로 울게 된다면 란의 죽음이 헛으로 끝나게 될테니. 

  " 그러나, 우리 수색꾼이 가만두진 않을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이름을 걸고 네 자손만은 꼭 지켜줄게. 어떤 일이 있어도 꼭. "

  그는 웃었다. 허탈함에 웃는 웃음이 아닌,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확신에 찬 미소였다. 
  벼랑 끝에서 무언(無言)의 약속을 한 라셀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곤 바닥에 싸늘하게 남겨진 쿠피디타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산산조각이 난 쿠피디타스는 더 이상 수호신이 아닌, 그저 하찮은 고철 덩어리로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심상치않은 기운이 흘렀다. 

  " 이대로 두고 가기엔 너무나도 아깝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해도 일단은 가져가는게 도움이 될테지. 더군다나 수색꾼들 누군가가 이 쿠피디타스에 대해 철저히 알아낸다면, 그건 우리 수색꾼들에게도, 이 세상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

  그는 바닥에 떨어진 쿠피디타스의 조각을 하나씩 주워 담아 자신의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다시는 오지 않을, 그의 모습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보였다. 

  " …언젠간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

  그의 웃음이 바람을 타고 그가 떠난 자리를 메꾸었다. 그의 말은 대체 무슨 뜻이였을까? 하지만 기어코 그 말은 란을 위로 하려는 의도가 담긴 말은 아니였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자신을 위로하려는 자기만의 위로법이였을지도….
  그날 밤, 영문을 모른 채 사라진 루에르 때문에 마을사람들과 수색꾼들은 혼란에 빠졌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방 안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던 루에르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였다. 그들은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혹시 마을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찾고 있는 루에르는 그곳에 없었다. 그들이 사라진 루에르를 찾고 있는동안, 현대로 돌아간 루에르는 현재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온걸 자책하며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걸 알 도리가 없는 그들은 날이 밝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그를 찾아 헤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헤매고 다닐 때, 아무런 행동도 없이 물끄러미 그들을 지켜보던 라셀은 한숨을 푹 내쉬며 슬그머니 촌장댁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전부터 마을의 기둥이 되었던 촌장댁 안은 싸늘한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본래 이곳엔 오랜 전통과 질서를 지키려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 즉, 이 마을 대대로 촌장이란 자격을 부여 받은 자들의 장소.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침묵으로 가득한 이곳엔 라셀의 발걸음만이 촌장댁에 울려 퍼졌다.
  라셀은 아무 말 없이 건물 안을 걸어다녔다. 그리고 이윽고 다다른 어느 한 방에서 머무는 듯한 그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앞으로 당기자 힘 없이 열리는 모습에 라셀의 한숨을 더욱 슬퍼진다.

  「 끼 익 」

  애처롭게 느껴지는 문소리가 라셀의 이목을 움직인다.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서는 라셀은 한적한 분위기가 맴도는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아른거리는 불투명한 시야 앞에 조금씩 불빛을 밝히는 호롱불이 어두운 방 안을 물들였다. 불그스름한 빛이 가득 채우자, 조금씩 그 빛을 받아 보이는 방 안의 사물들. 자그마한 테두리 안으로 조금씩 형체를 들어내는 것. 이곳엔 란의 형상이 담겨있다.

  " …. "

  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쓸쓸한 기운만이 감도는 이곳엔 그의 침묵까지 더해져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빛으로 가득찬 방 안을 서슴없이 돌아다니며, 이곳에 머물렀던 자들의 흔적을 뒤밟아본다.
  문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발자국으론 4번의 움직임이 닿은 곳. 작은 서납장으로 보이는 물체 하나가 라셀의 눈에 들어온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서납장을 꺼내며 그 안에 든 물건들에 손을 대본다. 이러면 안되는걸 알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 …. "

  물건의 정체를 본 뒤부터 라셀의 침묵은 그 무게를 더해갔다. 무어라 말할 수도 없고, 말한다고해도 변하지않는. 그런 결과를 알기에 그는 더욱 더 입을 닫았다. 그에 손에 들린 누런 종이 한 장만이 이 상황을 모두 설명해줄 뿐. 라셀은 슬그머니 방 안을 빠져나간다.
  마을은 아직도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조금은 수그러들은 듯, 그들의 모습엔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그들 사이로 유유히 지나가던 라셀은 근처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 수색꾼들 중 한 명에게 다가서며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을 그 남자에게 건넨다. 영문을 모른 채, 라셀의 손에서 자신의 손으로 종이를 건네 받은 그의 눈이 살짝 흔들린다.

  " 이건…. "

  그의 입술이 떨린다.

  " 뭔가, 알고 있는거라도 있어? "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눈동자에 라셀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 미안하지만, 나도 알고 있는게 없어…이미 오래된 사건이잖아? "

  바위에 앉아 아쉬운 탄식을 내뱉는 그를 보자, 라셀의 기대도 산산이 부숴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듯, 씨익 웃으며 그에게 건네준 종이를 돌려 받고는 또 다시 어디론가로 향한다. 앉아서 숨을 돌리던 그는 아무 말 없이 떠나는 라셀의 뒷모습을 보며 궁금한 듯 그에게 소리쳤다.

  " 어디 가? "

  그의 물음에 라셀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까도 그랬듯이 무언의 침묵을 지키는 그의 뒷모습에 그를 부르던 그 남자의 얼굴에도 금방 포기의 미소가 흘렀다. 그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가 향하는 곳을 주시할 뿐, 목적지는 모르지만 그가 향하는 곳엔 답이 있을거란 기대에 찬 확신일까? 아님 그 정도로 그가 자신에 찬 발걸음에 안심이라도 하는걸까. 

  " …. "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묵묵히 앞을 향해 걷던 라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묵묵히 지켜보는 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지금껏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서서히 열며 그 남자에게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간다.

  " 미래에서, 나는 미래를 꿈꾼다. "

  " …. "

  " 지난 과거를 후회하는건 부질 없는 짓이니까. 잠시 여길 떠나겠어. 얼마가 걸릴진 모르지만, 아마 다시 만나겠지.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말야. "

  그의 웃음엔 작은 별이 닿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긴 그의 웃음은 한 점의 악도, 한 점의 선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그는 그가 하고자픈 말을 했던걸거다. 다시 후회하지않도록, 후회한다면 나 자신을 버릴 정도로.
  라셀 주변에 동그란 물방울들이 대지에서 하나씩 올라온다. 하나가 두 개가 되고, 두 개가 세 개가 되던 물방울의 수가 점점 늘어날수록 라셀의 모습은 그 물방울 안에 갇혀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물방울과 함께 모습을 감춘 그의 모습은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 …미래인가, 녀석다운 말이야. "

  바위에 앉아 소리 없는 웃음을 짓던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라셀과 다시 만나는 날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 약속이 영원하다면…언젠간 닿을 날이 있을거라 본다. ”



  라셀이 내게 말해준 것,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자, 이 세상에 마지막을 위한 발걸음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나는 왜 이런 상황에까지 다다랐는지에 대해 묻고 싶을 뿐이였고, 그도 알겠다는 눈치를 보이지만 쉽사리 그의 말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만 라셀 자신이 한 종이 한 장을 들고 이곳으로 돌아온 뒤, 마키 족에게 찾아가 그곳의 서재를 빌린 것까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 하지만 이상해…네가 이곳에 있었다면 내가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널 볼 수 없었어. 네 말대로라면 너는 내가 그곳에 돌아온 뒤에 왔다면 널 볼 수 있었을텐데. "

  의심스러운 나의 물음에 라셀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 내가 돌아왔을 땐, 넌 이미 제정신이 아니였잖아?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내가 있는지 없는지 볼 경황이라도 있었어? "

  그는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라셀의 말대로 내가 그곳에 돌아온 뒤,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져 그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했을 때였다. 내 곁에 있던 로빈도 그런 나를 보며 많이 아파했는데…그런 시간동안 이 녀석을 이 상황들을 대비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잠시동안은 나와 라셀은 아무 말도 없었다. 차분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손등을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적막감이 찾아온 뒤에도. 말 없이 라셀의 옆자리를 지키던 나는 문득 궁금해진 사실 하나가 있다. 그가 이곳에 오기 전, 란의 방에서 찾은 종이 한 장, 라셀은 왜 란의 방에서 다른 것도 아닌 한낱 종이 한 장을 들고 이곳에 왔던걸까? 설마 그 종이 안에 란이 마지막으로 남긴 단서라도 있는걸까? 나는 슬쩍 라셀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 그 종이, 뭐였어? 네가 방에서 찾은 종이 말이야. 혹시…란이 남긴거야? "

  의문을 가진 나의 말에 라셀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란이 남긴 것 맞지만, 단서는 아니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는 왜…그 종이를 들고 온거지? 
  의아스러운 나의 표정을 묵묵히 지켜보던 라셀, 종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든지 그의 모습에서 머뭇거림이 보였다. 허나 라셀은 왜 자신이 그 종이를 가지고 왔는지, 왜 다른 것도 아닌 그걸 갖고 왔는지에 대해 내게 설명을 해주려는지 한참을 애를 쓰며 머뭇거리던 그의 얼굴에서 결심을 다진 듯한 모습이 보이며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 …옛날, 마우 마을에 한 사건이 있었어. 한 여자가 남편이 보는 앞에서 살해 당하는 사건이 말야. "

  라셀의 입 밖에서 나온 말은 충격 그 자체다. 왜 그가 이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지만, 라셀은 그 말을 계속 이어가려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그때의 나는 갓 수색꾼으로 들어온 신입이였으니까 지금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위에서 하라는 대로만 움직여야하는 몸이였지. 그런 내가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거야. 그 여자가 살해 당하는 모습을…. "

 

  “ 라셀은 오늘도 상부에 지시대로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을에 안전과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는지에 대해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햇병아리인 라셀은 신입답게 매사에 모든 일들을 열심히 처리하며 윗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라셀의 귀에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런다고 달라지는건 없어요. 이미 저는 이 마을사람이 됬다고요. "

  " 우스운 소리하지마. 너는 이쪽 사람이야. 너는 이곳 사람이 될 수 없다고!  "

  " 제 마음은 변치 않아요. 그만 돌아가줘요. 그이가 이 모습을 본다면, 큰일날거에요. "

  " 내가 그깟 녀석 하나 무서워할 것 같아? 단지 나는 너만 있으면 되. 너만 있다면 그런 고철 덩어리 따윈 신경쓰진 않을거라고. 나는 그저 너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야. 예전처럼, 후회 없는 삶을 말야. "

  " …미안해요.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어요. 그리고 당신에겐 후회 없는 삶일진 몰라도, 제게는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였어요. 이만 갈게요. 다신 절 찾아오지 말아주세요. "

  마을 구석 민가에서 들려오는 두 남녀의 대화에 자신도 모른 체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라셀은,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한 여자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벽 쪽으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녀는 라셀이 있는 민가를 지나친다. 그때 그녀의 눈가에서 작은 눈물 한 방울을 발견한 라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 …너, 날 무시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잔뜩 화가 난 듯한 목소리의 남자가 돌풍처럼 내 앞을 지나친다. 천천히 앞을 걷던 그녀를 향해 달려가던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붙든다. 이윽고 허리춤에서 뽑아든 단검 하나를 그대로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수직낙하, 붉은 빛을 띄며 허공을 향해 솟구치는 핏방울들. 이윽고 그녀는 힘 없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 너를 데려갈 수 없다면…이곳에서 죽여주도록 하지…나를 거역한 댓가가 얼마나 큰지…몸소 느껴라. "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향해 멈추지않는 난도질. 그의 손이 한 번씩 그녀에게 닿을 수록 그녀의 몸은 들썩거린다. 그녀와 그 남자 주변으로 붉게 변하는 땅 위로 그녀의 슬픈 눈망울이 부서진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고 있는 라셀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생전 처음보는 살해장면에 겁을 있는대로 집어 삼킨 탓인 듯 싶다. 하지만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공포에 짖눌린 눈동자가 아닌,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짐승의 눈빛으로.

  " 너…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냐. "

  그때였다. 어디선가 낮으면서도 굵직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 남자의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이내 피로 물은 단검을 쓰윽 들며 그 남자를 향해 씨익 웃는다.

  " 이제 온건가? 웬만하면 기다려주려고 했지만, 알다시피 내 성격이 급해서 말야…어쩌다보니 일이 이렇게 되버리고 말았네? "

  " 지금…무슨 짓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

  그의 얼굴이 경직됬다. 충격에 휩싸여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였다. 그 모습이 마냥 재밌다는 듯한 그 남자의 웃음에 그의 표정을 더욱 더 굳어져 갔다.

  " 보다시피 내 동료를 죽이는 중이다. 내 동료를 내 손으로 죽이겠다는데 네가 무슨 참견이지? "

  " …그녀가 왜 네 동료지? "

  " 벌써 까먹은거냐? 네 녀석이, 나한테서 이 녀석을 빼앗아간 것을. "

  " 난 뺏어오지 않았다.…그리고 그녀를 보낸 것도 너였다. "

  " 난 이 녀석을 네게로 보낸 적은 없다. 녀석이 혼자가 된 것을 틈 타 이 마을로 데려온건 너잖아? 그런데 네가 뺏어간게 아니라고? 웃기는 소리하지마! "

   " …그녀는 울고 있었다. 차마 나는 울고 있는 그녀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싶었다. "

  " 뭐, 치유? 하핫,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네까짓게 어떻게 이 녀석의 마음을 치유해준다는거지? 더군다나 이 녀석은 아주 건강하다고. 그런 녀석에게 무슨 치료를 해주겠다는거냐? "

  " …마음의 상처, 그 상처가 덧나고 또 덧나 더 이상은 치료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을텐데, 그저 그녀는 웃고만 있었다. 한시라도 자신의 주눅 든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숨기고 있던 아픔이 겉으로 표출될까봐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그 아픔을 잊으려 했다. 그런데, 동료라는 녀석이 위로는 못해줄 망정, 행복하던 그녀의 일상을 네 녀석의 손으로 더럽히다니…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너 같은 녀석을, 지금껏 자신을 함부로 대하며 멸시를 하던 너를, 그래도 동료라고 생각하던 그녀를, 너는 지금, 그녀의 진심을 더럽혔어…. "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모습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 남자가 있는 곳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그의 묵직한 몸뚱아리가 조금씩 그 남자를 향해 다가가자, 붉은 단검을 들고 실실 웃고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웃음기를 잃어간다.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던 그의 모습이 점점 거대해지자, 그 남자도 심상치않음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들고있던 단검을 허리춤에 집어 넣는다. 그리곤 반대쪽 허리춤에서 커다란 검을 뽑아 든다. 그가 뽑아든 검은 이 세상에 정말로 현존하는건가하고 착각이 들 정도로 매우 정교하면서도 커다란 크기를 가졌고, 그 검을 집어 든 그 남자의 얼굴에는 다시금 미소가 번지며 그의 자신감을 더욱 추켜세웠다. 하지만, 그는 놀라거나 떨려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눈에 보이는건 싸늘하게 식어 목숨을 빼앗긴 한 여자와, 그 여자의 행복을 무참히 짓밟은 악마의 형상을 띈 한 남자 밖에 보이지 않을거다. 더군다나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라셀의 정체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 …난 지금껏, 이렇게 화가 치밀어 오른 적은 처음이다. 그런 내가 이토록 화가 난 이유를 알려줄까. 네 녀석이 그런 놈인줄도 모르고 지금껏 네 녀석이 무사할까하고 걱정하던 그녀의 무지함에 화가 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나의 분노를 불지피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

  그 남자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노에 차마 그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그의 말을 못들은 그 남자는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말을 하던 그의 말문이 닫히고 잠시동안의 침묵이 유지됬다. 그때까지도 그의 눈에선 주체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그가 지나는 길마다 그의 비통한 감정이 섞였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워진 그 남자의 거리에서 또 한 번, 그 남자의 입술이 떼어졌다.

  " 그건 바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네 녀석 때문이다. "
  
  그 말이 끝나자, 한순간에 그 남자의 턱을 치고 허공을 가른 그의 주먹이 터져 흘렀다. 그 남자는 들고있던 검을 사용해볼 시간도 없이 그가 내질른 주먹 한 방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벽에 붙어 조용히 지켜보던 라셀 역시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그 남자는 제대로 한 방 맞은 것 때문에 시야가 흐릿한지 두 다리가 휘청거린다.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 남자는 방금 벌어진 일에 어이가 없는지 실실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며 그에게 말한다.

  " 이게…이 녀석의 무겐가? 꽤나 아픈걸…. 하지만 이 정도가 그 녀석의 무게였다면, 네놈도 그다지 녀석을 사랑하진 않았나보군. "

  제대로 자리에 서 있지도 못하는 그 남자는 허세를 부리며 그를 비웃는 마냥 말했지만 그는 아무런 미동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를 도발하려고 한 말이였겠지만, 웬일인지 그 남자의 도발은 그에게 먹히지 않은 듯, 그의 얼굴엔 아무런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던 그가 콧방귀를 뀌며 들고있던 검을 집어 던지며 그에게 달려간다.

  「 탁 」

  그를 향해 날아가던 검이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검을 뒤로하고 드리워진 그림자 안으로 그 남자가 들어온다. 그는 자신의 몸을 향해 달려온 그를 보며, 슬프면서도 증오심이 깃든 눈으로 그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며 말했다.

  " …그녀를 죽인 대가는 아직 멀었다. "



  “ 그 뒤로 계속된 그의 무자비한 공격에, 그 남자는 막을 겨를도 없이 양 쪽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민가 쪽에 숨어 이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던 라셀의 얼굴에도 식은 땀이 맺힐 정도로 그의 공격은 날코롭고도 무거웠다. 그의 눈가엔 주체 못할 눈물이 계속 흘렀다. 닦아도 닦아도 닦이지않고 점점 번져가는 그의 슬픔, 하지만 제 잘못도 인정을 하지 않는 그 남자의 모습에 그의 눈시울은 더욱 붉어져만 갈 뿐이였다. 하지만 그도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앞뒤불문, 머리 끝까지 차오른 화를 표출하며 내지른 주먹 사이로 번쩍이는 칼날, 그도 이미 그 남자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치의 미동도 없이 같은 모습으로 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미 그에겐 고통은 사치일테니까.
  수 차례 반복된 공격 끝에 그와 그 남자는 너무나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한시도 가만이 있질 않고 그 남자를 향해 움직였고, 피할 기운도, 그렇다고 맞을 생각도 없는 그 남자가 힘을 잃은 두 손에 들린 검으로 그의 주먹을 막으며 그에게 말한다.

  " 이 자식…아직도 날 공격할 셈이냐? 이미 너도 많이 지친 상태일텐데…. "

  그 남자도 지쳐있긴 매 한가지였다. 그 남자의 말을 듣기 이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계속 싸워봤자 서로 이득 볼건 없다는걸, 하지만 왜일까, 그의 주먹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저 지금 눈 앞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 할 뿐,  그의 주먹은 쉬지 않고 그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 탁 」

  그 순간, 지금껏 민가에 몸을 숨기고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라셀이 도저히 더 이상을 지켜볼 수 없었는지, 민가에서 튀어나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날아오는 그의 주먹을 힘겹게 받아치며 말한다.

  " 이제 그만둬, 이 이상 싸워봤자 너만 더 힘들 뿐이라고. "

  " …비켜라. "

  그러나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그의 얼굴엔 냉랭한 기운만이 서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라셀을 지나치며 바닥에 주저 앉은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채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약간 화가 난 듯한 눈빛으로 또 한 번 그의 앞길을 막아선다.

  " 비키라고 했다. "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위협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라셀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의 눈을 주시했다.

  " 내가 그만두라고 했다. "

  라셀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하자, 그의 얼굴이 더욱 더 찡그려진다. 이 모습을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남자는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려는 듯한 몸짓을 취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그가 라셀을 노려보며 당장 비키지 못하겠냐라고 소리치지만, 라셀은 묵묵히 그의 앞을 막아서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이 자리를 피할 수 있게 된 그 남자는 방긋 웃으며 자신을 도와준 라셀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한다.

  " 덕분에 하나 뿐인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됬군. 이 은혜는 나중에 갚도록 하지. "

  라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남자는 맞은 편에 세워진 울타리를 짚고 올라가 황급히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 너…이게 무슨 짓이냐!! "

  그는 마음대로 그 남자를 놓아준 라셀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고, 피할 겨를도 없이 공격을 허용한 라셀이 바닥에 뒹구르며 나가 떨어진다. 라셀이 쓰러진 주변엔 먼지바람이 날리며 바닥에 쓰러진 라셀이 휘청거리는 두 다리를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 톡 」

   먼지에 가려 뿌옇게 보이던 라셀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공격을 제대로 맞은 탓인지, 라셀의 코에선 빨간 액체가 코에서 흐르고 있었다. 라셀은 미간을 찌푸리며 오른 손으로 코를 닦아낸다. 그리곤 다시금 그가 서 있는 자리를 향해 걸어간다.

  " 이걸로, 만족하겠어? "

  " …뭐? "

  " 이 정도면 그 녀석을 놔준 대가로 충분하냐고. "

  " 너…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냐. "

  " 이러면, 그녀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냐는 말이다. "

  라셀의 말에 그의 말이 멈췄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라셀을 보던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소리 없이 대지로 떨어진다. 그의 앞에 멈춰선 라셀은 멀거니 서 있는 그를 보며 마저 말을 이어간다.

  " 너도 필시 느끼고 있었겠지, 이렇게 한다해도 그녀의 죽음은 달라지지 않는다는걸. 네가 그 녀석을 때린 이유도, 그 녀석이 그녀를 죽여서가 아니라, 네 자신이 그녀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행한 일이라는걸. 그들의 규율을 알고 있음에도 이 지경이 되도록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네 자신도 너를 제어하지 못했던거야. 이렇게 한다 한들, 변할건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

  " …그래서 마지막에 날 막은거냐. 그녀의 죽음에 먹칠을 하지 말라는 이유로. "

  " 내가 있다는걸 알고 있었나? "

  " 멍청하게 벽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더군. 웬만하면 그냥 넘어갈라고 했는데 너무 신경이 쓰여서 말이야. "

  그의 말에 라셀이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 하지만, 네가 한 행동은 현명했다. 잠시 이성의 끈을 놓고 제멋대로 행동한 내 앞을 막아서는 그 용기도 대단했다. 요근래 마을에서 자주 보이던데, 새로 온 수색꾼인가? "

  " 응, 며칠 전부터 이곳에 신세를 지고 있어. 내 이름은 라셀, 너의 이름은? "

  " 란. 란이라고 부르게. " ”



  " 그 남자가…란이라고? "

  " 응, 맞아. 그날 살해 당한 여자가 란의 부인이였어. 뭐, 형식적으론 부부가 아니였지만, 옛날엔 그럴 수 있었으니까…. "

  나는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라셀을 쳐다봤다. 라셀이 말한 남자가 바로 란이였다니, 더군다나 그때 살해 당한 여자가 다름 사람도 아닌 란의 부인이였다니…. 

  " 그럼 잠깐, 그렇다는건…. "

  " 그래, 그때 그 여자를 살해한 사람이 마키야. 그때 당시엔 마우린의 족장은 아니였지만, 족장인 아버지의 뒤를 따라 어느정도의 실세를 지닌 인물이였지. 그 때문인지 그 당시의 마키는 아주 잔혹하고 비열한 녀석이였다는 것 밖엔 아는 바가 없어. "

  그럼, 그때….

  “ 모든 일은 우리들로부터 시작됬다. 그 끝을, 우리에서 끝내도록 하자. ”

  란 말의 의미가 바로 그거였단건가…결국 란은 마키에게 복수를 했다는거군. 

  " 그 뒤로 나와 란은 죽은 여자를 데리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묻었어. 그녀를 묻는 내내 란의 얼굴엔 근심만이 가득 찼지.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어. 이미 벌어진 일이였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란에게 한가지 약속을 했지. "

  " 약속…이라고? "

  " ' 이번 일은 너와 나 둘만의 비밀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약속한다. 어떠한 일이 닥쳐도 5년 안의 그 녀석을 잡겠다. ' 라고…. "
 
  라셀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이 다시금 기억 속에 떠올랐는지 말 끝을 흐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셀 또한 란의 속박에 걸려 있는거구나. 단지 나 혼자만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도 나와 같은 마음이였어.

  " 다행히 그 약속을 지키긴 했었지만, 그 녀석은 잡은건 내가 아니라 란이였지. 결국 나는 그 녀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거야. 그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너의 도움이 필요한거다. 이 모든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나머지 쿠피디타스를 찾아내서 그들은 봉인 시키는 것 뿐. 다행히도 우리가 봉인 시켜야하는 2개의 쿠피디타스 중 하나인 검은 별이 이곳에 있다. "

  역시나, 검은 별은 이 마을에 있었어. 그때 라셀의 편지에 적힌 내용은 한치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았던거야. 하지만 그녀, 아니 로라의 부탁을 받고서 이리저리를 훑어보며 검은 별을 찾아 헤맸지만, 발견된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지금, 라셀의 눈동자는 유독 빛나고 있었다. 그는 안다. 검은 별이 어디에 있는지를.

  " 그렇지만 검은 별을 찾는다해도, 다른 쿠피디타스와는 달리 검은 별을 봉인 시키는건 유난히 버거울거야. "

  " 그게…무슨 말이야? 봉인하기가 어렵다니? "

  " 검은 별은 다른 쿠피디타스와는 달리 유독 특별한 성질을 띄고 있어. 전에 내가 보여준 책이 있었지? 그 책 안에 실려있던 쿠피디타스의 능력을 본 적이 있을거야. 현재 네가 가지고 있는 쿠피디타스의 능력은 시간이동, 그리고 네가 봉인 시킨 붉은 태양의 쿠피디타스는 빛과 생명의 능력을 띄고 있어. 그 쿠피디타스가 마을에 있다면 1년 365일동안 마을의 곡식은 해마다 풍년이며, 마을사람들은 무병장수를 할 수 있는 진귀한 능력이지. 그리고 우리가 찾아야 할 검은 별의 능력은 ' 디센트 ' 다. "

   …디센트?

  " 말 그대로 디센트는. 모든 일엔 순서가 있으며 그 순서를 따라야만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허나 이 섭리를 거스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자를 벌한다는 사신의 능력이다. 만일 이 능력을 사용한 자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반면에, 자기 자신이 죽은 뒤, 그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해가 간다는 아주 무서운 능력이다. 이 능력을 본 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 ' 사신의 족쇄 '. 대개는 이상한 병에 걸려 남은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지만, 그 중 소수는 그 병이 악화되어 빠르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달 안에 죽음에 이르지. 아마도 너도 이 병을 본 적이 있을거야. "

  " …내가 본 적이 있다고? "

  " 그 병의 증상은, 자신의 선조가 남긴 죄를 그대로 받는다고야 할까? 선조가 지은 죄, 즉, ' 검은 별의 능력 ' 을 사용한 것에 대한 형벌이 주어지지. 그 형벌은 매일마다 이 사실에 대해 후회한다는 것. 그 뿐만이 아니야. 자신이 해야만 했던, 자신이 차마 말 못했던 것을 떠올리며 왜 나 자신은 그런 행동을 보이지 못했냐며 자신을 자책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르지. 그래서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후회라는 이름을 따서 그 병의 이름을 지었다. "

  " …설마. "

  " 페니턴트. "

  !!

  " 그 병의 이름을 페니턴트라고 지었다. "

  그 말을 들은 직후, 나는 도저히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나의 발목과 어깨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혹은 목을 죄어오는 고통에 의식을 잃은 것만 같은 충격에 휩싸인 나는 흔들거리는 시야에서 라셀을 쳐다봤다. 두 손이 마구 떨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에 나는 그대로 입술을 깨물 수 밖에 없었다.

  

  “ 어느날, 날씨가 맑고 불투명한 구름이 하늘 위를 흘러갈 때쯤, 누군가의 긴박한 발걸음이 문 앞에 멈췄다. ' 똑 똑 ' 울려 퍼지는 노크소리에 안에서 잠복을 하고 있던 수색꾼들의 귀가 쫑긋한다. 한껏 경계를 취하며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걸어간 수색꾼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문 앞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였다. 

  " …누구지? 이곳은 우리 수색꾼들 밖에 모르는 곳일텐데. "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잔잔하게 그들의 공간을 가볍게 젖신다. 

  " …라셀을 만나고 싶네. "

  " 라셀…말인가? 미안하지만, 신원파악이 안되는 자를 이 안으로 들일 수 없다. 너는 누구지? 신원을 밝혀라. "

  단호하고도 명백한 그 남자의 질문에 살짝 머뭇거림이 보이는 누군가가 힘겹게 말을 꺼낸다.

  " …란이다. 어서 이 문을 열어주게. "

  " 란…? "

  문 앞에 멈춘 작은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란. 더군다나 십 년의 세월이 지나 마우 마을의 새로운 촌장이 된 그가 갑작스럽게 수색꾼들을 찾아온 것에 대해 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별 일 없던 그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라셀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니 말이다. 다른 이들은 이 일에 대해 의문을 품은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시선을 문 쪽을 향해 돌렸고, 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더니, 이내 철저하게 잠궈놓은 문을 열고선 조심스럽게 그를 안으로 들였다.

  " 고맙네. "

  그의 무뚝뚝하면서도 힘 없이 끊어지는 그의 말에 다른 수색꾼들의 눈초리가 심상치않게 변한다. 

  " 갑자기 무슨 일이지? 당신이 우리 수색꾼을 찾아오다니.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 "

  란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궁금한 듯하면서도 약간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란을 쳐다보며 물었다.

  " 마을엔 아무 일 없네. 다 자네들 덕분에 무사하지. 다만, 라셀에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것뿐이네. "

  포근한 미소로 답하는 란을 보며 그의 의심이 조금은 수그러든 듯한 모습으로 바뀐다.

  " 그런데 라셀은 없는 것 같군. 잠시 어딜 간건가? "

  " 라셀은 잠시 이 근방에 일이 생겨서 갔다. 아마 곧 있으면 돌아올거다. "

  " 그렇군…그럼 라셀이 돌아오면 이 말 좀 전해주겠나? "

  " 뭐지? "

  " 내가 급히 할 얘기가 있으니, 이 말을 듣는대로 ' 그 장소 ' 로 와달라고. "

  " 그 장소? "

  " 아마 라셀한테 말한다면 알걸세. "

  " 알았다. 라셀이 오면 말해주지. "

  " …그럼 이만 가보겠네. "
 
  란은 왠지 측은해보이는 모습으로 그곳을 빠져 나갔다. 뭔가 중요한 얘길 하려는 모양인지, 그의 얼굴에선 조금의 떨림이 보였다.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 남자의 얼굴에선 알 수 없는 근심이 보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이 있기에 그걸 표하진 않았지만, 방금 전 이곳을 빠져 나간 란의 얼굴을 보곤 무언가를 눈치 챈 듯한 얼굴이였다. 그는 란의 부탁대로 란에게 그 얘기를 해주기 위해 직접 라셀을 찾아 움직였다. 다른 수색꾼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지만, 역시 괜히 수색꾼이 아니라는걸 몸소 증명이라도 해주는 듯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를 바라봤다. 아마도 그들도 조금이나마 느꼈을거다. 왜 그가 이곳까지 왔는지를.
  그 뒤 라셀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는 가까스로 라셀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침 라셀도 일이 간단히 해결되어 곧장 그곳으로 오던 참이였다고 했다. 그는 란이 라셀에게 남긴 말을 빠짐없이 그에게 말해줬고, 란이 자신에게 남긴 말을 들은 라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던 길을 멈추고 서둘러 마우 마을로 향했다. 그 역시 느꼈을거다. 란이 자신에게 남긴 진정한 의미를.
  마우 마을에 들어선 라셀이 제일 먼저 향한 곳, 그곳은 몇 년 전 리키의 손에 의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여성이 죽은 곳이였다. 왜 란이 이곳으로 라셀을 부른 이유는 란과 라셀만이 알테지만, 그곳으로 불려간 라셀의 표정도 썩 좋지 않은 듯 보였다. 옛날에 있었던 끔찍한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는지 라셀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을 때쯤, 저 멀리서 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미 그는 라셀이 오기 이전부터 이곳에서 라셀을 기다린 모양인지, 꽤나 지쳐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비장해보이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의심스러운 란의 모습, 하지만 라셀은 그런 란을 경계하지않고 천천히 그의 앞으로 모습을 내보였다.

  " 지금 온건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일찍 와주었군. "

  " 일이 금방 끝나서 말이야,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나를 보잔 이유가. "

  " 부탁할게 하나 있다. "

  " 부탁? "

  라셀은 살짝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란을 바라봤다. 그도 그랬듯이 란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한 적이 없을 뿐더러, 웬만하면 자신의 손으로 일을 끝매듭 짓던 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한다는걸 놀라울 따름이였다. 더군다나 그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라셀이란 점도 말이다. 라셀은 조금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허탈한지 웃음을 지으며 란에게 묻는다.

  " 갑작스레 부탁이라니?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야? 아니면. "

  " 그런 류의 부탁이 아니다. 마을엔 아무 일 없고 설령, 있다해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나는 단지, 네가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답을 원하는거다. "

  " 뭐…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건 당연하다고 보는데, 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네가 나한테까지 도움을 구하다니…. 뭐야? 도움이라는게. "

  " 쿠피디타스가 있는 곳을 알고 싶다. "

  " 쿠피디타스? 그거라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갑작스레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

  그 순간, 란의 말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라셀이 황급히 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 너…설마. "

  " ……. "

  " 말도 안돼…갑작스럽게 무슨 말이야?! 너,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어떤 행동인지 몰라서 하는거야?  "

  "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여기에 있는 라셀, 그리고 다른 수색꾼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

  " 그런 녀석이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어? 그것도 나한테!! "

  " 너 밖에 부탁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더군다나 네 녀석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

  " 아니, 나라도 절대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너는 지금 악마와의 거래를 하려는거라고. 그런 너를, 내 스스로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라는거냐? "

  " 너는 그저 찾아주기만 하면 된다. 그 뒤에 일은 오직 나에게 달린 일이지. "

  " 안돼,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그런 짓을 한다는걸 용납할 수 없어! "

  " …친구로서의 부탁이라도 말인가. "

  " 절대 안돼, 아무리 네가 발악을 하고 나에게 협박을 한다 한들, 절대로 너한테 ' 그것 ' 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려주지 않겠다. 오늘 들었던 부탁은 없었던걸로 한다. 다음부턴 그런 부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라셀은 몹시 흥분한 상태로 그 자리를 떠났다. 란 역시 라셀의 모습을 보곤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는 모습이였다. 하지만 그런 란의 행동을 라셀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마키의 공격으로, 채 막아볼 겨를도 없이 자신의 눈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녀를, 그 또한 눈물을 삼키며 지금껏 버텨왔다는 생각에 라셀은 하염없이 한숨을 내쉬며 마우 마을을 빠져 나갔다. 그러나,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의 하나 뿐인 친구이자, 마우 마을에선 없어선 안되는 중요한 인물이 스스로 불나방이 되어 불 속에 뛰어 드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라셀은 가는 길목 내내 발걸음이 머뭇거렸다. 분명 자신이 한 행동은 옳았음을 알면서도, 한 편으로는 찝찝하면서도 허탈한 이 상황을 어찌해야할 바를 모른 채, 그의 묵직한 발걸음은 고요한 대지 위를 걸었다. 



  그 다음날, 마우 마을엔 또 다시 아침 해가 밝았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하늘 위로, 조용히 모습을 보이는 작은 구. 그의 움직임에 마우 마을에 하루가 시작된다.
  마을사람들이 분주히 아침을 맞이할 때, 마을 근처를 유유히 떠도는 라셀을 볼 수 있었다. 라셀은 어제부터 기분이 영 착잡한지 안색이 별로 안 좋았고, 아침부터 계속 한숨만 내쉬는 그의 모습에 다른 이들도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였다. 그러다가 문득, 라셀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갑자기 어디론가 성급히 달려간다.
  그가 허겁지겁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란이 묵고 있는 촌장댁, 문 앞에 당당히 서 있던 라셀의 얼굴에 사뭇 진지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는 천천히 문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러나 쉽게 문을 두들길 수가 없는지 조금의 망설임이 보인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다시 마우 마을을 찾았으며, 제일 먼저 향한 곳이 란이 있는 촌장댁이였을까? 과연, 그는 무슨 결심을 하고 있는걸까.

  " 이곳엔 무슨 일이지? 아침부터 내게 볼 일이 있는건가? "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라셀을 향해 누군가가 낯 익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돌린 라셀은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란 역시 어제부터 심경이 불편했는지 아침부터 마을 한 바퀴를 둘러본 듯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라셀은 란을 바라보며 아까부터 무언가를 머뭇거리고 있던 말을 조심스럽게 그에게 내뱉어 본다.

  " …어제 네가 내게 했던 말, 계속 생각해봤는데, 결국엔 이런 결론 밖에 나질 않더라고.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설마 안된다는 말을 하러 온건가? 그렇다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이미 나도 알고 있으니. "

  란은 피식 웃으며 라셀 옆을 지나쳤다.

  " …알려주겠다. "

  " …뭐? "

  " 네가 진심으로 나의 도움을 원한다면, 도와주겠다. "

  아까까지 무언가를 되뇌이며 쩔쩔매던 그의 입술이 가까스로 떼어지며 지금껏 참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그의 등 뒤에서 발걸음을 멈춘 란의 어깨가 서서히 움찔거린다.

  " …그 말,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섣불리 생각해서 짜낸 말이 아닌가? "

  " 너 역시, 섣불리 내게 그런 부탁을 했을 리 없을텐데…. "

  " ! "

  " 쿠피디타스가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 어처피 그것은 우리 수색꾼이 가지고 있을 물건은 아니였다. 원래 주인에게 물건을 돌려주는 것뿐, 나는 그저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이다. "

  " …라셀. "

  "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약속해라. 절대…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고…. 그 이후로 네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해도, 너는 꿋꿋이 참고 이겨내야한다는걸. 그렇게하지 않으면 너는 절대로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매일을 후회하며, 매일을 울부짖어도, 너는 절대 빠져 나갈 수 없어. 그럼에도 너는 그 능력을 사용할거야? "

  "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그때 그녀를 그 남자의 손에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만이 남았을 뿐,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

  " …알겠다. "

  부들부들 떨려오는 란의 손, 그것을 보고 있는 라셀 또한 긴장을 한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란과 라셀, 그 두 사람의 얼굴은 아까 전보다 편안해보였다. 하고 싶었지만 차마 시도해보지 못한 것, 하지만 그 시도를 누군가의 도움으로 인해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이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책임을 다 짊어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후회만은 남지 않을, 란과 라셀, 그 두 사람은 지금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어디론가 향했다. 이 이후에 벌어질 처참한 결말을 모른 채…아니, 알고 있음에도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이후에 생긴 일들에 대해 짐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

 

  라셀은 란과의 옛 이야기를 들춰내며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하였다. 목적지는 불분명하지만 라셀이 간다는건 분명 내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겠지. 궁금하긴 하지만, 라셀이 아무 말도 없는걸 보면 무슨 의도가 있을지도. 
  라셀의 뒤를 말 없이 따라오던 나의 눈에 낯 익은 풍경들이 펼쳐진다. 라셀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잿빛 산 앞, 그리고 그 옆으로 보이는 낯 익은 모습들. 나는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들에 조금씩 흥분을 늦츨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전에 로빈과 갔던 곳이였으니까. 
  아마 그때는, 사람의 행적을 찾아 이리저리 유랑을 하던 때로 기억한다. 사람이라곤 나와 로빈 단 두 명 밖에 없었고, 세상이 멸망한지 딱 1년하고도 며칠이 지난 날이였으니까. 운 좋게 주위를 걷다가 발견한 종이를 발판 삼아, 이곳 저곳의 지리를 파악할 겸, 우리들이 나중에 가야할 곳은 체크하기 위해 만든 엉성하지만 그래도 쓸모 있는 지도 한 장, 지난 밤에 불타오른 장작 하나를 연필 삼아 우리들은 이 세상을 도약하기 위한 첫 번째 발디딤을 시작했지. 그리고 이곳에서 마키 족을 만나고, 루에르 마을을 발견하고,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꽤 오래된 기억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얼마 지나지않은 시간이였단 말인가….
  그리고 또 한 번의 놀라운 광경, 수십 년 전의 세상인 이곳에 세워진 작은 건물 하나. 호수를 두고 저 들푸른 잔디 위로 잔잔히 모습을 감춘 모습. 라셀은 그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뒤를 따라 묵묵히 걸어오던 나 역시, 라셀이 향하는 곳을 돌아보니 당황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 건물이 여기에 있으며, 그 오랫동안 그 건물이 남아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꾸자꾸 든다. 그렇지만 라셀이 이곳으로 온 이유도 무슨 뜻이 있기 때문일거라 생각한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 끼익 」

  거칠게 열리는 문틈 사이로 자그마한 빛이 새어 나온다. 달빛과 직선 방향에 위치한 건물이다보니, 그 근처로 달빛의 기운이 제대로 발하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 잔디가 하얀 빛을 받으니 금빛으로 변하는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자, 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호기심이 깃든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문고리를 잡아 당기며 안으로 들어가던 라셀은 멍하니 잔디를 구경하고 있는 나를 보고는 나의 팔을 잡아 당기며 안으로 끌어 들였다. 자칫하면 넘어질 뻔 했으나, 운 좋게 자리에 우뚝 멈춰선 나는 슬쩍 건물 안을 둘러보며 라셀에게 말했다.

  " 여긴 어디지? 그냥 평범한 폐가는 아니겠고…. "

  신기하면서도 조금은 으슥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물 안은 웬일인지 한기를 품은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라셀은 그런 나의 물음에도 대꾸는 하지 않고, 무언가를 찾는 듯한 분주한 손길이 이곳 저곳에 닿는다. 다행히도 이 안은 달빛에 비춰 사물의 모습이 조금씩 형체를 보이기 때문에 뭔가를 찾기엔 수월해보였다. 
  한참동안 무언가를 뒤지던 라셀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집어 들었고, 그가 무언가를 발견한 것을 본 나는 조심스럽게 라셀에게 다가가며 그에게 물었다. 
  
  " 뭘 찾은거지? 아까부터 급히 찾는걸보니 중요한 것 같은데."

  그러나 이번에도 라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내 옆을 지나치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아까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를 보며 나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간다.
  낡은 책상 앞으로 걸어간 라셀은, 아까 집은 물체를 올려 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엇을 찾았길래 아까부터 라셀의 표정이 저리 안 좋은지 가서 묻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아까부터 이상한 라셀의 행동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대체 이곳은 어디며, 어떻게 이 건물이 현대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이 건물은 나무로 지은 이곳에 있는 여느 다른 건물과 다름이 없었지만, 나와 로빈이 발견한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현대식 건물이였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분명 이 건물은 무슨 연관이 있는게 틀림없다.

  " 라셀, 여긴 어디지? 여기가 어디길래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거지? "

  " …여긴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장소다. "

  " 비밀…장소? "

  " 수색꾼으로써 찾아낼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는 법, 그럴 때마다 나는 이곳에 와서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풀곤 했다. 어쩔 때는 이곳에 와서 편히 쉴 때도 있지만…. "

  라셀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웃음에선 쓸쓸함이 묻어 나왔다.

  " 나는, 나만의 장소를 만들기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 남들에게 피해 받지않고, 나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거든. 그래서 이렇게 작지만 아늑한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지. "

  " 네 말의 요점은 뭐야? 그런 얘길 하려고 날 데려온거야? "

  " 아니, 물론 이런 얘길 하려고 여기까지 온게 아니야. 원래는 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너에게 주려고 여기까지 왔지만, 왠지 이곳에 오니까 옛 생각이 나서 말이야…. 왠지 지금 말하지 않으면 평생 나 혼자만이 안고 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 그러니까 나보러 네 옛 이야기를 들어주란 말이야? "

  " 물론, 듣고 싶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단지 나는 네 녀석으로 인해 마음의 평온을 느끼고 싶을 뿐이야. 싫다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게. "

  " 아니, 상관 없어. " 

  " 뭐? "

  " 어처피 날이 밝기 전까진 아무 것도 못할테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거든…. "

  나는 슬쩍 라셀을 쳐다보며 말했다. 라셀은 의외에 대답을 한 나를 보곤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인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는 그의 얼굴엔 자그마한 기쁨이 보였다.

  " 이미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도통 머릿속에서 잊혀지지않는 한 녀석이 있거든. 이 건물도 그 녀석과 함께 만든거야. 나 혼자였다면 불가능 했을 이 작업을 그 녀석이 도와준거야. 덕분에 그 녀석과 힘을 합쳐 가까스로 이 건물을 세웠고, 나는 그 녀석이 도와준 답례로 이곳에서 그 녀석과 재밌는 생활을 했지. 그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쉴 공간이 필요 했던거야. 그러던 참에 나를 만난거고, 물론 그 전부터 그 녀석과는 친한 사이였지만 말야. "

  옛 생각에 잠긴 그의 입가에 작은 별들이 묻어 나는 것 같다. 반짝이는 달빛 사이를 조명 삼아, 그의 모습이 하얗게 변해간다.

  " 그 녀석은 내가 수색꾼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그런지 신참인 나를 골려 먹는 재미로 살았지.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금방 그 녀석의 장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내가 아까 전에 말했던 얘기 중에 란의 여자가 죽었다는 말이 있었잖아. 그걸로 인해 내가 계급이 올라갔거든. 웃긴 노릇이지, 나는 아무 것도 한게 없는데 갑작스레 계급이 높아졌을 뿐더러, 오랜시간 수색꾼에서 머물러 있던 그 녀석과 동급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더 이상한게 뭔지 알아? 그 녀석은 내가 자신과 같은 계급이 된게 기뻤던 모양이야. 순전히 그 녀석은 나를 골탕 먹일 생각으로 나를 약올린게 아니라, 하루 빨리 나와 같은 계급이 되어서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게 바램이였나봐. 그래서 그런지 상부에 명령 또한 그 녀석과 함께 다니는걸로 명령이 떨어졌거든. 그렇게 그 녀석과 같이 다니다보니 어느새 그 녀석과 친해졌지. 아, 전에도 조금은 친했지만 더욱 돈독한 우정을 가질 수 있었지. 아마 나랑 그 녀석이 생각하기론 그때가 아마 제일 기쁘고 행복했던 때라고 생각해. 그때처럼 이곳 저곳을 활보하며 다닐 순 없으니까…. "

  라셀이 말이 조금 흐려졌다. 웃으며 말을 이어가던 그의 얼굴은 조금씩 상념이 내려 앉는 듯 보였다.

  " 그러던 어느날, 상부에서 지시 하나가 내려왔어. 그건 바로 쿠피디타스를 사용해서 현재로 가라는 것, 난 깜짝 놀랐지. 그 녀석 또한 현재에서 온 녀석일 뿐더러, 내가 이곳에 오기 이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게 믿겨지지 않았거든. 나는 당연히 그 녀석이 이곳 사람인줄 알았지 뭐야. 하지만 별 상관 없었어. 그 녀석이 이곳 사람이든, 우리가 살던 현대의 사람이든, 아무 쪽이든 좋았던거야. 어처피 내가 지금 이 녀석을 만나고 있고, 내 옆에 있는 한 이 녀석은 절대로 내 곁에서 떨이지지 않는다란 믿음. 그 믿음을 나와 그 녀석 손에 하나씩 묶고 우리들은 쿠피디타스를 사용해서 현재로 향했지. 오랜만에 향하는 고향의 발걸음은 가벼웠어. 오랜시간을 비워둔 탓인지,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세상을 휩쓴 핫 아이템들, 돌아온 우리들에겐 한 마디로 경악을 금치 못할 일들이였거든.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기상천외한 일들을 뒤로 하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지. "

  " 본래의 목적? "

  " 응, 우리들이 현재에 온 이유는 과거에 존재하는 쿠피디타스가 현재에도 존재하는지에 대한 유무를 파악하기 위함이였어. 그래서 우리들은 일주일동안 여러 곳에 있는 쿠피디타스를 확인하고 다녔지. 다행히 쿠피디타스는 멀쩡하더라고. 우리들은 쿠피디타스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쿠피디타스를 사용했지. 그런데 그 녀석이 갑자기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더군. ' 너 먼저 돌아가, 나는 이곳에 할 일이 남았어. ' 라고. 나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윽박 질렀지만, 그 녀석의 얼굴을 보니 차마 뭐라 할 수가 없더라고. 뭐, 나 혼자 가더라도 돌아오지 못하는건 아냐. 잿빛 산 정상에 위치한 쿠피디타스를 사용해서 돌아올 수 있다는걸 확인했기 때문에 그리 악착 같이 안된다고는 못했어.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안 좋은 느낌이 든거야.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녀석을 데리고 오지 못한 이유는, 그 녀석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였어. 오랫동안 과거에 있던 탓에 동생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게 조금은 찜찜했는지 그 녀석은 동생만 보고 금방 오겠다며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냈지. 나는 끝까지 그 녀석을 데리고 가고 싶은 생각 뿐이였지만, 언제 다시 동생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올지 몰라서 그렇게 그 녀석을 그곳에 남겨두고 나 홀로 이곳으로 돌아왔지. 그때는 미처 몰랐어. 그 녀석이 동생을 만나러 간 날, 나 혼자 그런 그 녀석을 남겨두고 홀로 과거로 떠난 날이, 세상의 종말이 들이 닥친 날일지는…. "

  " 그렇다는건…설마. "

  " 그래, 그 이후로 그 녀석을 만날 수 없었고, 그날이 있던 뒤로부턴 쿠피디타스가 제대로 발동하지 않았지. 한 마디로 나는 다시 현대로 돌아갈 수 없었지. 그 때문에 그 녀석 또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어. 그로부터 1년, 그리고 오랜시간이 지나 지금까지 그 녀석을 만날 수 없었어. 그럼에도 나는 줄곧 여기서 그 녀석을 기다렸어. 다시 한 번 나를 보고 방긋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 하지만 그 녀석은 오지 않았어. 영영 그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지…. "

  라셀은 소리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생생하게 돌아왔는지, 그는 몹시 슬퍼하는 모습이였다. 괜히 이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했는지, 라셀은 황급히 소매로 눈을 비비며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 그 녀석을 잃고, 아니 잃어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우리로서는 그렇다고 볼 수 밖에 없어. 이미 1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지금까지도 그 녀석이 나타나지 않는걸 보면 알 수 있지. 나는 이미 그 녀석을 포기했어. "

  " …! "

  라셀의 입 밖으로 나온 한 마디의 단어로 인해, 순간적인 분노를 느낀 나는 라셀의 멱살을 붙들며 그에게 소리쳤다.

  " …포기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마!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고 함부로 죽었다고 생각하는거야? 그 녀석이 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텐데,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이유가 있을텐데! 그런 그 녀석에게 하는 말이 포기? 포기는 그렇게 쉽게 하는게 아냐! 어디선가 무사히 있을거다. 어디선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며 나를 만나는 그날까지 묵묵히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찾고 또 찾아야지. 뭐? 포기? 나는 한 번도 너처럼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어! 만일, 만일 내가 너처럼 포기를 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나는, 나는…. "

  부르르 떨리는 입술 뒤로 감춰진 작은 슬픔과 혼돈. 지금껏 아무 탈 없이 잘 지켜온 나의 신념이 방금 전 라셀이 내뱉은 말 하나로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를 붙잡고 있는 두 손은 너무나도 꽉 쥐었는지 힘이 되려 빠질 지경이였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 녀석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뚫고 튀쳐 나올 말을 꾹꾹 참아내며 그 녀석에게 다시 한 번 말하였다.

  " 절대, 절대로 포기란 말을 쉽게 하지마. 네가 포기한다는 말을 내뱉을 때도, 어디선가 너를 기다리며 꿋꿋이 살아 남고 있을테니까. "

  나는 라셀의 멱살을 놓으며 밖으로 나갔다. 차마 밖으로는 표출할 수 없었던 화가 활화산처럼 분출하며 나의 몸을 하늘 위로 내던졌다. 쓸쓸히 불어오던 찬 바람이 어느덧 싸늘한 칼날처럼 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마저 나는 차마 울분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껏 그렇게 걸어왔으니까. 어디선가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라는 단어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포기하는 그 순간에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아픈 고통을 참아 내며 전진할 수 밖에 없다. 그게 내가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며, 그렇게하지 않는다면 나는 제대로 버텨날 기력조차 남아나지 않을테니까….

  

  " 포기란 말, 나도 그렇게 쉽게 하고 싶진 않았어. 하지만…. "

  라셀의 말이 멈췄다. 그도 그렇듯이 자신도 그러길 원한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맞던 아니던간에 포기란 단어는 내 마음늘 날카롭게 할퀴어 놓는다. 내 뒤를 따라 나온걸 보면, 라셀 역시 마음이 편한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잠시동안의 침묵, 그 뒤로 흐르는 적막감. 라셀은 꾹 다문 입술로 천천히 내 옆으로 걸어왔다. 그의 한숨이 허공을 향해 흩뿌려지고, 시뿌연 입김이 바람을 타고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간다. 방금 전까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일을 어떻게 진행할 것이냐의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 갔는데, 라셀이 내뱉은 그 한 마디 때문일까, 왠지 지금은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싶다.
  
  " 후우…지금 생각해도 난 너무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어. 그 일만 아니였다면 그 녀석도 몸성히 돌아올 수 있었을텐데…. "

  라셀이 가까스로 내뱉은 말이 더욱 더 나의 가슴을 조여왔다. 라셀도 나처럼 지난 일을 후회하며 지낸 것 같다. 전에도 느낀거였지만, 이 녀석과 나는 공통점이 있다.

  " 어쩔 수 없는 일이였잖아, 세상 앞일은 그 누구도 장담 못해. 점쟁이 역시 자신의 미래는 예측 못하는 듯이, 그도 그렇이 어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미래를 점지하겠어. 마음에 담아두지마. 마음에 담아둘수록 빈 자리는 더욱 커질 뿐이니까. "

  나는 라셀을 보며 안될 듯 싶지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 약하지만 그래도 거짓 없는 위로를 전했다. 마치 나 자신에게 위로를 하는 것처럼, 이 말을 건넨 나한테도 조금의 위로가 된 듯 싶었다. 하지만 나의 말의 라셀의 얼굴은 더욱 더 사색에 잠겼다. 나의 위로가 그의 마음을 그리 편하게 만들지 못한 것일까, 왠지 내가 더 씁쓸해져온다.

  " 날 위로해주는 마음, 잘 알겠어. 하지만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니였어. 그 일은 내가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질러버린거야. 순전히 그 녀석이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내 탓이야. 그건 누가 뭐라해도 변하지 않는 이유고. "

  라셀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내게 말했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팔을 본 나는, 그가 지금 내뱉은 말은 헛으로 한 말이 아닌,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이란걸 눈치채곤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니? "

  " 지금까지 세상의 멸망에 진위를 알기 위해 달려온 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세상이 멸망한 이유는 쿠피디타스의 폭주 때문만은 아니야. 조용히 세상에 잠들어 있던 쿠피디타스를 깨워 잠재되어 있던 그들의 능력을 개방,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쿠피디타스의 폭주. 그들은 순전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 세상을 멸망시킨게 아니야. 잠자코 있던 그들을 깨운 누군가로 인해 세상은 멸망했지. 그리고 그 멸망을 촉구 시킨 사람이 바로 나야. 내가 그날, 쿠피디타스의 폭주를 일으켰어. "

  라셀이 힘들게 꺼낸 말에 나는 잠시 충격에 휩싸인 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이 세상의 멸망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힘들게 걸어온 나날과 뼈가 으스러지고 포기란 단어를 몇 번이고 내뱉고 싶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음에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그것들을 힘겹게 이겨낸 나한테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였다. 하지만 라셀 또한 그 말을 꺼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는지, 나를 주시하던 시선을 거둘곤 긴 탄식과 함께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다. 나와 라셀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기나긴 적막감과 허탈함, 그 뒤로 밝혀진 세상의 종말의 진위. 그것은 단순히 쿠피디타스의 폭주만이 아닌 그 누구간의 재촉으로 인한 참혹한 결과, 그 결과를 촉구시킨건 다름 아닌 라셀, 그 또한 이 사실에 대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 싶었다.

  " 어떻게…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네가…. "

  힘겹게 꺼낸 말 또한 그리 길게는 가지 못했다. 말문이 턱하고 막힌 것처럼, 메마른 듯한 목구멍 뒤로 자그마한 모래알갱이들이 씹히는 듯한 찝찝함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 …미안하다. 이 말 밖에 너에게 전할 수 있는건 없어. 나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막을 수 없었다. 그의 고집도 있었지만, 내 내면의 있던 또 하나의 나 또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거야. 겉으론 안된다며 이 세상을 위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나 역시 한낱 인간에 불과했던거야. 그렇기때문에 더더욱 그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 이 세상은 나락의 늪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생명들이 꺼졌다. 그리고 지금 남은건 그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너와, 이 일의 전모를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말 못했던 바보 같은 나 뿐이다. "

  "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녀석이라니? 설마…너…. "

  그의 말 속에서 하나의 가시 같은 점을 발견했다. 이 일을 이렇게 만든건 라셀 혼자서만의 결정이 아니였다. 다른 누군가의 부추김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점을 콕 찝어내 그의 다그치며 묻자, 라셀의 얼굴엔 작은 떨림이 포착되었다. 잠시 고개를 떨구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모습으로 조용히 말문을 닫고 있던 그의 입이 조금씩 움직임을 보이며 슬그머니 나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 이 세상한 이유, 그건 지금까지 이어지는 악몽이였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마치 우리들이 시작과 끝이 이어진 길에 놓여진 것처럼 매번 반복될 수 밖에 없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날, 쿠피디타스의 폭주를 일으킨건 나 뿐만 아니였다. 이 일의 모든 결말을 말고 있었음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그의 욕망 앞에 나 역시 굴복할 수 없었다. "

  " 대체 누구야…누가 그런 일을 벌일거냐고! "

  " …마키의 손에 희생을 당한 그녀가 수 년만에 다시 부활했다. 그리고 그녀를 부활시킨건 나, 그리고…란이였다. "



  “ 그녀의 무덤 앞, 라셀과 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은 한껏 비장한 모습으로 오랜만에 그녀의 무덤 앞으로 걸어왔다. 앞장 서서 걷는 란과 그 뒤를 조용히 따라오던 라셀이 슬쩍 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하였다.

  " 이 모든 일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어?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 일을 저질른 것에 대한 후회는 없을거냐고! "

  라셀은 마지막으로 란에게 물었다. 그도 알다시피 이 일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였다. 더군다나 이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 벌어지는 악순환에 대해서도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의 선택이 그 여느 때보다 더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쿠피디타스를 들고 있는 란의 얼굴엔 이 세상을 짊어질 마지막 선택이 남아 있었다. 

  " 라셀, 전에도 내가 말했다시피 후회는 없네. 단지 그때 그 남자의 손에서 그녀를 지키지 못한 후회만이 남았을 뿐이라고. 이 이후, 이 세상이 어떻게되든 나는 후회 따위 하지 않겠네. 이미 나의 마음은 굳힐 때로 굳혔으니까 말이네. 그렇지만 한 가지 약속하겠네. 절대로 이 세상을 암흑으로 물들이지 않겠다고…내 이름과 이 마을의 촌장으로써의 이름으로 약속하겠네. 자네 또한 나와 약속해줄 수 있겠는가? 만약 내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면, 내 대신에 그녀를 지켜주게. 내가 그럴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꼭 좀 부탁하겠네. 나와의 약속,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한 약속, 지켜줄 수 있겠는가? "

  떨리면서도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 그리고 그의 말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라셀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럼, 너 또한 나와 약속해줄 수 있겠어? "

  " 뭐지? "

  " 절대…죽지마라. "

  " …. "

  라셀, 그의 말은 진심이였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라셀의 말에 란은 피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 약속하네, 절대 이 세상을 두고 나 혼자 떠나지 않겠네. "

  란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셀은 그의 약속에 조금은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으로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 약속이 정말로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라셀 또한 예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때 란이 보여준 미소가 머지 않아 핏빛에 물들지도 모른다는걸 말이다. 
  그 후, 란은 절대로 건들여서는 안되는 금단의 영역에 발을 디딛고 말았다. 오랫동안 곤히 잠들어있던 검은 별의 능력이 다시금 세상을 밝히자, 오랜 어둠 속에서 갈 곳 잃은 자의 모습이 점점 빛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오랜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란의 소원, 하지만 그건 시작의 불과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엄청난 능력을 사용한 결과, 나머지 쿠피디타스 역시 숨겨져있던 능력들을 방출, 그 결과, 그들이 예상했던대로 그들의 미래를 멸망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나긴 시간을 버텨온 그들의 능력이 너무 거대했던 탓인지, 그 일을 뒤로 그들의 능력은 사라졌다. 그 순간, 세상을 밝게 비추던 달이 조금씩 흐릿해지며, 그 일대에 있던 모든 것이 하나 같이 어둡게 물들어져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란과 라셀은 서둘러 그녀를 데리고 마을 밖을 빠져 나갔다. 다행히도 그 빛은 얼마가지않아 걷혔고, 이상한 일이 벌어질거라 생각했던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그들은 라셀의 뒤를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얼마 지나지않아 모습을 나타낸 수색꾼들의 기지,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한 수 많은 수색꾼들이 그들을 향해 걸어온다. 그때, 라셀과 란의 뒤로 보이는 낯 익은 모습, 수색꾼들은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오랫동안 수색꾼들과의 협력으로 인해 쿠피디타스에 대한 정보들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하였고, 몇 년 전, 마키의 손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탓에 그들은 좋은 조력자를 잃은 셈이였던거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살아 돌아왔고, 그 모습에 놀란 수색꾼들은 말을 잇지 못하며 라셀에게 달려가 이 일이 어떻게 된거냐며 하나 같이 그에게 물어본다.
  한참동안 이어진 라셀의 증언,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탄식과 근심. 하지만 그들은 별 탐탁치않게 느끼는 싶었다. 어처피 란이 라셀을 찾아올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며 이미 벌어졌다 한들, 달라질건 없다며 라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라셀은 그런 그들의 반응과는 달리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그는 슬쩍 뒤에 가만히 서 있던 그녀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지금껏 맡아 왔던 일들보다 고단할겁니다. 아마도 그 어느 때보다 더 힘겨울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우리들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합니까? "

  라셀은 대답을 바라는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조금은 난처해보였다.

  " 여기서 결정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당신이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때는 이곳도 모든게 끝이 나있겠죠. 그러니,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우리와 함께 헤쳐나갈 것을 약속합니까? ”

  라셀의 물음에 수색꾼들의 시선은 모두 그들을 향해 움직였다. 그녀는 단호하면서도 경건한 그의 말투에 잠시동안 곰곰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답을 하겠다며 그녀는 라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 약속합니다. 이제부터 저 ' 로라 ', 당신들의 협력자가 되겠습니다. "

  그녀의 대답에 온 수색꾼들의 입에선 환호가 퍼져 나왔다. 라셀 역시 그녀의 대답에 씨익 웃으며 축하의 환호를 질렀고, 그들의 모습에 조용히 잠자코 서 있던 란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퍼졌다. 
  그들은 시련에 닥쳤지만, 그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지금부터 앞으로 해야할 일들에 대한 실행을 옮겼다. 아무리 그들에겐 멀고도 긴 시간이겠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겐 1분 1초가 힘겨운 상황이란걸 그 누구도 잘 알고 있을거다. 물론, 란과 로라한테도 말이다. ”

  

  " 로…로라? "

  " 너는 란의 딸이 로라라고 생각했을거야. 하지만 란은 딸이 없어. 네가 그때 처음으로 왔던 과거, 즉, 한 마디로 그는 자손이 없었어. "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과 거짓, 그리고 그 진위를 알아갈 때마다 커지는 나의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나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 란과 나의 힘으로, 아니 순전히 쿠피디타스의 힘이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녀가 부활했지. 그리고 부활한 그녀의 이름은 로라, 지금껏 네가 찾아 헤매왔던 로라의 진짜 모습이야. "

  로라의…진짜 모습?

  " 란은 마을로 돌아가 마을사람들과 나, 그리고 수색꾼들의 축하를 받으며 로라와 혼인을 치르었다. 그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지. 그 누구보다 더 밝게 빛났고, 달의 영롱한 빛에 비춰 그들의 모습이 마치 천사처럼 보였어. 그렇게 란의 혼인식이 끝난 뒤에 나는 잠시 마을을 순찰 할 겸, 마을 주변을 돌다가 우연히 무언가를 발견했지. 그건 다름 아닌 반으로 나뉜 쿠피디타스였어. "



  " …반으로 쪼개진 쿠피디타스? "

  " 아마도 검은 별의 능력을 사용했을 때, 검은 별이 빛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 것처럼, 아마 다른 쿠피디타스도 그의 영향을 받아 능력을 잃은 걸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푸른 달의 쿠피디타스는 더욱 그랬지. 나는 쪼개진 쿠피디타스를 들고 기지로 향했다. 그리곤 상부에게 반으로 나뉜 쿠피디타스를 보여주며 이걸 어찌해야 하냐며 물었지. 그러자 상부에 계신 분들이 그러더군. ' 하나는 란에게, 하나는 우리가. ' 라고. 뭐, 란 역시 이 말에 찬성하는 듯 싶었고, 로라 또한 기꺼이 승낙을 해서 우리가 나머지 쿠피디타스의 조각을 갖게 되었지. "

  " 그럼 붉은 태양은 어떻게 된거지? 그것 역시 너희들이 가져간건가? "

  " 아니, 그건 그곳에 그대로 놔두었다. 우리한텐 그만큼의 쿠피디타스는 필요하지않을 뿐더러, 그녀의 부탁 때문에 붉은 태양은 그곳에 남겨두었지. "

  " 그녀의 부탁? "

  " 넌 아직 모르는게 많을테니 차근차근 하나씩 알려줄게. 사실, 그녀는 마우린 사람이 아니야. 비록 마키와 함께 마우린에 있었던건 맞지만, 그녀의 고향은 아련 마을. 그녀는 그곳에서 쿠피디타스에 관해 연구를 하고 있었어. 그러던 와중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마우린과 함께 살아왔고, 마키의 너무나도 가혹한 폭력 때문에 마우 마을로 도망쳐 나온거야. 그러다가 우연히 란을 만나게 되었고, 란은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지. 그 때문에 마키는 란에 대한 증오심과 질투심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된거고 말야. "

  로라는 본래 아련 마을에서 살았다고? 그렇다면 그때 내가 본 책의 쓰여진 그 이름은 동명이인의 이름이 아닌, 실제 로라의 이름이였단 말인가? 라셀의 말을 계속 듣다보면 내 머릿속을 뒤흔드는 혼란 때문에 제대로 서 있질 못하겠다. 하지만 이런 진실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점점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건만 같은 희망이 든다. 비록 이 일을 이렇게 만든건 라셀과 란이지만, 그들 덕분에 알 수 있게 됬다. 이 일의 진짜 전모를 말이다.
  그 뒤로 라셀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말해줬다. 그녀가 수색꾼의 창단자라는 것과 쿠피디타스에 대한 내용을 짜집어서 책으로 출판한 것, 그리고 그때 내게 보여준 책이 모조리 로라의 책이였다는 것을. 하지만 웬일인지 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왠지 그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일까? 하나도 몰랐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외로 태연했다. 그 때문인지 되려 놀라는건 라셀 같았다. 그는 내게 이미 알고 있었냐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난 정말로 모르던 일들이였다. 그렇기때문에 내가 받는 충격은 극에 달았고, 이 이상 더한 충격을 받는다 한들, 아무 문제 없을 것만 같았다.

  " 물론, 그녀가 마우린에 들어간 것도 쿠피디타스 때문일테니 그 부분에 대해선 긴 말 안 할게. 단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야. 내가 너를 이곳에 부른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앞으로 네가 모두들 대신해서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권유하기 위해 너를 여기까지 부른거야.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너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줄 생각이고. 이 모든 일은 오직 이 세상을 위해서, 이미 가망은 없어 보이지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다시 건재할 수 있을 미래를 위해. 그리고….

  라셀의 말이 또 한 번 멈추며 짧은 침묵을 보낸다.

  " 나와 란이 저지른 잘못을 네가 대신 선처해주었으면하는 작은 바램도 있다. "

  " 선처…라고? "

  갑자기 라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갑자기 선처라니, 대체 나보고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걸까?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라셀을 쳐다봤다. 그는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말을 이어간다.

  " 나와 란이 저지른 일을 너에게 떠미는건 미안할 따름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저질러야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야.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에서 우리들의 숨통을 조여 올거야. 그런 위험을 걸고 너에게 부탁하는거야. "

  " 그래서 나보러 어쩌라는거야…? 지금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판인데, 대체 뭐 어쩌라고? "

  " 물론, 다짜고짜 부탁하진 않을거야. 너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한 뒤 다시 한 번 부탁을 할 생각이야. 어처피 네가 이해하지 못한 일을 성공적으로 끝매듭 짓는걸 바라는건 무리니까. 그러니 꼭 들어줘, 아니 꼭 들어야만 해. 왜 이 이야기를 이곳에서 하는지, 왜 네가 알고 있던 과거와 지금의 과거는 다른지. 이 모든걸 안 뒤에 너는 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이런 생각을 하겠지. ' 나는 세상을 뒤바꾸겠다. ' 라고. "

  잔잔히 불어오던 바람이 급격히 날카로워지며 우리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간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떨림,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들이 닥칠 믿지 못할 일들에 대한 대책, 라셀은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입술을 천천히 떼어낸다.

  " 네게 알려줘야할 비밀들은 많고도 많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긴 시간이 걸리겠지. 물론 너도 알다시피 우리에겐 제한된 시간은 별로 없다. 지금 당장 시작한다해도 시간은 촉박하지. 하지만 이것만큼은 꼭 알고 넘어가야 더욱 이 일의 승산 여부가 갈린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 말을 꼭, 잘 듣기 바란다. "

  신중하면서도 긴장된 듯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온 몸의 신경을 그에게로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은 모두 나의 머릿속에 입력한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내가 그의 말을 다 들은 뒤, 과연 그가 예상한대로 나는 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할지, 아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지금의 생각 그대로 유지가 될지, 그건 한치의 순간에 갈라지겠지….

  " 제일 먼저 너에게 말해주고 싶은건 이거야. 물론 너도 내게 묻고 싶은거겠지, 왜 마을의 촌장은 로라가 아니라 생전 처음보는 남자냐는 것. 결론만 말하자면 그 남자는 로라의 아들이야. "

  …!!
  로, 로라의 아, 아들…?

  " 물론, 그 남자의 비해 로라는 너무나도 젊어서 이상하겠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간단해. 이미 로라는 한 번 죽었던 몸이며, 자신이 목숨을 스스로 끊기 전까지는 불로장생한다는 이유야. 왜인지는 설명 안해도 되지? 뭐, 필요하다면 말해줄 순 있어. 이 이유 또한 간단해. 그건 바로 검은 별의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야. 검은 별을 사용한건 란이였지만, 검은 별의 능력으로 되살아난 사람 역시 사신의 족쇄를 차고 말아. 그 때문에 그의 자손 역시 페니턴트에 걸릴 수 밖에 없지. 하지만 그 능력에 비해 늙지않고 오래 살 수 있다니 죗값치곤 상당하잖아? 뭐, 설명은 이 정도까지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원래는 네 생각대로 로라는 란이 죽은 뒤에 마우 마을의 촌장이 된다. 그리고 꽤 긴 시간동안 촌장의 자리에서 마우 마을의 질서와 규칙을 지키며 마을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기를 애썼지. 그 때문인지 로라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갔고, 마우 마을은 언제나 행복하고 화목한 나날을 보냈지. 뭐, 여기까진 평범해.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야. 너, 마키가 죽은 뒤 마우린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던거 기억나? 여기저기로 모습을 감춘 마우린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마우린이란 이름에 미련을 못 버린 자들이 다시금 마우리스 산에 올라서 그들만의 집단을 만들었지. 옛날 이름은 마우린을 버리고, 마우린의 족장이였던 마키의 이름을 따서 만든 ' 마키 족 '. 이것이 현재에도 존재하는 마키 족의 기원이야. 그리고 그 마키 족의 중심에 선 한 남자, 그의 이름은 ' 리오크 '. 악으로 찌든 마우린을 어둠에서 걷어낸 사나이의 이름이야. "

  리, 리오크…. 그래 잠시동안 잊고 있었다. 그 남자가 있었어.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로라와 리오크, 그들은 각 집단의 우두머리로 서로 공존을 하며 지냈다고 했어. 그렇기때문에 나 역시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그들이 있었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고, 그런데 리오크는 마키의 아들이 아니였단 말인가?

  " 그래서 그런지 리오크는 마우 마을로 내려가 지난 일들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일들을 도우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보물들을 나눠주며 그들과의 친분을 만들려고 노력했지. 마을사람들도 처음에는 그들의 등장에 잔뜩 몸을 움추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색다르게 변한 그들의 모습에 그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만거야.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마우 마을과 마키 족, 그 둘의 관계가 발전되는 계기를 만들었지. 그리고 그 뒤로는 안 말해도 알거라 믿고 바로 넘어갈게. 집단과의 소통이 많으니까 자연스레 로라와 리오크는 사이가 좋아졌지. 그 때문에 그들은 후에 혼인을 올릴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그리고 그때 리오크가 로라에게 건네준건 다름 아닌 쿠피디타스, 그리고 그 쿠피디타스는 반으로 나뉘어진 푸른 달의 쿠피디타스였어. 너도 알다시피 푸른 달은 수색꾼과 마우 마을에 나뉘어져 있었는데, 어느날 문득 로라가 찾아와서 나머지 쿠피디타스의 조각을 달라고 하더군. 원래 이 물건은 마우리스 산 정상에 놓여져 있던 마우린의 보물이였다고 말이야. 아마 그 쿠피디타스가 마우 마을에 있었던건, 란의 선조가 마키의 악한 생각을 읽고 저지른 행동이 아닐까싶어. 우리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때는 마우린이 해체되고 마키 족이 창설되기 이전이였으니까 무슨 탈이 있을까싶어 순순히 넘겨줬지. 아마 그때 로라가 가져다 놓은 것을 리오크는 로라와 자신의 사랑의 표시로 남겨두고 싶었던거지. 뭐, 그 뒤로는 알콩달콩 사랑하면서 잘 살았어. 뭐라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화목한 생활을 보냈지. 하지만 그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경고였던거야. "

  " 경고…라니? "

  " …리오크는 살해 당했다. 마키 족에 숨어 들은 전 마우린 소속이였던 한 남자의 손에 의해. "

  …!!
 
  " 그리고 그 리오크를 죽인건 로라의 아들이자, 란의 아들이였던 ' 레안 '. 현재 마우 마을에서 촌장의 직위에 앉아있는 남자의 이름이다. "



  “ 밤하늘에 떠오른 달이 밝고 시원하게 마우리스 산을 비추어내리자, 그 모습에 혼을 빼놓은 듯한 리오크의 발걸음이 절로 신나게 움직인다. 그의 옆을 따라 걷던 그의 동료인 ' 사우 ' 역시 그의 발걸음에 기분이 좋은지 덩달아 흥을 내며 그의 옆자리를 지킨다.

  " 오늘따라 마우리스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흥겹군. 사우, 자네 역시 그러한가? "

  " 그런 듯 싶군요. 다른 날보다는 왠지 기분이 좋은 날입니다. "

  사우의 눈읏음에 리오크의 입가엔 더욱 큰 미소가 지어진다.

  " 하핫, 그런가? "

  " …. "

  리오크의 호탕한 웃음소리 뒤로 살짝 얼굴이 굳은 사우의 모습이 조심스럽게 리오크의 앞을 가로 막는다. 

  " 왜 그러지? 무슨 일 있는가? "

  " …미안합니다. "

  " 뭐? "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작지만 재빠른 은빛 칼날이 그대로 리오크의 심장을 뚫고 지나간다. 리오크는 체 피할 겨를도 없이 공격을 허용한 그는 고통을 호소하며 땅바닥에 뒹굴었다. 달의 그림자에 가려 미처 보지 못한 의문의 남자, 그리고 그의 앞에 서 리오크의 최후를 지켜보는 사우의 눈가엔 작은 눈물이 고였다. 
  한동안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신경 쓰던 리오크의 움직임이 점점 멈춰갔다. 쇠약하게나마 들려오는 리오크의 숨소리가 마우리스 산을 휘어 감는다. 

  " 너…네가 어떻게…. "

  자신의 동료에게 배신 당한 충격이 큰 듯한 리오크가 사우를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사우는 그런 리오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크나큰 죄책감에 빠진 듯, 소리 없이 울먹거리는 그의 모습에 레안이 모습을 나타내며 말했다.

  " 전부터 네 녀석이 마음에 안 들었어. 하지만 그때는 잠자코 있어줬지. 하지만 이젠 아냐, 네 녀석이 일꾸어놓은 마키 족, 내가 가지고 가마. 저승에서나마 족장님이랑 못다한 이야기나 하라고…. "

  리오크의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내며 그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평소와 다름 없는 길을 걸으며 마키 족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던 리오크에겐 너무나도 허무한 죽음이였다. 더군다나, 그 죽음은 지금껏 자신과 친분을 과시하던 사우의 책임이 컸다. 리오크는 죽어가는 동안에도 사우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또한 자신을 배반한 동료가 느낄 죄책감을 더욱 느끼게하는 행동으로 보였지만, 리오크는 단지 레안의 꾀임에 속아 자신을 죽일 수 밖에 없던 사우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이 해줄 수 없다는걸 안 리오크가 사우에게 겨우 해줄 수 있는건 사우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 이 뒤에 있을 일을 사우가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하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리오크는 눈물을 흘렸다. 갑작스레 원통한 죽음을 당한 것 때문만은 아니였다. 곧 있으면 태어날 자신의 아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슬픔이 더욱 컸기 때문에 그의 눈물은 더욱 붉게 흘러 내렸다. 그렇게 눈물로 아픔을 대신하던 리오크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아직 세상의 빛을 못 본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리오크는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



  " 내가 분명 그 남자를 로라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실제론 진짜 어머니가 아니야. 그의 어머니는 오래 전에 죽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란 혼자서 키워왔다. 그러던 어느날 란은 로라를 만나 혼인한 뒤, 로라가 그 남자의 어머니가 된거지. 하지만 그 남자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 남자의 머릿속에는 어머니란 단어는 로라한테는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한거지. 더군다나 란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않아 로라는 리오크와 혼인했다. 그 때문에 그 남자의 분노는 극에 달았고, 그 결과, 로라가 사랑했던 남자인 리오크를 죽였다. "


  그저 순전히 그 때문에 리오크를 죽였다는 말인가? 하지만 내 상식선에선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문제다. 어찌하여 그런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이다니….


  " 여기까지만 본다 하면 레안은 그저 아버지인 란을 대신하여 벌인 일이라고 밖에 볼 수 없지. 하지만 그 남자는 란을 대신해서 리오크를 죽인게 아니다. 그저 순수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법에 불과했어. 정말 그 남자가 란을 위했다면 그 남자를 죽이기는 커녕, 어머니인 로라와 새 아버지인 리오크를 위해 열심히 살았을거야. 하지만 레안은 리오크를 죽였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일꾸어 놓은 마키 족이라는 집단을 손에 넣음으로 인해 그 남자의 계략은 할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

 

  계…략이라고? 그 녀석이 다른 일을 겸비해놓고 저지른 일이란 말이야? 어떻게 그런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지를 수 있는거지? 라셀에 말을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흥분해버린다. 이성의 끈이 저절로 놓아지는 듯한 충동이 이른다. 잠시동안 이 분노를 사그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왠지 이 말도 못하는 떨림은 대체 어찌하여 설명한단 말인가? 이런 내 모습을 라셀도 신경 쓰이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 계속해서 설명한 시간은 없지만, 이것만은 알아둬야 할까싶어 말할게. 어처피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너도 이해하지 못할테니까, 나 역시 상부에서 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묻어둘 일이였거든. "


  " 대체…무슨 말을 하려는거야? "


  " 로라의 아들 라엔, 하지만 진짜 어머니는 오래 전에 죽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라엔의 친 어머니이자 란의 부인이였던 그 여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 여자는 무슨 일 때문에 죽었을까? "


  " …뭐? "


  " 지금부터 이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해. 그래야만이 모든 실마리가 풀리고 너의 마음이 더욱 단단히 굳어질테니까. 그녀의 이름은 ' 로이즈 ', 로라와 마찬가지로 쿠피디타스를 연구하는 사람이자, 라엔의 어머니야. "


  로…이즈?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내가 대체 어디서 그 이름을 봤지?

 

  " 로이즈는 그때도 로라와 함께 쿠피디타스에 대해 연구를 하던 사이였으니까, 종종 각자의 마을에 놀러가기도 했지. 란 역시 마을에 가끔 오는 로라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을거야. 그렇기때문에 로라 또한 란을 믿고 의지할 수 있었을테니까, 그 때문인지 그 세 사람은 사이가 무척 좋았어. 마치 남매인 것처럼 너무나도 행복해보였지. 하하, 나도 참, 이런 얘길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아무튼간에 로이즈와 로라의 정보를 통해 우리 수색꾼들 역시 큰 도움을 받으며 쿠피디타스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로라가 우리 앞에 나타난거야. 평소 때와 같으면 로이즈와 함께 왔었을텐데 말이야. 더군다나 로라는 무언가를 보고 크게 놀란 것처럼 몸이 경직되어 있었고, 두 팔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더군. 가까스로 로라를 안정시키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로이즈가 죽었다는 말이였어. 그리고 그 로이즈를 죽인 자는 바로 마키였고. "


  라셀, 그 녀석은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나를 놀라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존경심이 들 정도로 나는 너무나도 실의에 빠져 있었다. 더군다나 나를 충격에 빠트린 장본인은 마키라는 점에서 또 한 번 놀랄 수 밖에 없었고. 그 녀석,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그런 짓을 하다니…. 


  " 로이즈가 죽은 이유는 정말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야. 그저 마우리스 산 근처를 돌아다녔단 이유로 이유 모를 죽임을 당한거지. 더군다나 로라가 보는 앞에서 말이지. 다행히 로라는 로이즈의 부탁으로 어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모습을 목격했다나봐.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가서 로이즈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데. 첫 번째 이유는 쪽수가 너무 많았고 상대는 무기를 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일 마음 아픈 이유는 두 번째, 마우린에게 살해를 당하는 동안에도 저 멀리서 자신을 위해 달려올 로라에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는거야…당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


  …자신이 죽는 그동안에도 로라를 생각했다는건가. 


  " 그 소식을 접한 란은 몹시 흥분했다. 당장이라도 마우린들을 잡아다 죽여버리겠다는 그를 겨우 말릴 수 있었지. 란이 슬퍼하는 모습을 로라는 지켜볼 수 없었던거야. 나와 수색꾼들 역시 그랬으니까…하지만 그때의 란은 결코 검은 별의 능력을 쓰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에서도 절대로 그 능력을 써서는 안된다는걸 몸으로 느끼고 있던거야. 나였다면 당장이라도 그 능력을 사용하여 그녀를 살렸겠지만, 그때의 란은 너무나도 현명하고 바보 같은 녀석이였어. 정말 멍청한…그 후 란은 한참을 울부짖다가 마을로 돌아갔어. 그리곤 내색하지않고 평소의 모습처럼 마을에서 도움을 주며 하루하루를 보냈지. 그리고 로라 또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어. 그리고 또 한 번의 비극이 시작된거야. 억울한 죽임을 당한 로이즈의 복수랄까? 로라는 그 일이 있은 후에 자기 발로 마우리스 산을 올랐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그 누구도 몰라, 하지만 어느 날 마우리스 산에서 내려온 로라의 모습은 참혹 그 자체였지. 로라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란 역시 더 이상 그녀를 캐묻지 않았지. 그리고 또 한 번 들이 닥친 끔찍한 광경이 벌어진거야. 그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


  말…안 해도 알 것 같아. 나 같아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테니까, 이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평생을 증오하고 미워할 뻔했다. 정말 라셀의 말대로 그들은 어쩔 수 없었고, 도리어 막을 수 없었을거다. 듣고 있는 나조차도 분에 겨워 어쩔 수 없을 상태에 이르렀으니까.

  라셀은 말을 멈췄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이야기며 맨 정신으론 들을 수 없는 슬픈 기억이니까. 하지만 그는 큰 결심을 한 듯 다시금 말문을 열며 못 다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 하지만 그 비극이 있기 전, 또 하나의 비극이 먼저 일어났어. 그것 때문에 란은 더욱 갈팡질팡하게 된거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아들이 그런 일을 꾸밀지는 상상도 못 했을테니까. "


  " 뭐? 그게 무슨 말이야…? "


  " 너, 벌써 까먹은거야? 내가 아까 전에 말했잖아…. "


  …!!
  서, 서, 설마….


  " …라엔은 마우린이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집단의 오른팔…. 그리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한 죄로 인해 마을에서 쫓겨난 남자, 자신의 야망을 위해 리오크를 죽여 마키 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비겁한 녀석, 너, 잊지마라. 란의 죽음을 얼룩지게 만든건 마키가 아니야. 그의 아들 라엔이다. "


  정말…미치겠다. 이 이야기를 더 듣고 있어야하는건가? 더 듣지 않아도 충분히 나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다. 지금 당장 나에게 검을 쥐어 준다면, 당장 그 녀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 녀석의 심장을 뚫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라셀은 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로 나를 진정시켰다. 그래, 내가 이렇게 흥분해 날뛰어봤자 달라지는건 아무 것도 없다. 라셀의 말대로 내가 이 모든 전모를 알지 못하면 나아질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다. 참자, 참고 들어서 이 모든 일에 책임을 묻게 만들거다.


  " 그 때문에 란은 도통 진정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아들이 마우린에 들어간걸 참을 수 없었지. 더군다나 마우린을 휘어 잡고 있는 마키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장본인이란걸 알면서도 그 남자는 마우린으로 들어갔다. 더군다나 그 녀석이 마우린에 들어가서 한 일은, 각 마을에 숨겨져 있는 쿠피디타스를 빼돌리는 일, 그리고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마우 마을이였단거야. 그렇기때문에 란은 더욱 쿠피디타스 보안을 강화하며 그곳에 대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죽임을 당한 로라를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지. 그도 그렇듯이 한계에 다다른거야. 그 때문에 그는 절대 해서는 안되며 건들여서도 안되는 장벽을 깨트렸다. 난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어야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모든걸 알고 있음에, 이 남자가 겪었던 모든 아픔과 슬픔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더욱 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해서는 안될 선택의 기로에 그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미래를 망가트리고 말았다. "


  라셀은 이내 말을 멈추며 제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더 이상 말할 기력이 없는건지, 아님 슬픔에 잠겨 목이 메어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나 또한 가슴이 두근거림을 참지 못하고 숨을 가쁘게 몰아 쉬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달려왔다. 세상의 멸망에 대한 이유만을 찾아 달려온 이 길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길고도 짧게만 느껴졌다. 그저 단순히 그 이유만 알게 되면 모든게 가뿐해질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였다.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 것도 모르던 그때가 더 행복할 정도로 가슴이 너무 뻑뻑하게 메꿔져 있다. 악순환의 반복, 그리고 또 한 번의 배신과 배신. 대체 그들은 왜 이런 짓을 꾸미면서까지 쿠피디타스에 대한 열망에 빠져 있는걸까? 순전한 자기 욕심? 아니면 이 세상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자부심?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그들은 이런 위험한 일을 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해야만 하는거냐고!!

  " …그 때문에 난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의 멸망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모든걸 잃고 말았지. 하지만 포기하지않아, 네가 나한테 말했던 것처럼 포기라는 말을 한다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될테니까. 아직은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이 모든 희망을 너에게 걸려고 한다. 네가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라. 너라면 할 수 있다. 아니, 너라면 그 누구도 하지 못 한다. 만약 네가 이 일에서 손을 뗀다면 더 이상 이곳도 현재와 다름 없이 암흑의 길로 저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가 이렇게 된 것도, 로이즈가 애꿎은 죽음을 당한 것도, 나와 이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간다는 약속을 란이 죽은 이유도,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쿠피디타스, 그것만 없었다면 이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없애려는 악과, 그의 맞대응을 하기 위해 쿠피디타스를 지킨 자. 하지만 그 결과는 파멸의 극치였다. 이 모든 악순환을 극복하기 위해선 쿠피다타스를 파괴하는 것, 더 이상 봉인의 문제가 아니야. 봉인을 해도 언젠가는 그 누군가로 인해 다시금 모습을 나타낸다. 그렇기때문에 더 이상 쿠피디타스의 존재를 이 세상에 남기면 안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모든 악순환을 깨트릴 수 있는건 너 밖에 없다. 너에겐 그 누구에게도 없는 무언가가 존재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너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루에르, 어떻게 할거냐, 이 세상을 위해 싸울거냐? 아님, 모든 것을 덮어 놓고 현재로 돌아갈테냐!! "


  라셀의 울부짖음이 내 가슴에 비수로 꽂혀 쓰라린 고통을 남겼다. 라셀의 말로 인해 나는 더욱 더 심장이 두근거렸고, 이 떨려오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선택의 기로 앞에 섰다. 한 곳은 지옥, 또 한 곳도 지옥. 지옥과 지옥, 어딜가든 내가 편히 있을 곳은 없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다. 어떻게든 둘 중에 하나는 꼭 헤쳐 나가야할 관문. 둘 다 고통에 몸부림 칠 수 밖에 없는 가시지옥일테지만, 그 지옥 중에는 작은 빛이 존재한다. 그 빛을 쫓아 앞으로 걷다보면 언젠간 천국으로 가는 입구로 다다를 수 있겠지. 


  " …. "


  지금 나는 그 선택을 하려 한다. 돌이킬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막다른 길에 서서 말이다.


  " 이 세상을…구하겠다. "


 

  P.s : 무언가를 믿는다는건, 망가진 틀의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끊임없이 이어진 미궁이라도 그 끝은 존재하는 법. 믿고 나아가는 자만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진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 기회를 잃는 자, 그는 그저 패배자일 뿐이다.

  P.s2 : 네, 마지막화인 ' 영원의 신념 1 ' 이 끝났습니다. 행복하네요. 이제 영원의 신념 2만 쓰고 나면 길었던 루에르의 연재가 막을 내리겠네요. 왠지 이 소설을 완결하고 나면 마음 한 켠이 쓸쓸할 것만 같네요. 아무쪼록 마지막까지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즐감하세요. 


Who's 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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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탓하지마라.

시간을 흘려보낸건 나 자신이다.

시간은 주어진게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연히 나라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그 시간의 흐름에 어떻게 따라가느냐의 내가 증명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증명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