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루에르- 영원의 신념 -2 - 4슬픈 미소를 짓는 로라를 바라보는 내 시선도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로라 자신도 알고 있듯이, 그의 선택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것을. 하지만 과정이 어찌됬든 결과는 결국 세계의 멸망, 이들에겐 아직도 멀고도 긴 시간이지만, 나한테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그녀를 마주보는 나의 시선이 조금은 껄끄럽게 느껴졌다. 차가운 냉기를 품고 휘몰아치는 바람 뒤로 로라의 머릿결이 흩날렸다. 바람에 휘날려 로라의 얼굴을 덮친 머리카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던 그녀의 눈가엔 작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하면 할수록 조금씩 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의 가슴에 뭉쳐 있는 작은 응어리들을 하나 하나씩 풀어 헤치면 조금은 개운해질거라고 생각했는데, 가슴이…더 많이 아파왔다.
그렇게 수 분의 시간을 바람과 함께 날려보낸 우리들은 아무런 미동 없이 흘러가는 구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란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이였지만, 이때만큼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떠올리며 감수에 젖은 표정만을 지을 뿐, 나와 로라의 사이에 휘몰아치던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한다.
" 망설이고 계시네요. 아님, 말할 시기를 놓치신건가요? "
" …. "
" 괜찮아요. 이미 모든걸 알고 있으니까요. "
로라는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 미래에서 오셨죠? "
…!!
" 그럴거라 생각했어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게 조금 마음에 걸렸었거든요. 더군다나 쿠피디타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고요. "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 나온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살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말이였을텐데, 그녀는 일절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않고 관찰을 했다는건가…더군다나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별로 놀라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쿠피디타스를 연구한 탓에 그녀 역시 쿠피디타스의 능력 중, 시간이동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 …왜 란은, 당신을 딸이라고 부른거죠? "
" 란이 그러던가요? "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죠? "
" 이미 잊고 산지 오래에요. 다시 들춰내봤자 아픈 기억 뿐일테니. "
" 대답해줘요. 대체 그들이 찾고 있는게 뭐죠? 그들이 원하는건 쿠피디타스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 밖에 없고요. 하지만 그들이 찾는건 쿠피디타스가 아닌 그 이외에 물건이였습니다. 그들은 뭘 찾고 있는거죠? "
나의 물음에 로라의 말문이 닫혔다.
" 로라…저는 지금까지 세상이 멸망한 이유를 찾아 달려왔습니다. 그저 가볍게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더군다나 한순간에 우리가 살던 문명세계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제 눈 앞에 사라졌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저의 친구들도, 모든 인류가 사라졌고요. 하지만 저는 어딘가에 남아 있을 사람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멈추지않고 걸어왔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목적 때문이고요. 대체 그들이 원하는게 뭐죠? 그들은 무엇을 찾고 있냔 말이에요!! "
한순간에 다시 불을 지핀 내 가슴은 뜨거운 불길을 내뿜으며 로라에게 다가갔다. 언제부턴가 마음 속에 담아뒀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다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내 스스로 자제를 해보려 했지만 그게 쉽사리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묻고 싶었던 기억이자, 떠올리기 싫은 아픔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슬픔과 분노를 표현한다해도 이것만큼은 꼭 물어보고 싶었다. ' 왜 그들은 평화로운 삶의 질서를 어지르는건가. 대체 그들은 무슨 이익을 보기 위해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쿠피디타스를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일까, 결코 쿠피디타스는 신이 내린 보석이 아닌, 인류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내는 악마의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그토록 쿠피디타스를 갈구하는거지? 제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면 안되는건가? 다른 무언가의 힘을 빌리지않고,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자연의 섭리를 뛰어 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류의 모습이 아닐까? ' 라고.
로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침묵과는 전혀 다른 정적.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아직, 늦지 않았어요.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요. 그들이 먼저 손에 넣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는거에요.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모습이잖아요? "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나의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나의 용기 있는 말은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에 묻혀 스르륵 사라지고 말았다.
" …로라? "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로라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 ……. "
그녀의 투명한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로라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그녀의 아픔과 슬픔, 하지만 남은 마을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애써 참아야했던 지난 날의 고통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행여나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까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지난 설움을 흘려보내는 그녀를 그 누구도 건들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시간만큼은, 절대로 그녀를 건들일 수 없다.
" …. "
슬쩍 어루만진 그녀의 머리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지금껏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한 나의 피로를 금방이라도 풀어줄 것만 같은 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내 품에 안겨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던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미동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조용해지는 그녀의 숨소리, 이 근방의 모든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적막감이, 나와 로라 주위를 맴돌았다.
“ 그녀를 구할 수 있는건 너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세상을 구할 사람 역시 너 뿐이다. ”
….
이번만큼은 정말로 내가 라셀이 말한 것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 이후, 나와 로라는 마우 마을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우리와 꽤나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로라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다시는 못 볼 줄만 알았던, 그의 마을을 말이다.
나와 로라는 제일 처음 촌장댁으로 향했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역시나 촌장댁엔 그 누구의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이 없다는걸 확인한 로라는 뒤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을 한 뒤, 서둘러 자신이 머물고 있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그녀는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한 손에 무언가를 지니고 말이다.
" 이만…가요. "
그녀는 이만 가자는 말을 하며 나의 손을 이끌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움직일 뿐, 그녀의 손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없는 그동안에 로라는 자신의 방에서 무엇을 찾고 있던걸까? 라셀과 약속한 장소로 향하기 전, 그녀가 내게 부탁한 한 마디.
" 가지고 올게 있어요, 꼭 가져가야만 해요. "
물론 안된다고는 말 못했다. 더군다나 그녀가 그렇게 절실히 원하는 말투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처피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물며 띈다 한들, 그들을 따돌리기엔 혼자로 충분했다. 만약 그녀가 방에 들어간 뒤 그 녀석이 나타난다고해도 전혀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녀는 그곳을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숨도 제대로 돌릴 틈도 없이 우리는 분주히 그곳을 향해 뛰어 갔다. 이미 오래 전부터 라셀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들과의 격돌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전열을 맞추고 말이다. 그때, 라셀이 나와 함께 움직이지 않은 이유도, 지금에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나와 로라의 사이를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든거다. 그리고 그 계기 속, 로라의 마음 속에 잠재워져 있어야만하는 아픔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나를 보낸 것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 이 모든 공통된 사항에 들어가는건 바로 나일지도 모르지. 어찌보면 자만감에 부풀어 모든 해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지만, 정작 나는 내가 해당되는 사항에 대한 부담감만이 커져,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이라도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실패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불안감을 잡아준건 라셀, 그리고…나의 손을 잡고 있는 로라였으니 말이다.
“ 절…도와주세요. ”
그것은 로라가 내게 한 첫 번째 부탁이자, 마지막으로 그녀가 내뱉을 수 있었던 한 마디였다. 나는 거절하지않았다. 처음부터 그녀의 말을 거절할 생각도 아니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비극을, 돌이킬 수 없는 지난 날의 아픔을, 또한 그녀가 몸소 막아야만 했던 참을 수 없는 슬픔, 난 이 모든 것을, 그녀에게서 건네 받고 싶다. 이 모든걸 떠안기엔 너무나도 작은 몸, 그렇지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더불어 그녀를 도와줄 수 있었던 한 남자, 그러나 그 남자 역시도 미래엔 없을 불행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고, 이제 이 세상에 홀로 대항하는 로라마저도, 그 의욕을 잃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위해 뼈 아픈 고통까지 참아가며 지금껏 버텨내고 있었다. 난,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싶다.
" …. "
이 가녀린 손이 나의 손을 힘껏 붙들고 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나의 손을 타고 전율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다. 지금 내가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말 없이 지켜보는 것이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내 최선의 방법이다. 그녀를 도울 방법도,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것도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낸 라셀만이 그녀를 도울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테니까. 그저 나는, 로라를 도울 수 있는 한 사람에게로 로라를 데려가는 것 뿐, 그 이후의 일은 생각치도 않았다.
" …!! "
그래서 떠올리지도 않았다.
" 라셀…. "
그저 그녀를 여기까지 데리고 가기만 한다면 모든게 순조롭게 진행될거라 생각했으니까.
" …미, 미안하다. 설마, 이 녀석들이 여길 먼저 칠 줄은…. "
" …. "
설마 했던 일들이, 지금 방금 우리 앞에 닥쳤다. 라셀은 힘을 잃고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그 주위로 그와 같은 수색꾼들이 의식을 잃고 시뻘건 액체를 입 밖으로 배출할 뿐, 소리 없는 그들의 아우성이 나의 발목을 붙잡곤 놓아주질 않았다. 나의 손을 꽉 붙잡고 있던 로라의 몸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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