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루에르- 영원의 신념 -2 - 5" 많은 죄를 짓고 있더군, 그게 무슨 말을 가리키는 줄 아는가? 그건, 나에 대한 반란이야. 감히 촌장인 나를 위협하기 위해 이런 속셈을 꾸미다니…더군다나, 내가 이루려는 꿈을 방해해? 절대 용서해줄 수 없는 상황이군…. 이대로 너희들을 처형해도 아무 불만 없겠지? "
그 남자의 입가에 작은 사신의 미소가 깃들었다. 그의 등 뒤로 검은 오오라를 방출하는 4명의 남자들의 손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단도 사이로 의식을 잃은 자들의 비명소리가 흘러 나오는 것 같았다.
" 그만하고 저와 함께 가시죠, 이 이상 제 말을 어기셨다간, 이들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 머. 니. "
로라의 손이…더욱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 …절대, 네놈들 뜻대로 내버려두지 않겠다!! "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던 라셀이 비틀거리며 레안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레안과 부딪혀 바닥으로 쓰러진 라셀이 나와 로라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 이놈들은 내가 잡고 있을테니, 그동안 너는 로라를 데리고 어서 여길 벗어나! "
" 라셀…. "
" 어서!! "
4명의 검은 남자들에게 둘러 쌓인 라셀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볼 용기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로라를 데리고 그 자리를 피했다. 나와 로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는 이 비극을 끝내고 싶었다. 나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단지 내 머릿속에 차있는건 로라를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하는 것,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 …꼭, 돌아와라. "
…!
" …제길!! "
그대로 나와 로라를 그들을 뒤로 한 채,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그들에게서 멀리 멀리 달아나는게 전부였던 우리들은, 달리고 또 달려갔다. 점점 멎어만 가는 그의 비명을 들으며…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뚫고선 한 작은 민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곳은 예전 마우린의 습격으로 어질러져 있던 마우 마을사람들이 잠시 몸을 숨긴 피난처였다. 그 피난처가 아직까지 제 모습을 갖추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걸 보면, 왠지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민가 안으로 잠시 몸을 숨긴 나와 로라는 잠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등줄기를 차갑게 적신 식은 땀을 말렸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이 뒤늦게 충격인 듯, 나와 로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진 ' 무언가 ' 는 같을테니 말이다.
조금씩 안정이 잦아들자, 우리의 숨소리가 아까와는 달리 고요하게 흘러 나왔다. 로라도 이 상황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는지, 쭉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린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언제쯤 사라질까하고 말 없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였다.
" …미안해요. 제가 제 의사를 똑바로 말할 수만 있었다면…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정말, 미안해요. "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리며 이내 한 방울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미 몇 번이나 보고 말았던 그녀의 아픔을, 또 다시 그놈들 때문에 또 한 번의 고통을 지닐 수 밖에 없는 로라를 보자, 참고 있었던 울화가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이 시점에서 그놈들에 대한 분노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걸 로라가 본다면, 그녀의 상처는 더욱 더 깊어지고 말테니까. 지금 내가 그녀를 위해 해야 할 최선의 방법은,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 설령, 그녀가 흘린 눈물이 끈임없이 나온다해도, 그녀가 마음을 추스릴 때까진,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내가 베풀 수 있는 그녀를 위한 작은 위로일테니.
그렇게, 잊지 못할 아픔에 허우적거리던 로라는 어느센가 잠이 들고 말았다. 흘러내린 눈물을 채 닦지도 못한 그녀의 볼엔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었다. 그녀가 있는 맞은 편에서 그녀의 모습을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나는 잠들어 있는 그녀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볼에 맺힌 슬픔을 살짝 닦아주었다. 그러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 후, 하늘의 빛이 조금씩 붉게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 역시도 어느센가 잠에 들고 말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에 뜬 눈으로 밤을 지세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피곤에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에 한해 잠에서 깨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이내 나의 몸을 조용히 감싸는 포근함에 저절로 의지를 놓아버린 나는 잠에 들 수 밖에 없었다. 이때만큼은,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편안함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잠을 자는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때가 아니라면, 나는 또 한 번에 위기에 부딪혀 채 잊혀지지않은 마음의 응어리를 품에 안고 움직일 수 밖에 없었을테니. 그저, 이렇게만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만 있다면…말이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방금 전까지 햇빛에 비춰 하얗게 물든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센가 나의 목에 잠겨져있는 무거운 쇠사슬 하나가 나를 반길 뿐이였다. 정신을 차린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 저곳을 돌아보며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나는 그들의 손에 잡혀 이곳에서 눈을 떴다.
" 이게 어떻게 된거야…대체 내가 왜 이곳에 있는거냐고?! 로라는? 로라는 대체 어딨어!! "
철창을 두들기며 아우성치는 내 앞으로 낯 익은 검은 실루엣이 모습을 나타냈다. 검은 복면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던 그 남자의 얼굴이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위협한다.
" 로라를 어떻게 한거지…? "
" 그걸 물을 처지 아닐텐데…이미 너는 죽을 목숨이라고, 그분이 어디에 있든 네가 할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다. "
그 남자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내 앞을 지나갔다.
" 앞으로 10분…그동안, 너의 삶을 비탄해라. 그것만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일테니까. "
" 이거 열어, 이거 열지 못해!!! "
" …넌,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다. 이미, 그 남자의 눈에 띈 시점부터 너의 최후는 이미 정해졌다. 그러니, 괜한 발악은 집어 치우고, 그만 단념해라. "
철창을 붙들고 있는 나를 보며 말한 그 남자는 천천히 이곳을 빠져 나갔다. 그 남자가 사라진 직후, 격앙된 내 심리변화에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철창 안에서 이리저리 날뛰었다. 내 목을 꽉 묶고 있는 이 쇠사슬을 끊어 버릴 힘조차도 갖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였다. 잠자코 죽음을 기다리느니, 이대로 혀를 깨물고 자살을 해버리는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 이잇…. "
하지만, 그런 짓을 하려고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나의 목적을 정확하다. 이 세상에서 벌어졌던 일을 막으므로써, 후에 있을 파탄된 미래를 없애기 위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거다. 중간에 실수로 내가 이런 곳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 절대로 그냥 죽을 생각은 없다. 그놈의 야망을 산산히 조각내어 한낱 종이조각으로 만들어버릴거다. 그 전에는 절대로 죽을 생각은 없어, 아니, 절대로 나는 죽지 않아. 네 녀석들을 이곳에서 없애기 전까진 말야.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긴 숨을 들어 마쉬며 정신을 단단히 잡았다. 비록 얼마 남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나는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첫 번째, 나를 붙든 그들을 한치의 실수 없이 처치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자, 마지막 수단이다.
그 뒤로 짧지만 기나긴 10분이 지나자, 그 남자가 다시금 모습을 나타내었다. 나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그가 철창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 철컹 - ! 」절대 열리지않을 것만 같던 철문이 열리자, 그 안으로 그 남자가 천천히 들어왔다. 그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는 나를 보곤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꼈는지, 별안간 내 앞에 서며 조심스럽게 철창 문을 닫았다. 원래라면 이대로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 했을 차례인데, 젠장…내가 자신을 처치하고 이곳을 빠져 나갈거라는걸 눈치 챈건가? 아니면, 무슨 꿍꿍이 속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 이곳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걸 알곤, 모든걸 포기한 채, 단념한건가? 물론 그러는 편이 너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은 법, 그러나 네 녀석의 그런 모습을 보니, 너를 과대평가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군. "
" …그게 무슨 소리지? "
나는 고개를 올려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그는, 슬픈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전혀 나에게 해를 끼칠 인물로는 보이지 않게, 말이다.
" …네 녀석을 보고 있자면, 한 남자가 떠오른다. 그 남자는 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신념이 두터운 남자였지,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휩쓸려 죽고 말았지. 차마 막을 수도, 그렇다고 흘려 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였지. 그런데 그런 그와 너에게선 뭔지 모를 비슷한 형상이 겹쳐 보인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너에게서 그 남자의 모습이 보여. "
그 남자는 내가 이해 못할 말을 하며 슬쩍 웃는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나 또한, 그의 말에 약간의 의문을 품었지만, 결론적으로 이 남자는 나를 그 남자 앞으로 보내려는 대행자일 뿐, 그 남자의 손에 죽는 나를 그대로 방관하는 또 다른 가해자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그런 나에게 이 남자는 이런 말을 하며 웃고 있는거지? 대체 지금까지 보았던 검은 남자의 모습이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 꼭, 이곳에서 살아 나가고 싶다면. 그 남자의 뒤를 이어 너만의 신념을 찾아라. 그래야만이 네 녀석은 이곳에서 빠져 나갈 수 있다. "
" …뭐? "
왜…이 남자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거지? 분명, 저 남자와 나는 적대관계일텐데,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냔 말이야…. 그 남자는 이내 닫혀졌던 철창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반쯤 허리를 숙여 나의 목을 조이고 있던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 철컹 」
무거운 쇠사슬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내 목이 한결 가벼워졌다.
" 나가라, 그리고 찾아라, 네 녀석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그것으로 인해 네가 얻는 것이 득일지 실일지는, 앞으로 네가 감당해야하는 부분이니. "
대체…이 남자는….
"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은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