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이미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루에르- 영원의 신념 2 -2 - 14
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이 지긋지긋한 악몽 속에서 나는 깨어날 것인지, 아님 이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이대로 고인 웅덩이처럼 메마를 날까지 기다리든지.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이 옳고 그름을 나타낼 뿐, 나는 이제 선택해야만 한다.
늬엿늬엿 저가던 붉은 하늘에서 조금씩 동그랗고 새하얀 달의 모습을 나타났다. 그 어느 때보다 동그랗고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한 달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가득 든 쿠피디타스를 차례차례 바닥으로 내려 놓았다. 그날, 란이 대지를 향해 떨어지는 그곳에서 나는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을 알린 마우리스 산 정상에서, 이 모든 것을 끝내려한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정읜지, 아님 악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너무나도 안타까운 현실, 내가 이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 놓는다면, 이들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위로 받을 수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한 행동에 헤어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버리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일거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모두 자신의 속박에서 빠져 나오게 하고 싶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상처 받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의 심장은 아플 듯이 눈시울을 건들였고, 떠올리고 싶지 않던 과거의 환영이 내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같아,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라셀, 로라, 레안, 사우. 이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설치해놓은 덫에 걸려 스스로 빠져 나오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나아지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해서 나빠지는 일도 없는, 그저 공허, 그 자체였다.
" 루에르, 시간이 없어…빨리 시작하지 않으면…되돌릴 수 없게 되. "
힘겨워하는 라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지막까지 흔들리는 나의 마음을 스스로 추스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내 앞에 닥쳐온 고난과 시련들이 지금 이 상황에선 그저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너무나도 긴박한 상황에 놓여졌다. 한치라도 내 마음의 끈을 놓는다면 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며, 마지막 남은 기회 역시 하늘 위로 사라질 것이다. 나에겐 기회는 딱 하나, 이들의 염원을 통해 모든 쿠피디타스를 소멸시키는 것, 그로써 벌어질 책임은 나 혼자서 짊어지겠다는, 단지 내겐 지금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 내가 미리 그분의 마음을 눈치 챘더라면…그런 비극은…일어나지 않았을거다. ”
“ 그이가 죽었어도 그이를 사랑했던 마음은 변치 않으니까요…저는 그저 그이가 남긴 죄를 대신해 갚아갈 뿐, 그이를 탓하거나 원망하지않아요. ”
“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쿠피디타스, 그것만 없었다면 이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없애려는 악과, 그의 맞대응을 하기 위해 쿠피디타스를 지킨 자. 하지만 그 결과는 파멸의 극치였다. 이 모든 악순환을 극복하기 위해선 쿠피다타스를 파괴하는 것, 그 수 밖에 없다. ”
그동안 그들이 내게 한 말들이 머릿속에 마구 스쳐지나간다. 망설이는 나의 모습을 그들이 눈치채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그들이 한 말대로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최종 선택을 해야만 한다. 란이 불행한 죽음을 맞은 것도, 리오크가 애꿎은 죽임을 당한 것도, 로라가 꾹 참으면서까지 버텨내야 했던 것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한 때 어긋난 길을 걸었던 레안도. 이 모든 행동의 근원은 쿠피디타스란걸, 잊어선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곳에 온거다. 세상이 멸망하던 그때, 나는 이 모든 근원을 파헤치기 여기까지 오게 됬다. 쿠피디타스를 통해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들려진 옛날 그 비극의 시작,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비극의 눈물을, 나만이 막을 수 있다.
" 나…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어. 별거 아닌 일들 같은데도,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귀중한 일들 뿐이였어…. "
" …루에르? "
" 나, 해낼거야. 지금까지 수고해온 나를 위해서…그리고, 나와 함께 달려준 친구를 위해서라도. "
" …루에르. "
" 이젠 망설이진 않아. 머뭇거려봤자 이 상황은 절대로 뒤바뀌지않아. 내가 망설이는 몇 초가 누구에게는 1년과 같은 시간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나…할거야. 이 세상을, 이 세상에 상처 받은 모두를 위해서…나, 할거라고!! "
이젠 괜찮아, 이젠 할 수 있어.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되. 처음엔 힘들지라도, 처음이 아니니까…. 나는 벌써 한 번은 했으니까…. 그러니까, 또 한 번 성공할 수 있어. 그때 쿠피디타스를 봉인 했던 것처럼….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처럼…. 나, 할 수 있어. 그러니까…날 믿어줘. 내가 할 수 있다는걸 알고, 내게 힘을 줘….
그 순간, 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빛을 내뿜으며 저절로 내 주머니 밖으로 튀어 나갔다. 튀어 나간 물건은 다름 아닌 돌 2개. 하나는 사로이가 내게 준 것, 또 하나는 로라가 내게 준 것. 하지만 사로이가 준건 이미 빛을 잃고 평범한 돌멩이가 되있었을텐데, 왜 두 개 다 빛을 내고 있는거지? 분명, 그때 쿠피디타스를 봉인하고 사로이가 준 돌은 빛을 잃었을텐데….
“ 네가 그 돌을 사용 했을 때는, 네가 왜 나한테 그 돌을 받았는지에 대해 알 때겠지. 그 전까지는 나는 절대로 네게 그 이유를 말하지 않겠어. ”
“ 사로이는 네게 돌을 준게 아냐. 네게 잠시 맡긴 것 뿐이다. 네가 그 돌을 갱생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야, 루에르. 너라면 그 돌을 사용할 수 있어. ”
그때, 라셀이 한 말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대답이였다. 나한텐 그런 힘이 없다고 난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내가 이 돌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때, 이 돌은 빛을 발했다. 쿠피디타스를 봉인하던 그때, 이 돌이 빛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곳에 올 수 없었겠지. 그러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뿐더러, 나는 계속해서 한 자리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을거야. 그러나, 지금 나는 이곳에 서 있다. 그때 그 일이 있던 뒤에 또 한 번 이곳에 돌아왔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오고 싶었지만 그러할 수 없었다. 이미 너무 늦었고, 되돌릴 수 있다고해도 변하지 않는게 아니다. 제일 중요한건, 우리들이 입은 상처만이 더욱 더 커질 뿐일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할 수 밖에 없는거다. 이 상처가 더 커지기는걸 막기 위해서라도.
「 척 」
내 한 손에 들린 푸른 달의 쿠피디타스. 그 모습은 완전한 형태의 쿠피디타스였다. 내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 이게 다 그때 사로이에게 받은 쿠피디타스로부터 시작됬다. 아무 것도 모르던 내게 쿠피디타스의 존재를 알려주고, 이 쿠피디타스를 맞추기 위해 나를 자신의 환영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 나는 그 환영 속에서 나머지 조각을 찾아 하나의 모습으로 완성시켰고, 나는 그대로 과거의 루에르 마을로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알지 못했던 이 사실의 진실과, 그 진실 속에 가려진 흑막을 찾아냈다. 이 모든 일은 누군가의 소행이며, 그 누군가로 인해 이 세상이 이런 파멸을 낳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왜곡된 것이였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였다.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과 아픔, 고통, 슬픔을 스스로 치유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누구에게 기대지 않으면 평생 남아 있을 흉터처럼, 그들 스스로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상대를 쿠피디타스로 정했을 뿐,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다른 이의 행복을 무참히 깨트렸다. 자신이 원했던 일이 아니었음에도 쿠피디타스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헤쳐 나가야 했던 관문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악하지 않다. 그들이 한 행동을 보아하면 그들은 그 자체로 악이겠지만, 그 악을 만든 것도,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도, 모두 쿠피디타스로 인해 그릇된 현실이였다.
" …이 정도로 만족하나? "
" 뭐…? "
" 이 정도면, 충분하냐고. 이 정도면, 네 죄를 씻을 수 있냐고!! "
" …!! "
" 이제 그만, 네 속박에서 벗어나. 그 속박에 갖혀 있는 한, 넌 절대 네 죄를 뉘우칠 수 없을테니까, 정말로 네가 란에 대한 미안함이 크다면, 스스로 속박에 가두지마라…. 이건 란이 네게 남긴 마지막 부탁이자, 로라의 바람이기도 하니까…. "
레안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더 이상 그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그 자신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알 수 있을테니까, 단지 그 안에서 헤어 나오는게 조금은 버거울 뿐, 하지만 여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 나는 그에게 바라는건 없다. 그저 그 자신이 스스로를 가둔 속박에서 나오는 것을 두고 보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사로이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내가 알 때까지 그 돌을 준 이유를 말하지 않겠다는 의도조차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내가 라셀을 만날 것도, 내가 로라를 만날 것도,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것 또한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내게 돌을 건네준 이유, 그건 바로.
" 루, 루에르!! "
내게 두 번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였다.
달을 향해 높이 치켜 세우는 쿠피디타스로 인해, 밝게 빛나던 달빛이 모조리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그 모습에 주위에 있던 라셀이 깜짝 놀라며 나를 불렀지만, 이미 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달빛 앞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강력한 파동과 함께 모든 달의 움직임이 나의 손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아, 자칫하면 쿠피디타스가 손에서 미끄러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내 발 밑에 놓여진 2개의 쿠피디타스 또한 크게 요동을 치며 대지를 움직였고, 내 뒤에 놓여진 두 개의 돌 또한 엄청난 굉음을 내며 내 주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 크윽…!! "
쿠피디타스를 잡고 있는 힘이 너무나도 버겁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강력한 힘에 나는 힘 없이 바닥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두 다리를 지탱하며 달빛의 기운을 받기에는 내 힘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금방이라도 달빛에 집어 삼킬 것만 같은 나를 보며,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오직 내 쪽을 향해 머물렀다. 나에게 모든 희망을 담은 그들을 보며 나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멈추기엔 그들이 버텨온 삶들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내가 겪은 일에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그들은 너무나도 상처 입은 모습이였다. 그들은 오직 나를 믿으며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멈춘다면, 그들의 기대를 산산히 조각내는 꼴이 된다. 아무리 사로이가 나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었다해도, 다시는 엄두도 못할 것만 같을 정도로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쿠피디타스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중이였으니까.
" 루에르, 힘내라…. 너만이, 너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어!! "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 제, 제길…역시나 불안정한 상태에선, 어쩔 수 없는건가?! "
하늘을 가득 비추던 달빛이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내 두 손에 들려 있는 쿠피디타스는 조금씩 부서지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내 발 밑에 놓여진 쿠피디타스는 하나 하나씩 그 빛을 잃고 조금씩 파괴되어 간다. 내 뒤를 잡아 주는건 로라와 사로이가 준 두 개의 돌 뿐, 조금씩 조금씩 나는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 이잇…!! "
젠장…. 역시 불가능한 일이였나?
" 루에르!!! "
응축된 하나의 빛이 이내 나를 집어 삼켰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광채에 눈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까맣게 물들어가던 하늘 역시도 새하얗게 변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주위에 있던 이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무(無)의 세계. 나는 점점 나를 짖누르는 달빛에 서서히 내 모습을 잃어갔다.
게임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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