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킨 실타래> - 4 -
예고랄 것 없이 스쳐지나가는 녀석의 육중한 팔, 가볍게 넘기기에는 조금 버거운 감은 있었지만 못 피할 정도는 아니였다. 녀석이 내지른 팔에는 누군가의 피로 보이는 붉은 액체가 흩날리고 있었고 그 중에서는 설움으로 얼룩진 누군가의 아우성도 있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녀석이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녀석을 때려 눕히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그러나 녀석을 쉽게 눕히기에는 녀석이 너무나도 지쳐있다. 거칠게 호흡하는 녀석은 동공이 풀린 나머지 적과 아군도 구별하지 못하는 듯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공격타겟으로 인식한 듯 팔을 휘두른다. 녀석의 반의 반도 안되는 몸집을 가진 놈들은 녀석의 공격을 피하느랴 바쁘다. 이 정도로 지쳐있는 녀석을 제압하는건 간단하겠지만 왠지 나의 몸은 쉽사리 그 녀석을 향해 다가가질 못한다. 아무리 내가 이 일을 끝매듭하기 위해 온 용병이라해도 그 신념을 버리면서까지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걸 내 몸은 아직도 잊지 않을걸까.
휘몰아치는 바람 속으로 녀석이 나를 향해 돌진해온다. 희뿌연 숨을 내뱉으며 피비린내 섞인 악취를 뿜으며 녀석이 다가왔다. 내 등 뒤로 높이 치솟아있는 나무를 방패 삼아 황급히 나무 뒤로 숨지만 녀석은 가차 없이 나무와 나를 동시에 공격하였다. 지금 이 상황에는 걸맞지 않은 지혜라고 해야할까? 정신이 반쯤 나간 녀석에겐 쓸모 없는 작전이였다는걸 뒤늦게 알아버린 나였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내 몸의 일부가 마비된 듯 저려온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또 다른 공격을 허용했을 시엔 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여유를 가지고 행동했던게 잘못이다. 아무리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만나서라도 절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되는거였는데…. 그런 사실을 잠시동안 잊고 있었다니, 아직 나는 수련이 부족한걸까?
〃그아아아―!!〃
녀석은 쉴 새 없이 나를 향해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공격으로 조금 더 신중해진 나는 재빨리 녀석의 공격을 하나씩 피해가며 녀석과의 거리를 두었다.
섣불리 다가섰다간 기회 없이 끝나고 만다. 방금 전 공격은 그저 우연히 들어간 공격이 아니야. 더군다나 녀석은 지금 이성까지 잃은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해. 지금으로썬 무력을 써서라도 녀석을 제압할 수 밖에 없다.
"…이것만은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 등 뒤에 차갑게 식어있는 검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더 이상 시간을 이끄는건 둘 다 이롭지 못하다. 한 쪽이라도 먼저 이 승부를 매듭 짓는 수 밖에 없다. 약간은 아프겠지만 아니 죽을만큼 고통스럽겠지만 참아내라 그것만이 내가 지금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일테니.
길게 늘여뜨린 검날이 푸른 빛을 띄며 웃고 있다. 진정 이 수 밖에 없는거냐고 몇 번이라도 되묻고 싶지만 선택은 이미 내 의지가 아닌 몸소 증명하고 있다. 나는 이런걸 바랬다, 그저 대화로 싸움을 풀어 헤쳐나갈 정도로 나는 착한 녀석이 아니라는걸,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더 사악하고 흉물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뿐이다. 그때만이라도 내가 악한 존재로 밖에 남을 수 없다. 이곳에서 여느 때처럼 착하게 굴다간 나는 커녕 다른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내 죽음으로써 모든걸 무마하고 싶지만 그것은 나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끈적한 액체로 구성되어 나를 괴롭히는 알 수 없는 이물감이 자꾸만 나의 시선을 빼앗으려 든다. 하지만 그럴 수록 나는 더욱 단단히 마음을 굳히고 그들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죽음으로써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공포가 다른 이의 눈을 피해 내게로 숨어 들어온거다. 하지만 실수했다. 너희들은 절대로 내 눈에 띄어서는 안될테니까.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은거겠지만."
나의 검은 이미 그 녀석의 좌측 어깨와 우측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몸뚱아리에선 추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을 그런 존재로 밖에 여길 수 없는 내 자신이 더욱 더 미워졌다. 내 머리로는 녀석을 이해하고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는 타협적인 이미지로 나를 상기시켰지만 결국 내 정신은 육체를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에서도 나는 웃고 있었다. 기쁨의 웃음이 아닌 또 무언가의 미소를 띄며.
〃그으으…그으으…그으으아아아아―!!〃
―!!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단 말인가?
녀석을 거의 이겼다고 생각했던 나머지 제대로 방어태세를 갖추지 않은 내게로 녀석의 육중한 주먹이 내 머리를 향해 엄청난 데미지를 입히곤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아픔보단 멍함이 지속되는 지금.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있던 푸른 빛 생명들이 점점 기울기 시작한다.
「쿠당탕」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꺽꺽거리며 일어나려는 의지를 보이는 한 남자가 보인다. 단 한 번이였는데,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내가 이런 지경까지 다달았다는건가? 불과 30초 전까지만해도 이 싸움은 내가 다 이긴 싸움이였다. 아니 이 이상 지속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싸움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판이 뒤바뀌었다고? 그것도 짐승이 휘두른 가벼운 공격으로?
"…젠장."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괴롭다. 숨을 쉬려할 수록 갈비뼈가 내 폐를 짖누르는 듯한 고통이 뒤따르자 더 이상 발버둥칠 기력까지 잃어버렸다. 녀석은 이미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모양인지 뚝뚝 흘러내리는 피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희뿌연 숨을 내뱉으며 서서히 내게로 다가왔다. 아마 나를 완전히 끝장내려는 모양이겠지, 녀석이 공격을 한다면 나는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끝이 나겠지. 지금 이 상황에선 방어도 뭐도 다 소용 없을테니.
"…."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포기할 순 없다. 만약 내가 여기서 포기를 하게 된다면 지금껏 내가 헤쳐나간 수 많은 것들이 모두 한순간에 사라진다. 내가 뭐 때문에 이 지경이 되는 동안에도 포기하지않고 달려왔는지를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된다. 순전히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살아남은게 아니다. 나는 증명을 하고 싶었다. 전장 속에서 죽어나간 여럿 병사들이 한낱 날붙이로 인해 개죽음을 당한게 아니라는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들은 싸웠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자신의 등 뒤에 얽매여 있는 수 많은 생명들을 자신의 목숨으로 맞바꿀 정도로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싶어했다. 비록 반 강제적으로 진행되었지만 그들은 한치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자신을 전장으로 내몬 그들을 향해 불평 또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걸어온 이 길을 그저 걸을 뿐이다. 자신이 선택한 이 길에 선 이상 후회는 없다는 단호한 결의. 그 결의가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슬픈 얼굴을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등 뒤에 그을린 그림자에 숨어 자신의 목숨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하나 뿐인 생명을 그곳에 두고 왔다. 나는 그들이 살아있음을 알려야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닌, 자기들을 위해 자신의 목을 내걸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선 내가 이렇게 잠자코 쉬고 있을 순 없단 말이다….
"…난 싸운다. 내가 아닌 그들을 위해서…. 별 볼 일 없는 그들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건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대로 주저 앉을 수 만은 없어…. 이대로 주저 앉기엔…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멈춘 듯, 흩날리던 나뭇잎의 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졌다. 나를 향해 돌진하던 녀석도, 이런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메그로들도, 하늘 위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불어오던 바람도,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멈춘 듯 공허한 숨소리만이 시간이 흐름을 느끼게 해주었다.
〃너…. 이토록 무모하게 나에게 덤비는 이유가 뭐지? 이미 너는 만신창이가 된 몸,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을텐데…. 어찌하여 내게 덤비냔 말이다!!〃
처음으로 들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가느다란 실로 이어진 내 의식을 잡아 당겼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서서히 윤각을 나타내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실 없이 흐트리는 목소리로 녀석에게 답하였다.
"…네 말대로 나는 더 이상 움직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다. 하물며 내 검을 맞고도 그렇게 서 있는 녀석을 쓰러트릴 힘조차 없지…."
〃그런데도 내게 맞서는 이유가 뭐지…? 뭣 때문에 이런 짓까지 하면서 내게 대등하게 맞서려는거냐!!〃
"…그래야만이 녀석들에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나의 죽음으로 그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지만 내 죽음으로써 또 한 번 잊혀질 그들을 생각하면, 난 이대로 주저 앉을 수 없어…. 살이 으깨지고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너에게만은…. 너에게만은 절대로 쓰러질 수 없단 말이다!!"
다시 한 번 꿈틀거리는 나의 검이 그대로 녀석의 가슴을 꿰뚫고 검붉은 슬픔을 터트렸다.
〃…!!〃
"죽이지는 않겠다…. 다만 잠시라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수 있는 시간을 줬으면 하는 공백만을 채울 뿐이다. 그리고 그 공백 뒤엔…. 지금까지 네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겠지. 그 책임을 지는건 바로…너다, 가르톨."
P.s : 즐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