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잔병> - 3 -
내 부름이 그의 귀까지 닿았을거라는 믿음으로 10분, 그러나 그 녀석의 모습은 달의 강한 빛으로 인해 물들었는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이번 일은 물론이고, 후에 있을 일까지 그 녀석이 모조리 책임져야한다는 이유 하나로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그 녀석은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습은 커녕, 흔적까지도 남기지 않는다.
"하아…."
오늘은 너무 늦은걸까, 아니 그럴리는 없다. 내 목소리라면 언제라도 달려와주리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봐서라도 그 녀석은 나타나야한다. 지금 이 달이 지고 뜨거운 태양이 다시금 하늘 위로 솟구칠 무렵, 아마 그 녀석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흐를게 분명.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의 매듭은 확실히 져야한다.
"…."
내 목소리를 들었으면 제발 내가 있는 곳으로 와라, 이대로 네가 이 일에 심각성을 인지 못하고 그렇게 사람을 피하며 이 사실에 대해 묵언한다면, 모든게 네 탓으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나 또한 네 녀석이 그런 녀석이 되는걸 원치않아, 더불어 요즘 들어 이 근처에 안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 같아서 너에 대한 안위도 걱정된다.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주군께 전달된 편지하며 그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로 인해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일로도 머리가 아파 미치겠는데도 너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단 말이다. 그러니 부탁이다. 제발…나타나라.
『』
레오스 숲으로 가는 도중, 아리아가 내 귀에 꽂아준 꽃이 꽤나 신경 쓰인다. 본인은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표정이지만, 정작 본인 나 자신은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 몰래 꽃을 내려 놓으려는 생각도 했지만, 그녀가 날 위해서 꽂아준 꽃이란 생각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침실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리를 위해 한 땀 한 땀 열심히 목도리를 짜기 시작한 아리아의 들뜬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기달려, 다음 주까진 짜놓을테니까!"
"어련하시겠어요. 천하의 아리아께서 이런 뜨개질도 못하겠어요? 잘 하시겠지요."
"지금, 나 비꼬는거야?"
"아니요, 그럴리가요."
"아나…."
단지 그녀의 옆에서 사과를 먹고 있던 내게 과도만 던지지 않았다면, 참 귀여웠을텐데…. 그 점이 조금은 아쉬울 뿐이다. 다행이 큰 상처로까진 나지 않았지만, 곧 있으면 힘줄이 파열되고 한쪽 팔이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약간 된다. 하지만 그런 면이 있기에 아리아가 그렇게 해맑을 수 있는거지만…. 단지 지금은 그녀가 하루 빨리 병을 이겨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면 하는 생각 밖에 없다. 그러는게 목도리를 짜는 것보단 백 배, 천 배 더 효과적일테니까. 모름지기 그런 편이 베르에트에겐 더 큰 힘을 줄 수 있을테니.
"베르에트…."
"미안해 아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어.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너에게 실망을 주어서 미안하지만, 목공소에서 일하는 것보단, 이쪽이 내게 훨씬 잘 맞는 것 같아. 정말로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나 혼자 가게 해줘."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전장에 가야하는 베르에트의 모습을, 나는 차마 고개를 들고 쳐다볼 수 없었다. 너무나도 확신이 찬 그 녀석의 눈빛과, 그런 베르에트를 더 이상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에 내 자신 스스로가 초라해보였으니까. 더 이상 그 녀석과 대면하는 것도, 그 녀석을 마주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오늘로써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마음 같아선 이 녀석의 사지를 뜯어내어 반 병신을 만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도 생긴다. 그러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이리 한이 되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후회스럽다. 그 녀석을 위해서라도, 아리아는 위해서라도, 절대 그 녀석을 보내서는 안됬었는데….
"그럼, 아인. 그리고 아리아에겐 비밀로 해줘."
"…싫어."
"뭐?"
"싫다고, 내가 왜 아리아에게 비밀로 해야하는거지? 네가 하루만 안 보여도 그 녀석은 네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 내게 물어볼거야. 그럼 나는 그때마다 거짓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너, 하나 밖에 없는 친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생각이냐?"
"아인, 너도 잘 알잖아. 어쩔 수 없었다는걸, 내가 전장에 가는걸 아리아가 안다면 극구 말릴거야. 그럼 서로서로가 불편해져, 너도 그런 모습을 원하는건 아니잖아?"
"그래서 아리아 몰래 가겠다?"
" 그래, 아리아에겐 미안하지만, 이 점이 아리아에게도 너에게도…."
"베르에트!!"
"!"
"네가 진정, 아리아를 생각한다면 이 일은 네 입으로 직접 전해라. 네가 전장에 간다는 사실을 아리아에게 말해, 그녀가 가지 말라고 너를 붙잡는다해도 어처피 네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는걸 잘 알아. 너는 옛날부터 한 번 꺼낸 말은 무조건 지켰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라. 네가 아리아를 위한 일과 아리아가 너에게 바라는 일이 얼마나 큰 차이를 두는지."
"아인…."
"그리고 결정해라, 이 일이 내가 진정 아리아를 위해서 하는 일인가, 아님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나서는 행동인가를."
너의 표면적인 모습을 본다면 아리아를 위한거겠지만, 너의 내면적인 모습은 그저 살육의 맛에 눈을 뜬 한낱 미치광이에 불과해. 평소에는 평범한 너의 모습을 유지했다면, 전장에선 너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그렇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너의 의지로라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네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욕망에 너는 스스로를 죽음에 다가서고 있는거다. 그런 너를 막을 수 없는 나는 너에게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너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자, 그건 아리아 뿐이겠지.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네 한 켠에 자리 잡은 또 다른 너를 뽑아낼거라 믿으니까. 그러나 너는 결국 아리아에겐 알리지않고 전장 떠났다. 지금에 너로서는 그게 최선이고 네가 다할 수 있는 도리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머지않아 너는 후회하고 말겠지.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말야.
"…."
그런 줄도 모르고 전장을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두 번씩이나 깨트린 너에게 주겠다며, 편치않은 몸으로 목도리를 짜고 있는 아리아를 보면 너무나도 내 마음이 아프다. 살아 돌아올지 모르는 이 시점에서, 그저 잠시 여행을 떠났다는 말을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녀석을, 나는 어떻게 바라보면 좋겠냔 말이다.
"베르에트…이게 진정 네가 원하던 모습이였냐?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니 네 속이 후련하냐?"
"응, 엄청 후련한걸."
너라면 이런 말을 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너는 홀연히 얇은 형상을 이룬 것 밖에 되지 않는구나. 잔잔히 들려오는 네 목소리도 천천히 멎는걸 보니까. 네가 전장으로 향한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밥을 잘 먹고 다니는거냐? 설마 어딜 다친건 아니겠지? 오랜만에 이곳에 돌아오는 네 녀석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있으면 내가 널 가만두지않을테니 몸 조심히 간수해라. 그리고 꼭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라. 그래야 아리아가 주는 목도리를 잘 메고 다닐테니….
「」
결국 나타나지 않는건가…. 시간이 흘러도 가르톨의 기척은 커녕, 다른 녀석들의 움직임도 들을 수가 없다. 내가 서 있는 이곳만 시간이 멈춘 듯,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움직임도 느낄 수 없다. 그저 흔들거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불투명한 그 녀석의 그림자만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하아…."
역시나 아침에 그 녀석의 머리털을 자른게 흠일까, 그 녀석이 머리털을 애지중지하는건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아끼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봉긋하게 올라 올거라 생각했지만, 뒤늦게 생각해보니 전에 그 녀석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 메그로(토토로와 흡사하게 생김)들의 머리털은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자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잘못으로 머리털이 잘려나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우리들은 평생 그 머리털을 유지하며 살 수 밖에 없지. 그렇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머리털을 건들이기만해도 우리들은 무척 난폭해지지. 그러나 다행이도 인간들은 우리들보다 작아서 우리의 머리털을 노릴 수 없으니 다행이야.〃
"…."
미안하다.
그 녀석에게 저지른 악행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내가 도대체 가르톨에게 무슨 짓을 한거냐며, 내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나야 머리털이 잘리면 금방 자라지만, 그 녀석들은 평생 한 번 밖에 자라지않는 머리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머리털을 건들면 안된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어. 나도 당연히 그 녀석의 머리털을 뽑을 수 있는건 그 녀석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같은 동족이라고 생각했거늘, 그 때문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잊고 있었다.
〃아, 아인. 이, 이게 어찌된….〃
"걱정마, 네 녀석이 그들을 해치지 않았다는걸 알고 있으니까. 결과가 어찌됬던간에 네들을 절대로 사람을 해할 녀석들이 아니란걸 알고 있으니까. 아, 그리고 잠시 머리털 좀 빌린다."
〃에엑?!〃
"네가 범인이 아니라고해도 그냥 돌아간다면 또 다시 이곳을 범하는 녀석들이 올지 모르니까, 그에 대비하는 증표야.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하지마. 머리털은 금방 자라지만, 머리는 다신 자라지 않는다고…."
이 멍청아…그 반대잖아.
"하아…."
이 잘못을 어찌하면 용서 받을 수 있는지가 큰 관건이군. 지금 다른게 문제가 아냐, 어떻게해서든 그 녀석의 화를 풀어야한다. 안 그러면 정말로 그 녀석들이 사람들을 해칠지도 모를테니까. 아마도 그런다면 모든 잘못이 나한테 있겠지만….
잠시 자리에 멈춰선 나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빼곡히 들러싼 나무들 덕분에 하늘을 볼 순 없었지만, 초록빛깔의 하늘이 잠시나마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자꾸만 아까부터 무언가가 나를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기에 나는 한시도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 부스럭 」
아마도 그 녀석이 날 발견한 모양이다. 조금씩 다가오는 듯한 그 녀석의 발소리가 크게 이 숲 안을 휘젓고 다닌다.
〃그아아아아!!〃
우렁찬 녀석의 울음소리가 숲 안을 가득 메운다. 금방이라도 나무를 부수며 내게로 달려온 것만 같은 기세로 울부짖던 녀석의 목소리가 멈춘다. 3초간의 정적이 나를 이토록 불안스럽게 만들지 몰랐다. 녹색의 빛을 띈 하늘 아래로 즐비한 나무들, 그 주위를 맴도는 듯한 녀석의 거친 숨소리로 인해 나의 긴장감은 더욱 더 증폭된다.
「 부스럭 」
조금씩, 조금씩 그 녀석의 거대한 몸집이 검은 실루엣을 이루며 천천히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
베르에트가 전장으로 가기로 한 당일, 나는 아리아 몰래 베르에트와의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 자리에 아리아도 같이 있어야 했지만….
"결국, 가는거냐? 끝까지 아리아에겐 비밀로 하고선?"
"응, 너에겐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고생 좀 해줘."
"뭐, 일이 이렇게 됬으니 더 이상 뭐라 추궁할건 없다. 하지만 정말 가야하냐?"
"이미 지원자 명단에 뽑혔고, 중도이탈은 불가능하니까. 더군다나 이미 이렇게 차려 입었는데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야."
자랑스럽다는 듯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몸에 두른 철제 방어구와 무기를 보여주는 베르에트를 보며 나는 살짝 굳은 미소가 자리 잡는다.
"마음 같아선 네 녀석과 함께 그 지긋지긋한 곳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지만…."
"너만이라도 아리아 곁에 있어 달라는 내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남겠다는 말을 하려는거지?"
"…."
나까지 전장에 뛰어 들게되면 아리아는 또 다시 혼자가 된다. 두 번 다신 전장을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트렸지만, 그녀를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킨 셈이 된건가…. 하지만 그리 썩 좋지만은 않다.
"걱정마 아인, 꼭 다시 돌아올테니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사지 멀쩡한 상태로 말이야."
"이번 전쟁은 그때와는 달리 힘들거야. 살아 돌아올 자를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럼 내가 살아 돌아온다면 나는 여섯 번째 손가락에 들어가게 되는건가?"
시덥지않은 개그를 치는걸 보면 자기 자신도 떨리긴 하나보다. 전보다 어색한 웃음과 이마에 맺힌 식은 땀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 설령 운이 좋아 이곳으로 되돌아온다해도 사지가 멀쩡하리라 장담할 수 없으니, 하물며 베르에트의 마음은 오직하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후회는 없다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더욱 더 무거워진 표정으로 그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 더 이상 지체하면 큰일나니까."
"잠깐만 베르에트."
"응?"
나는 떠나려는 베르에트를 불러 세운 뒤,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베르에트에게 건넸다. 꼬깃꼬깃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내린 편지와 함께 베르에트에게 주어진 꽃 한 송이에 베르에트의 표정이 살짝 놀란 듯 보인다.
"아리아가 내게 준거야."
"나한테…?"
"사실, 여기에 오기 전에 아리아를 만났어. 원래대로라면 이곳에 아리아와 함께 왔어야 했지만, 네 녀석의 그 모습을 보면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한들, 여행을 갈 행색은 아니니까…."
"아인…."
"나 참, 누구 덕분에 생전 해보지도 못한 거짓말을 지금에서야 하는구만…. 이제야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냐?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도는걸."
"…미안하다."
"…."
"정말…미안해."
"…."
그만둬라, 베르에트.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어쩌자는거냐.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그 일이 끝나기 전까진 너는 다신 이 땅을 밟을 수 없어. 그 사실은 네가 더 잘 알잖냐…. 그러니 내가 뭐랬어, 아리아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자고 했잖아. 그래야만이 네가 정신을 차릴 수 있다고….
"저기 아인, 나와 약속 하나만 해줄래…?"
"약…속?"
"다음에 왔을 때는 아리아와 함께 있어줄래? 원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친구들이 기다리고 그러잖아? 그러니까…."
말을 이어가던 베르에트의 말이 멈춘다. 그는 참고 참았던 말을 억지로 끄집어 내려는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젠 되돌릴 수도, 그렇다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울 실정에 나도 베르에트도 뭘 선택해야할지 모르겠다. 베르에트, 그는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이 정한 일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은 남자였다. 비록 그 일이 잘못된 길이라하더라도 올바른 길로 바로 잡아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그가 오늘만큼은 그 미련을 떨쳐 보낼 수 없는 모양이다. 만약, 내가 오늘 아리아를 만나지않고 베르에트를 만났다면 이 녀석이 이토록 갈등을 했을까? 아무리 내가 뜯어 말려도 고칠 수 없는 그 녀석의 생각을, 단지 그녀가 자길 위해 썼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 녀석의 마음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걸까? 나로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낼 수도 없던 일을, 한낱 편지 한 장과 꽃 한 송이로 움직이다니….
"…."
너의 그 힘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부럽게 느껴진다.
"꼭…약속할게. 다음에 만날 때는 아리아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고마워, 아인."
"무사히, 살아 돌아와…."
이윽고 베르에트와의 짧은 만남이 끝이 났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자와, 멀찍이 떨어진 그를 그리며 말 없이 기다리는 자. 무사히 돌아 오겠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무사히 돌아 올거라는 끈질긴 신념. 난, 그 녀석이 무사히 돌아 올거라고 믿고 있다.
-
"며칠 전, 주군께 날아온 한 통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편지…말입니까?"
"그 편지엔 주군에게 보낼 편지지 이외에 다른 물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원래라면 주군께 갖다드려야하지만 이 부근에서 처음보는 나그네가 건네준 편지라…. 주군에게 건네기 전 제가 잠시 들여다보았는데 이런게 있더군요."
"…이게 편지와 함께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러한데,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갑작스럽게 안 좋아지셨습니다."
"지금 그 편지를 가지고 계신다면, 잠시만 제가 볼 수 있을까요?"
"예? 아, 안됩니다. 아직 주군께서 확인하지않으셨고, 그 편지 안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편지를 전해준 남자를 어디서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뭐, 그건 어렵지 않지만…."
"말씀하시기 어려우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레오스에 있습니다."
"네?"
"제게 편지를 전한 남자를 만난 곳은 레오스에 있었습니다. 그는 전부터 레오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더군요. 혹시나하는 마음에 슬쩍 그자를 떠볼까하는 생각으로 다가가니 역시나 제게 편지를 건네주더군요. 만약 그자를 찾아가실 생각이라면 레오스로 가보시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때, 그 남자가 주군께 드릴 편지 안에 또 다른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편지 안에 들어 있던 또 다른 무언가의 정체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꽃 한 송이였다.
「」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건 가르톨이 아니였다. 그렇다고해서 다른 녀석들도 아니였다. 힘 없이 내딛는 발걸음이 조금씩 앞을 향해 걸어 나갈 때, 점점 나와의 거리가 좁혀지니 그 사람의 모습이 조금씩 내 시야에 들어온다.
"하아…하아…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온다.
"크윽!"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그가 다리의 힘이 풀린 듯 균형을 잃으며 바닥에 쓰러진다. 그 모습에 가만히 서 있던 나는 황급히 그자에게로 달려갔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으으…."
다행히 의식은 있는지 간간히 들려오는 그의 신음소리에 나는 안심 할 수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쓰러진 그는 어떻게서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모양인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내 바닥으로 고꾸러지는 그를 간신히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에게 계속 걸을 수 있겠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젠장…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방금 전의 울음소리, 분명 그건 가르톨이였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가 얼마 지나지가 않아 이 남자가 나타났다. 설마, 정말로 가르톨이…?
나는 슬쩍 남자를 쳐다봤다. 그의 몸 구석 구석엔 온통 상처 투성이였다. 하지만 가르톨의 공격으로 보일만한 상처는 한 군데도 없었다. 아마 이 상처는 무기로 인해 생긴 상처 같았다. 하지만 어찌해서? 요근래에 전쟁이 일어 났다는 소문은 없었는데, 설령 있었더라도 그 사실을 내가 몰랐을리가 없다.
"…."
이 상처, 오래 전에 생긴 상처인가?
자세히 그 남자의 옷차림을 보니, 1년 전에 일어난 가르오와 세렉스간의 전쟁에 쓰였던 갑옷이군…. 그 전쟁은 사상자는 대다수고 운 좋게 살아 남는다고해도 빠르면 사흘, 길게는 일주일 안에 죽는다는 사망률 100%의 전쟁이였지., 그러나 이번 전쟁은 다른 전쟁과 달리 맥 없이 끝났다. 사실 전쟁이란게 오해와 오해가 겹쳐서 이루는 문제이니 어찌보면 단순해보여도, 그 오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니 가볍게 넘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전쟁은 한순간에 끝이 났고, 전장터에 나간 용병들은 하나 같이 무사귀환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마 이자도 그때 그 전쟁에 참여한 용병들 중 하나일테고, 더군다나 그 일은 두 달 전의 일, 그런데 이 남자는 왜 홀로 이 숲 안을 떠돌고 있던거지? 불의의 사고로 인해 복귀가 늦은건가? 그렇지만 이 상처, 몹시 거친 전쟁이였음은 틀림없다. 단지 표면적인 상황만을 봤을 뿐, 아무리 사상자가 극히 드물다하더라도 곱게 끝났을리는 없을테지.
"…."
결국은 똑같은건가.
「 댕그랑 」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던 도중, 바닥으로 그가 쓰고 있던 투구가 벗겨졌다. 투구가 벗겨진 자리에는 무거운 투구 안으로 숨겨진 그의 얼굴이 천천히 윤곽을 드러낸다.
"……미안해."
…!
"아리아…미안해."
"…너."
"아리아…미안해…미안해, 아리아."
"…."
그의 입 속에서 흘러 나오는 낯 익은 이름,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향해 멈춰 있었다. 투구 속에 감춰진 또 다른 얼굴, 그 얼굴 뒤로 보이는 크나큰 슬픔, 쓸어 내려도 내려가질 않는 아픔의 파노라마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일 수 밖에 없었다.
"…."
미안하다. 너와의 약속…지키지 못하게됬다….
P.s : 2화 패잔병 종료, 「」: 현재 - 현재, 『』: 현재 - 과거, - : 과거 - 과거.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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