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루에르- 영원의 신념 -2 - 6"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나누고 있는거지? 혹시, 나 몰래 그 녀석을 도와주려는 생각이였나? "
…레안!!
" 그런거 아닙니다. 다만, 죽기 전에 하고픈 말이 많은 것 같아서 장단에 맞춰 줬을 뿐입니다. "
"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그런데 쇠사슬까진 풀어주지 않아도 됬을텐데…? "
레안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본다.
" 어처피 풀어야 했던거니, 미리 풀어둬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걸 푼다해도 이 녀석을 여길 빠져 나갈 수 없을테니까요. "
" 그래…? "
레안의 입이 길게 찢어진다.
" 뭐, 수고는 덜었으니 됬다. 그럼 이제 처형식을 시작해볼까? 나를 상대로 함부로 날뛴 죄, 반란을 일으킨 죄, 마음대로 그 여자를 빼돌린 죄, 기타 많은 죄가 있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죄는, 바로 이런게 아닐까? "
레안의 손에 들려 있는건 다름 아닌 쿠피디타스, 더군다가 그건 라셀이 내게 맡겼던 검은 별의 쿠피디타스였다. 저 남자가 어떻게 내가 쿠피디타스를 가지고 있는지 알았지? 더군다나 그 사실을 아는건 라셀과 나 말곤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내가 잠시 정신을 잃은 동안, 내 몸을 수색한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저것말고도 하나 더 있을텐데…?
" 네가 어찌 이걸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쿠피디타스를 소유하고 있는 자체가 중죄에 해당된다. 중죄에 해당되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테지? 하지만 덕분에 수고를 덜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부디, 저승에 가서 편안한 삶을 지내라고. "
" 로라는, 로라는 어떻게 됬지? "
" 로라? 그것을 안다 한들, 네 녀석이 무엇을 한다는거냐? 이미 너는 죽을 목숨인데 말이야. "
" 로라를…어떻게 한거냐…. "
" 어떻게 하다니, 이래뵈도 아무 짓도 안했다고. 단지 내 명을 어긴 죄로 잠시 놀아줬을 뿐이야. 왜, 보고싶나? "
레안은 뒤에 서 있던 2명의 남자를 앞으로 불러 세웠다. 그 두 남자는 무언가를 부축이는 모습으로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 …너. "
내 눈 앞에 나타난건 로라였다. 하지만 이미 내가 알고 있던 로라가 아니였다. 사지가 쭉 늘어져 자신의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일어 설 수 없는, 그의 양쪽 팔을 잡고 있는 그들이 로라를 놓자, 로라는 힘을 잃고 그대로 내 앞으로 쓰러졌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로라는 갖은 구타를 당한 듯, 이곳 저곳이 상처투성이였다. 더군다나, 그녀가 있고 있던 비단옷이 찢어질 정도로, 그녀에게 가혹한 고문을 했는지 그녀의 숨소리는 미약하게나마 내 귓가에 흘러 들러왔다. 그 모습에 반쯤 이성을 잃은 나였지만, 꾹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상 나의 감정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로라를 데리고 빠져 나갈 수 없을테니까.
" …왜 이런 짓을한거지? 로라를 데려간건 순전히 나인데, 왜 죄 없는 로라에게 이런 짓을 한거냐고!! "
참을 수 없었다. 참고자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결코 참을 수 없었다. 두 주먹이 부서질 것 같이 아프고, 손톱에 짖눌려 피까지 흐름에도, 나의 분노는 도통 사그라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미세하게나마 나의 이성의 끈을 붙들고 있는 ' 책임 ' 이란 단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레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참아야만 한다. 나의 인격이 두 개로 나뉘는 한이 있어도, 지금 로라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꼭 참아야만 한다.
" 누가 들으면 죄 없는 여자 하나를 만신창이로 만든거라 생각하겠군. 하지만 그 여자는 충분히 이만큼의 죄를 저질렀다. 네 녀석과 함께 도망간 죄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의 죄를. "
쿠피디타스를 들고 있는 손 이외에 레안의 손에 들려 있는건 또 하나 있었다. 레안은 그 물체를 내게 보여주며, 로라가 나와 도망칠 때 들고 있었던거라는 말과, 자신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찾고 있던 물건이 바로 그 물체라는 말에 나는 순간 의식이 끊어지는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로라가 잠시 촌장댁에 갔다온 뒤, 한 손에 들려 있던건 그저 단순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녀에 대한 관심이 컸었더라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도 않았을텐데…더군다나, 로라가 저것을 갖고 있었다니…그 점이 더 놀라울 뿐이였다.
" 이것만 있으면, 나의 야망을 이룰 수 있다. 지금까지 이것을 얻기 위한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지금 내 두 손에 들려 있는 이것들만 보면 가슴이 벅차서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이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이런 나의 꿈을, 한순간에 박살내려 했던 너희들의 행동을 절대로 넘어갈 수 없다. 금방 느낄 수 있을거다. 차라리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맞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라고 말야. "
바닥에 쓰러져 있는 로라를 발로 걷어차는 그의 모습을 더 이상 참고 볼 수가 없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랐다. 조금만 참아서 이곳을 빠져 나갈 기회를 엿보자는 나의 바람이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 철컹 - ! 」
…!!
아차, 아직 손에 사슬이…!
「 쿠당탕 」
아직 손에 사슬이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나는 그대로 나자빠질 수 밖에 없었다. 잠시 목의 사슬이 없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미처 손에 사슬이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젠장…조금만 더 신중하게 행동했더라면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을텐데, 그때 내가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면 로라도 이런 모습이 되지 않았을텐데…젠장, 이건 나의 착오다. 조금만, 조금만 냉정했더라면….
" 잘가라. "
이런 결말이 되진 않았을텐데….
창틈 사이로 비춰진 햇빛에 잠이 깬 나는 눈을 비비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빛이 쏟아지는 창문 아래로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 하아…. "
이상한 꿈이였다. 나와 로라가 그놈들에게 잡혀 처형을 당하는 꿈, 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생생해서 지금도 두 다리가 떨려오는 꿈. 하지만 그건 꿈이였다. 그것을 말해주는건 자유로이 움직이는 내 두 손과,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로라가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론 찝찝한 기분이 든다. 갑작스레 그런 꿈을 꾼 점, 그리고 너무나도 생생했던 꿈, 더군다나 그 꿈 속에서 있었던 일들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는 점, 꿈이란게 원래 그런거지만 그 꿈은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린다. 단지 그것 뿐이다.
“ 네 녀석을 보고 있자면, 한 남자가 떠오른다. ”
그 남자가 한 말이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가벼운 꿈 이야기라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너무나도 장대했던 꿈이라 그런걸까, 그 말이 아직까지도 내 귀에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의 목을 향해 내려오던 검의 날에 비친 그 남자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나는 피식 실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검이 나의 목을 베어내고 사방으로 피가 흩어질텐데, 그 와중에도 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칼날에 비친 그 남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를 죽이려는 그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였는지 모르겠다. 왠지 그 남자는 레안에게 무언가를 속박 당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렇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의 입을 틀어 막은 것도 아니였고, 내가 무슨 말을 한들 흔들리지 않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 내 자신도 모를 모습으로,
" …. "
또한, 그가 흘린 눈물방울에, 나 또한 이유 모를 눈물이 흘렸던 것을.
1시간 가량이 지났을까,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이곳에 오래 머물러봤자 좋을건 없다. 언제 그들이 이곳에 들이 닥칠지 모르니까. 다만, 세상 편하게 잠들어 있는 그녀를 차마 깨우기가 어렵다는거다. 지금도 자신의 꿈 속에서 자유로이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세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지금만큼은, 그녀에게 삶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는 유일한 위로책일테니까,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제 곧 그녀를 깨워야만 한다. 깨우고 싶지 않다. 하지만 깨울 수 밖에 없는 나의 행동에 잠깐 화가 난다.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음에도, 그녀의 행복을 깨트리려는 내가 수치스럽다.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더 깊다. 그렇지만 마음과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나기에, 그 한숨이 더욱 짙어질 뿐이다.
한참동안 머뭇거린 나는 길게 한숨을 늘여뜨렸다. 그리고 이내 떨리는 손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 …란. "
그 순간, 로라가 말했다. 나는 황급히 손을 거두며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는지 란의 이름만 연거푸 되뇌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란에 대한 기억이 꿈 속에서도 계속되었던걸까, 꿈 속에서나마 평온한 삶을 지내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내 생각과 달리, 그녀는 꿈 속에서 란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내게 란의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없다. 그녀와 있던 시간은 짧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란을 그리워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란을 사랑하는지를.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다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란을 생각할 때마다 커지는 슬픔과 고통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을거다. 더군다나 지금 자신한테 가해지는 아픔도 제대로 막아낼 수 없는 그녀였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자는 동안만이라도 그런 아픔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는데….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벗어날 수 없다는걸…그녀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 후, 짧은 시간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선 나는 아무런 말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잠에서 깨어난 그녀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파하는 로라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의 마음은 편치않다. 그녀를 꽁꽁 싸맨 속박이란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에 불과하다. 날개짓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거미줄에, 그녀는 아무런 가망 없이 죽음을 기다린다. 그것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가 걸린 거미줄엔 그 누구도 없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싶어도 그 근처론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가면 갈수록 깊어져가는 그녀의 공허함. 그 공허함을 채워주는 상대를 로라는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그녀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가 없다. 그녀보다 아는 것도 없고, 무턱대고 달리거나 도망칠 수 밖에 없는 내게 그런 힘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되든 안되든, 만약 안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한이 있어도, 그녀를 위해 행하는 나의 모습은 결코 망설임은없다. 그래야만이 오랫동안 같은 장소에서 머무는 그녀를 구해낼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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