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루에르- 영원의 신념 -2 - 11괜찮아질거라 생각했다. 이 모든게 끝이나면, 나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까? 마지막으로 가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하지만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운 탓일까? 왠지 아쉬운 마음이 발목을 더욱 부여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남자가 말했고, 그녀가 향한 그곳, 그곳은 ' 아련 마을 ' 현대에서 내가 처음으로 쿠피디타스를 봉인 했던 마을, 처음으로 내 손으로 봉인시켰던 쿠피디타스가 있던 마을, 그리고…나를 이곳으로 보내준 또 하나의 문. 이곳에 도착한 나와 로라의 얼굴에는 조금씩 희망으로 깃든 미소가 잔잔하게 우리의 입가에 맴돌았다.
그녀가 건넨 붉은 태양의 쿠피디타스, 역시나 이곳에는 아직도 봉인되지 않은 쿠피디타스가 존재했다. 내가 봉인을 했다해도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 설령 내가 봉인을 실패했다해도, 이곳엔 쿠피디타스는 늘 그 자리에 잠잠히 머물러 있었겠지.
" 이거면…될까요. 이러면…세상은…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안쓰럽게 떨려왔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더불어 몰아치는 부담감, 그리고 어쩔 도리 없이 향해야만하는 무언의 강압. 그러나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이 다시는 눈물로 얼룩지지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고, 그래야만이 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자신의 딸…아니 자신의 여자를 위한 그 남자의 메세지를, 함부로 어찌할 수 없으니까…. 죽는 그 순간에도 그 남자의 눈에는 저멀리 로라가 보였을테니까…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마우리스 산으로 향했다. 모든 사건의 시초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끝마치기 위해서.
" …알고 있던건가. "
하지만 그 감동도 잠시, 마우리스 산 정상에 도착한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에 나는 또 다시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 역시…올 줄 알았다. "
쓰러진 라셀을 인질 삼아, 나를 자극이라도 하는 듯, 휘청거리는 라셀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그들을 보자 나의 이성이 끊어질 뻔 했다. 하지만 나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그녀가 있기에 나는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가 이곳으로 올지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 이만 포기해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을테니. "
" 너…. "
나와 로라를 둘러쌓는 4명의 검은 남자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그들이 원하는건, 내가 가지고 있는 쿠피디타스, 그리고…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자, 로라였다. 물러설 곳도, 그렇다가 맞서싸우기 애매한 그때, 나는 문득 그 남자가 내게 건네준 단도가 떠올랐다.
" 이잇…!! "
나는 재빨리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단도를 뽑아 들어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그들은 내가 무기를 갖고 있다는걸 몰랐는지 약간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레안, 그 남자 또한 내가 들고 있는 단도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이내 싸늘한 눈동자를 왼쪽으로 돌리며 턱을 쓸어내린다.
" 저 단도…설마…. "
그 순간, 나를 향해 망설임 없이 다가오던 한 남자가 복면을 집어 던지며 이내 나를 등지며 선다.
" 전에 말했지, 로라님을 위험에 처하게두지 않는다고. "
" 너, 너는…. "
" 로라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
" 사우…. "
" 이 녀석들은 내가 맡을테니, 너는 서둘러 쿠피디타스의 의식을 시작해라. "
" 너…. "
그 남자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들을 향해 검을 뽑아 들고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 덕분에 나와 로라는 그들의 속박에서 멀어날 수 있었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는 레안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다. 그는 자신을 배반한 사우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말문을 닫고는 이내 격앙된 모습을 보이며 소리친다.
" 사우…네 녀석이 날 배반한거냐!! 감히, 어떻게!! "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며 사우를 향해 소리치는 그를, 사우는 한심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한다.
" 내가 설마, 네 같은 녀석의 마수에 걸려 넘어 갔다고 생각하나? "
" 뭐, 뭐라고?! "
" 단지, 어쩔 수 없었을 뿐이야. 네 녀석 밑으로 들어가면 내가 찾고 싶어 했던 물건을 쉽게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거든. "
" …너, 설마 내 밑으로 들어온 이유가…쿠피디타스를 손에 넣기 위해…? "
" 왜…놀라운가?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쿠피디타스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하는 너처럼, 나도 한 번 너와 장단을 맞춰 줬을 뿐이다. 네 녀석의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찾을 수 있었지만, 네 녀석의 성격을 보아하면 금방이라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그것만큼은 네 녀석에게 실망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손에 넣을 수 없는, 무력한 너를 보면서!! "
그의 주위로 힘 없이 쓰러진 3명의 남자를 보자, 레안도 이 이상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는지, 자신의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단도 두 개를 꺼낸다. 그 모습에 그는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는다.
" 나와 겨뤄보고 싶은건가…? 하지만 힘들텐데…네 녀석에게 당할 정도로, 나는 약한 남자가 아니거든!! "
이내 그는 레안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갔다.
" 널 죽임으로써, 지금껏 가슴 속에 품은 한을 토해내겠다!! "
그들의 격돌,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들의 공격에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 볼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절대로 밀리지 않았다. 나는 내심 그가 쉽게 레안을 이길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딱 보기에도 그랬고, 레안은 너무나도 쇠약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다. 의외로 레안이 그를 짖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왕과 신하 사이이지만, 한 편으론 같은 마우린이기도 했던 두 남자였을텐데…어찌하여 저런 격차를 보이냔 말이다.
「 털썩 」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속력으로 상대방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그들 중 바닥으로 쓰러진건 다름 아닌 사우였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긴 검은 이미 검으로써의 힘을 다한 듯,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모습으로 레안을 향해 기울여져 있었다.
" 날 죽인다고 했던 말…그건 그저 허풍이였나? 너는 새까맣게 까먹고 있을지 모르겠는데…마우린에 있었을 때의 나는, 절대로 네 따위에게 무너질 사내가 아니였거든. 그때 한 번 패배의 쓴 맛을 당해봤을텐데…아아, 너무 큰 충격이라서 까먹고 있었던가? 미안하다, 너의 아픈 상처를 치료해주진 못할 망정, 도려냈으니까 말야. "
처참히 무너진 그의 모습에, 레안은 낄낄대며 웃는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그의 얼굴에선 전의를 살싱한 남자의 눈물이 보였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말이였다. 레안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두 손에 들고 있던 단검 하나를 자신의 허리춤에 집어 넣고는, 남은 단도를 그 남자에게로 던져준다.
「 툭 」
바닥으으로 내던져진 단검의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려왔다. 분명 떨어진 곳은 풀들로 무성한 대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날 죽이고 싶다면, 한 번 죽여봐라. 나는 검을 들지 않겠다. 한 번,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라. "
" …이 자식. "
" 어떠냐, 이래도 내게 저항할 셈인가? 이미 너희들은 이곳에 올라온 시점부터 모든건 정해져 있었다. 그건 내가 바로 쿠피디타스를 손에 얻는거지. 그리고 내가 지금껏 꿈꾸려는 이상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되는거지…. 자, 이만 순순히 물러나라. 그렇게만 한다면 너는 물론이고 네 뒤에 있는 여자도 무사할테니. "
" …내 뒤에 있는 여자라고? 어찌 너는, 네 어머니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 있는거냐!! 아무리 삐둘어졌다고해도, 로라는 네 어머니야, 네 어머니라고!! "
" 웃기는 소리하지마!!! "
!
" 어머니라고…? 언제부터 그 여자가 내 어머니가 되었지? 내 어머니는 그 여자가 아니야, 나의 어머니는…내 엄마의 이름은 로이즈다!!! "
그는 울부짖었다. 단순히 화 때문에 내지른 말이 아니였다. 그는 정말로 죽은 자신의 어머니 로이즈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로라는 놀란 표정으로 그런 레안을 바라봤고, 이내 로라의 얼굴엔 슬픔이 내려 앉았다.
" 내 어머니라고…? 웃기는 소리하지마…세월이 흐르고 강산이 수 백 번 바뀐다해도, 내 어머니가 로이즈라는건 변함 없어…아무리 그녀가 나의 아버지인 란과 혼인을 했다해도…그 사실만은,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 "
그는 이내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슬픔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그의 행동에 당황해한건 나 뿐만이 아니였다. 그가 건넨 단도를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그 역시도 생전 처음 봤다는 레안의 모습에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레안의 모습을 보며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로라를 보며, 나는 레안의 행동이 이상하다는걸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저 남자의 꿈이 이 세상을 손에 넣는 것인게 의심이 갈 정도로, 그의 모습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풍겨졌다. 그는 이내 힘을 잃은 두 다리로 인해 바닥으로 주저 앉고 말았고, 한참을 슬픔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 …너희들은 그저, 내가 이 세상을 손에 넣기 위해 쿠피디타스를 찾는다고 알고 있겠지. 그래 맞아, 이 세상을 손에 넣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던건 그런게 아니야. 나는 단지, 내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원통하게 돌아가신 그분의 길을 비춰주기 위해, 이 비통하고도 애통한 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난, 쿠피디타스를 손에 넣고 싶었을 뿐이라고!! "
…무, 무슨 말을 하는거냐, 레안. 쿠피디타스를 손에 넣으려는 이유가, 이 세상을 손에 넣는게 아닌, 순전히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는거냐…? 그걸, 지금 우리보고 믿으라고…하는.
" 나…오래 전부터 이런 세상을 싫어 했다. 아니, 이 생각을 하게 된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날, 나의 어머니가 마키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때부터였으니까. 난, 마키를 증오했다. 아니 저주했다. 나의 어머니를 죽인 마키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지않아 하루가 멀다하고 마우리스 산으로 쳐 들어가 그 녀석을 죽이는 상상을 몇 번이고 했다. 그래야만이 어머니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 아버지인 란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다 자연의 순리이며, 죽음이 있으면 삶도 있는거라 그분은 말했다. 어머니가 죽은 이유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며 아버지는 나를 말리셨어. 하지만, 그분의 생각은 나와는 너무 정반대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사흘동안 밥도 제대로 먹질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나와는 달리, 그분은 어머니가 살아 생전의 모습 그대로를 보이셨으니까…. 그 때문에 나는 마키에 대한 원한이 조금씩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나보다 더 많은 세월을 보낸 어머니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보낼 수 있냐는 의문과 함께 그분에게 향한 분노가 하루가 멀다하고 치솟았다. 그날부터였을거야, 조금씩 아버지와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 그분의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고 그분이 하시는 말은 모두 간섭이라 생각하고 내 스스로에게 자물쇠를 채웠으니까….
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다시금 붉게 물들며 바닥을 적셨다.
" 나는 하루 하루를 마키를 죽이기 위한 생각으로 밤낮을 아울러 곰곰히 머리를 싸매었다. 금방이라도 그 녀석을 죽일 수 있다는 희망에 나는 하루 하루 행복한 기분에 사로 잡힐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겐 너무나도 높은 장벽이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로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맞닥뜨린거야. 그때 나는 아버지보다 힘이 없었고, 그 녀석에게 대응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힘이였다. 더군다나 그 녀셕이 이끄는 마우린이라는 부족 때문에 쉽사리 그 녀석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힘으로 안된다면, 그 녀석의 밑으로 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다는걸. 나는 알고 있었어. 그 녀석이 쿠피디타스를 찾아 헤맨다는걸, 그 녀석의 야망이 세상을 손에 넣는 것이였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서 나는 그 녀석의 밑으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 녀석과 함께 있다면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지. 하지만 그날 밤, 아버지는 몰래 밖으로 나가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마우린에 들어 간다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걸 알기 때문에 나는 전력질주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뒤를 돌아봤다. 나를 쫓아올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어. 처음부터 나를 따라올 생각이 없으셨던 모양이지. 조금은 섭섭했다. 그래도 나에 대한 애정이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마키와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마우리스 산으로 향했다. "
레안은 웃었다. 그때에 상황이 떠올랐는지 흡족한 미소를 보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금방이라도 하하 웃으며 자리를 벅차 일어날 것만 같던 그가 다시금 미소를 잃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눈가에 흐르던 눈물은 멎어 있었다. 턱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눈물방울이 톡하고 떨어진다. 그리고 멈췄던 그의 입 또한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러나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아버지가 날 쫓아오지 않은 이유, 그걸 깨달았을 때는…이미 그분은 내 곁에 없었으니까…. "
P.s : 앞으로 4편, 슬슬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는 루에르입니다.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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