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킨 실타래> - 5 -
「」
언젠간 꼭 한 번 다시 말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 고맙다라는 말과 미안하다는 감정이 섞인 탁한 목소리, 그러나 이미 너무나도 늦어버린 감이 없지 않아 존재하는 공허한 이 공간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잠시 컴컴했던 눈 앞 세상이 조금씩 그을린 자국이 가득 찬 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내 등 뒤로 흐르고 있던 차가운 냉기가 천천히 붉게 달아오르는 듯한 따스함과 함께 으스스한 공기가 서서히 빨갛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드는겐가?"
바닥에 쓰러져 몽롱한 상태로 주변을 흘깃 쳐다보는 내게로 낯 선 목소리가 다가왔다.
"이렇게 늦은 밤에 그것도 사람이 한 명도 지나지않는 그런 곳에서 쓰러져 있다니, 자네 하마터면 입 돌아갈 뻔했어. 안 그래도 날씨가 쌀쌀한데…."
그는 씨익 웃으며 바닥에 놓여진 녹슨 깡통에 담겨진 무언가를 마시며 말했다.
"그런데 같이 누워있던 짐승은 당신이 데리고 다니는건가? 살짝 봤는데 상처가 심하더군. 뭐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여서 가벼운 치료를 해뒀지만 말야."
혼잣말을 하는건지 아님 내게 그 사실을 알리므로써 칭찬을 받고 싶은건지 그는 이러쿵 저러쿵 수다스러운 말로 혼자 히히허허 웃으며 말하다 이내 나를 쳐다보며 슬쩍 가라앉은 눈동자로 내게 묻는다.
"네 정체가 뭐지?"
대뜸 진지한 표정을 하며 입에 걸치고 있던 깡통을 바닥에 내려 놓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의식 탓에 반쯤 풀린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비틀거리는 몸을 서서히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의 상처는 여러 다른 상처들과는 달리 흔한 상처가 아니였어. 좌측 어깨에서부터 우측 골반까지 깔끔하게 잘려나간 상처가 그걸 증명하지, 분명 그 상처는 검에 베인 상처였다. 물론 하찮은 일개 병사들이 휘두른 검에 스친 상처는 아니야. 그 말은 즉, 그 상처는 B급 이상의 용병들이 휘두른 검이라고 볼 수 있지."
마치 자신이 명탐정이 된 듯한 흡족함을 띄우며 말하는 그의 얼굴을 나는 그저 어이 없는 표정을 하며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어느 정도 의식이 되돌아온 듯 갑갑했던 시야가 더욱 넓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내 앞에 앉아 목구멍 아래로 무언가를 억지로 꾹꾹 넣어담는 한 지저분한 남자 또한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됬다.
"네 그 손. 그건 분명 뭔가를 검으로 벨 때 생긴 상처 맞지? 보통 인간을 상대로 싸울 때는 왠만하면 그런 상처는 생기지 않아. 하지만 베기 어려운 상대나 좀처럼 맞대응 할 수 없는 녀석과 싸울 때는 이성마저도 잃는 법, 무조건 이 녀석을 베고마리란 사고방식으로 덤빈 결과 그런 상처를 남기지. 더군다나 무언가게 긁힌 듯 흩어진 옷들하며 불그스름하게 퍼져있는 네 피가그 사실은 더욱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렇게 뻔뻔한 얼굴을 하며 서 있을 수 있나?"
"…혼자 무슨 말을 하는진 잘 모르겠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걸 추측 삼아 재미로 넘겨 짚으려고 하는 네 행동이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했다."
잠자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였다. 싸움의 싸자도 모르는 이런 남자에게 이딴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갑자기 욱하는 성격이 발동한 듯 싶었다. 그리고 그 남자 또한 가만히 있던 내가 소리를 치자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날 그 차디찬 바닥에서 구원해준 것까지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 뒤로 네가 내뱉은 말들 중 내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던 말은 단 한 문장도 없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내용 중 '강한 상대와 싸울 때는 이성을 잃는 법이지.'라는 말이 자꾸만 내 이성을 흔들기 시작한다. 어찌하여 우리들이 이성을 잃는다고 생각하지? 우리들 그저 피에 굶주린 한 마리의 짐승으로 보는건가?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는 가차없이 검을 휘두르는 그런 무모한 자들로 여기고 있는건가? 아니 말도 안되는 소리마. 한 번 검을 든 이상 이 검을 휘두를 시 일어나는 상황과 그 뒤에 나의 뒷통수를 후려칠 후회가 얼마나 나를 후회하게 만드는지 아는가? 싸울 수 없는 상황임에도 최소한의 상처는 주되 절대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우리들은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신념이고 영원히 깨져서는 안되는 숙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 같은 이에게 이런 모욕을 당해야하는거지?"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내뱉을 수록,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나의 동료들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있다. 금방이라도 나의 가슴을 뚫고 이 남자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눌 것만 같은 이성 잃은 그들을 나는 억지로 잠재우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자신의 말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 실실 웃는 표정을 유지하던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새하얗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허나 금방이라도 녹을 것처럼 휘날리는 촛농 앞에 그의 얼굴은 조금씩 붉어지는 듯 했다.
"미안하오."
한동안 애꿎은 깡통만 기울이던 그의 입에서 지독한 술냄새와 함께 그윽한 사죄의 냄새 또한 흘러 나왔다.
"내가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들로만 옅은 지식을 채웠더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먼…. 미안하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들고 있던 깡통을 바닥으로 내려 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의 시선을 맞추었다.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괜찮다면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지 않겠나? 자네의 상처로 보나 그 녀석의 상처로 보나 며칠 쉰다고 해서 나을 상처가 아니던데…."
그는 조금은 섭섭한 표정을 띄며 내게 말하였다.
"고마운 말이지만 나는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있어. 그 일을 끝마칠 때까진 이 걸음을 멈출 순 없을 것 같아."
"…그런가, 조금은 아쉽군…."
그는 시원섭섭한 미소를 띄우며 다시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는 버려진 깡통 옆으로 큼지막한 상자 안에서 또 하나의 깡통을 꺼내 이번엔 내게 그 깡통을 건넸다.
"이미 밤은 깊었고, 돌아간다해도 길이 없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떠나도록 하게. 그리고…."
"…?"
"아니네, 아무 것도 아니야…."
뭔가 하려던 말이 있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조금 신경 쓰인다. 나는 그가 건네준 깡통을 살며시 바닥에 내려 놓으며 그에게 물었다.
"가르톨은 어디에 있지?"
"가르톨? 아, 그 녀석을 말하는건가? 녀석이라면 바깥에 있네만…. 워낙 덩치가 커서 이 안까지는 데리고 들어올 수가 없어서 말야."
"…."
왠지 꺼림직한 기분이 드는건 내 착각일까?
"잠시 그 녀석을 보고 올게."
"걱정하지마, 녀석의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았으니깐."
"아니,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게 있어."
「 끼익 」
만에하나, 만에하나 다시 정신을 차린 녀석이 본래의 모습이 아닌, 광폭한 모습의 짐승으로 남아 있다면….
"…."
이미 너무 늦어버린걸 수도 있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은걸지도 모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하지만 그 길을 따라만 갈 수 있다면….
"…가르톨."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녀석만은 꼭 내가 구해주마.
『』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흩날린 것만 같은 어둠 사이로 흔들리는 커다란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그 주위론 금방이라도 지진을 낼 것만 같은 벌벌거림으로 녀석을 에워싸는 메그로들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싸움은 끝났다. 그러니 더 이상 녀석을 해치지 않아."
이 말만 벌써 3번째, 하지만 이 녀석들을 내 말을 믿지 않는지 그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아주 그냥 녀석의 주위에 파묻혀 살기를 바라는 듯 더욱 더 찰싹 달라 붙는다.
"…나 원."
이 녀석이 곁에 있으면 녀석과 대화를 할 수도 없겠는걸, 원래는 가벼운 상처만 입히고 대화를 주도해나갈 생각이였는데…. 맨정신으론 대화가 가능한 상대는 아니여서 살짝 검을 사용했을 뿐인데 너무 오랜만에 검을 뽑아서 그런지 잠시동안은 내 의지가 검에게 사로 잡혔던 것 같군….
〃그으으…."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왜지…. 왜 날 죽이지 않고 내버려둔거냐…?〃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널 죽이러 온게 아니야. 너와 대화를 하기 위해 온거지."
〃대화를 하러 왔다고…?〃
"응."
〃…웃기는군.〃
주위를 흥건히 적신 피웅덩이 위로 녀석은 자신의 커다란 몸뚱이를 일으키며 자리에 앉았다. 녀석이 움직이자 주위에 있던 메그로들 또한 분주히 움직이며 가르톨의 뒤에 숨는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녀석을 지키기 위해 있던 녀석들이 녀석이 일어나자 그 뒤에 숨는 꼴 하고는….
〃너 같은 인간이 나 같은 한낱 짐승과 대화를 하러 왔다고?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거냐!!〃
"믿으라고 강요하진 않겠지만, 최소한 너와 싸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이 이야기를 매듭 짓는걸 선호하는 편이다. 또 하나, 네가 왜 레오스를 공격하는지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도 있고."
〃지금 나와 거래를 하자는거냐?〃
"아니, 대화를 하자는거지. 원래라면 난 널 죽이고 너의 목을 주군께 바치면 끝나는 일이지만 그런 방식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리고 한쪽의 의견만을 듣고 행동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서 말이야."
〃어처피 너도 인간이지 않나? 어떠한 이유로 나를 현혹시키려해도 어처피 너는 인간이다. 인간과 짐승이 서로 대화로 풀어나가는 일이 있을 수나 있는 일이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하지만 시도조차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막무가내로 결론 짓는 인간이 아니거든. 다른 녀석들은 모르겠는데 나만큼은 그런 녀석이 아니라는걸 너한테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꺼져라, 아무리 내가 너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한다 한들, 앞에서는 내 얘기의 귀를 기울여준다하더라도 뒤에선 이런 날 우습게 여기겠지….〃
"아니 나는 다른 녀석들과 다르다니까…."
〃웃기는 소리마라!! 아무리 그래도 필시 너는 인간의 피를 이어 받은 또 하나의 인간, 어찌하여 짐승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냔 말이다!! 어처피 너의 인간들은 하나 같이 속물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마는 녀석들이라고!! 하물며 자신과 함께한 동료마저도 버릴 만큼…. 그들은 악독하고 영악한 놈들이다. 너는 다를거라고? 아니 내 눈으로 봤을 땐 너도 다른 놈들과 다를 것 없는 인간이다. 그건 몇 년이 지나고 몇십 년이 지난다해도 변치 않은 사실이야!!〃
"너…. 혹시 전에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나? 그것 때문에 이런 행동을."
〃네 따위가 알 것 없다―!! 어처피 너 또한 다른 인간에 부탁을 받고 여기까지 온 몸, 그 부탁만 아니였더라면 나와 마주칠 일도 없었겠지…. 이 지긋지긋한 악몽을 나는 또 한 번 이 자리에서 실현시키고 말았다. 그것도 너 때문에…!!〃
녀석은 이미 마음의 문을 닫은 듯 보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존재로 남겨진 이 상황에서 내가 저 녀석에게 어떠한 말을 해준다 한들, 지금의 저 녀석으로썬 그저 빛을 보고 달려드는 날파리 같은 존재일거다. 아무리 내가 녀석에게 다가간다해도 그저 녀석은 나를 성가시게 볼 뿐이겠지.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겠다. 지금의 너는 절대로 나와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니까."
〃…꺼져라,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마.〃
"내일 또 오겠다. 그때는 오늘과 같은 반응으로 맞아주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네 녀석의 얼굴을 또 한 번 보고 싶지 않으니, 당장 여기서 꺼져!!〃
녀석의 고함이 흩날리는 나뭇잎을 일그러트리며 산산히 부서졌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또 다시 레오스를 공격할 리는 없겠지만, 만약 내일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면 조금은 촉박해질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가 살짝 베었다해도 그 몸으로 저렇게 말까지하며 앉아 있는걸 보면, 녀석도 보통 놈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지. 하물며 저런 상태에서 며칠을 보냈다간 또 다시 녀석이 레오스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일단은 돌아가되 내일 또 다시 온다. 내일도 안된다면 또 그 다음날에도 온다. 그래도 안된다면 또 한 번 녀석을 찾는다. 비록 주군이 부탁하신 내용과는 조금 다를진 몰라도 무턱대고 살생을 하는건 안된다. 아무리 악한 녀석이라 하여도 그 원인은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 원인의 뿌리를 뽑는다면 녀석 또한 레오스를 공격하는 횡포 또한 막을 수 있겠지. 비록 오늘은 아무 것도 건진건 없지만 이 정도로도 만족해야하나….
"가르톨이라고 했나?"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마라 인간, 네딴 녀석의 입에 올려지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니.〃
"네가 왜 이 지경이 됬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을 생각이지만, 이것 하나만은 답해줬으면 하는데."
〃꺼지라는 내 말이 안 들리는거냐?!〃
"네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때문에 네가 이렇게 변한건지에 대해선 별로 궁금하지 않아. 하지만 그 때문이라면 당장 그만둬. 애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걸, 잠자코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다른 녀석은 건드려도 되지만, 자신의 종족은 건드리지 말라 그 말인가…? 그르르…. 어처피 너도 똑같은 인간이다. 자신이 아니라면 다른 그 누구도 상관 없다는 식의 그 말투…. 역겹다 못해 추악할 지경이다!!〃
"…이건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가르톨."
〃뭐…?〃
"남을 괴롭힘으로써 자기만족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과거에 자신에게 닥쳤던 일들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겪은 일을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똑같이 겪게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냐는 말이다."
〃…그걸 지금…말이라고 하는거냐?!〃
"다른 이를 불행하게 만들어 자기만족을 하는 녀석은 분명히 있다. 왜냐 세상은 넓고 우리가 모르는 녀석들이 태반이니까.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이 잘못됬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일을 강행하는 녀석들은 깔리고 깔렸다. 왤까? 분명히 자신들은 알고 있음에도 왜 그 일을 그만둘 수 없는걸까라고."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냐.〃
"너는 나와 만남으로써 과거의 악몽이 떠오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악몽을 벗어나기 위해 네가 한 행동들은 뭐지? 너는 잠시나마 악몽에서 벗어나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 때문에 네가 꾸는 악몽을 그들마저도 꾸게된다. 그리고 그들 또한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다가가겠지. 결국엔 악순환으로 남아 이 세계는 파멸의 길로 걷게 될거다. 그렇다면 네 옆에 있는 녀석들도 언젠간 너와 같은 악몽을 꾸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라, 그 악순환이 돌고 돌아 맨마지막엔 또 다시 네 녀석에게 돌아온다는걸…. 그리고 그 또 한 번의 악몽으로써 무너지는건 네 자신이라는걸…."
녀석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대꾸할 기력을 잃은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비로소 녀석이 기력을 잃은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꽤나 오래 걸릴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풀리게 되다니, 조금은 아슬아슬했을지도.
〃…그럼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이미 나는 되돌릴 수 없이 커다란 짐을 지고 말았는데…. 어떻게하면 그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거지?〃
"내려 놓을 방법은 없어. 그 짐을 죽을 때까지 짊어지다가 죽을 때 같이 가져가는 수 밖에 없지."
〃…그런건가.〃
"하지만 그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지."
〃그 방법이란게…뭐지?〃
"방법은 간단해. 네가 꾸고 있는 그 악몽이란 녀석을, 내게 넘겨라."
〃…뭐? 내 악몽을…네 녀석에게 넘기라고?〃
"그러므로써 너는 악몽에서 벗어나고 잠시나마 네 어깨 위에 짊어졌던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거지. 어때, 간단하지?"
〃지금…나랑 장난하자는건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너와 장난을 하러 온게 아니야. 너와 대화를 하러 온거지. 그리고 지금, 그 대화에 종지부를 찍은 것 뿐이라고…."
〃…왠지 우습군. 방금 전까진 서로를 죽이지 못해 으르렁거리던 사이였는데, 이렇게 나란히 둘러 앉아 이런 얘기나 하고 있으니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죽이려든건 너 하나 뿐이지, 나는 너와 대화를 할 목적으로 온 것 뿐이라고."
〃하지만 너도 결국엔 나를 그 검으로 베지 않았나?〃
"그럼…셈셈이 되는 셈인가?"
〃…그런 셈이군.〃
잠시나마 차분해진 공간 속에서 슬쩍 쳐다보던 녀석의 얼굴이 방금 전과는 달리 많이 온화해진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모든 일엔 대화가 필요한 법, 대화만 있다면 그 어떤 일들도 서로 헐뜯으며 끝나진 않았을 터, 만약 서로를 죽이는 전장터에서도 이렇게 대화로 풀어 나갔다면, 그들 역시 내 안에만 있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멀쩡히 있을 수 있는거겠지?
"가르톨."
〃뭐지?〃
"앞으로 너는 악몽을 꿀 리도, 꿀 수도 없을거다. 왜냐면 그 악몽을 내가 짊어지고 갈테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너의 힘이 필요하다. 다시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무고한 생명을 빼앗지도, 빼앗기지도 않겠다는 너의 말이 필요해. 빈말이라도 좋아, 그저 한순간에 흘릴 수 있는 말이라도 좋아. 하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나는 그 빈말이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러므로써 너의 악몽을 지우기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으니."
〃…빈말이라도?〃
"빈말이라도."
〃….〃
"네가 꾸는 그 악몽을, 나는 너의 운명이라 생각한다. 운명은 바꿀 수 없는거겠지. 하지만 운명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기고 이러한 일도 생기는거다. 하지만 그 말도 아주 옛날의 이야기지. 요즘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는지 아나? 운명은, '운명은 바꿀 수 있다.' 라고. 옛날 사람들이 듣기엔 별 미친놈들이 설치고 앉았네, 귀신은 뭐하나 저런 놈들 안 잡아가고.' 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네게 말한다. 네 악몽, 네 운명을 내가 바꾸어 놓겠다. 그리고 그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너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너는 그런 나의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지?"
〃….〃
"네 운명을, 너를 이 상황으로 밖에 몰 수 없던 그 기억을, 내가 바꾸어 주겠어."
〃…네 이름이 뭐지?〃
"아인. 아인이라 불러라."
〃아인, 내 운명을…네가 짊어질 필요는 없다.〃
"…그런건가, 역시 내가 너무 앞서 나간건가?"
〃내 운명은…내 스스로가 바꾸겠다.〃
"그럼 너의 대답은…."
〃나, 가르톨. 다시는 인간들을 해치거나 피해를 주지 않겠다. 만일 내가 이 약속을 어긴다면…. 아인, 네 녀석이 나를 죽여라.〃
"후회하진 않겠지?"
〃그 악몽을 꾸고 나서부터, 나는 후회란 단어를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러니 아인, 너 또한 약속해라. 내가 만약 또 다시 인간을 해친다면…. 그땐 네가 나를…죽여라….〃
P.s : 다음 편은 '엉킨 실타래' 마지막 편입니다. 즐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