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기억> - 4 -
"그만."
문 밖을 나서는 순간, 나의 허리를 감싸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뜨거워지는 옷 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아픔이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제 그만."
말을 이어가는 듯 끊어지는 숨소리가 나의 심장을 더욱 더 아려오게 만들었다. 숨을 쉬는 듯하지만 이미 오래 전 숨이 끊긴 듯 간당간당한 슬픔의 눈물이 이제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오래되어 낡아버린건지 아님 이 순간만큼은 절제되지않은 본연의 속내를 털어놓으려는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그때처럼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멈춰서있을 뿐이였다.
"제발 그만…."
바닥으로 주저 앉아버리는 크리스탈을 보며 나는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뒤돌아섰다. 축축하게 젖은 땅바닥 위로 올라오는 한기의 아픔이 더욱 더욱 더 크리스탈의 모습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러길 원해서 내가 여길 찾아온게 아닌데 그저 나는 뭔가를 밝혀내기위해 조그마한 조언 삼아 여길 찾아온 것이였는데, 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고 말았다.
아리아, 베르에트. 어찌보면 나와 관계된 사람들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주변인물들은 별로 없었다. 아니 어찌보면 내가 다른 녀석들을 상종하지않은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는 딱 하나, 내게 이들 이외에 중요한 사람들은 없었다고 간주했으니까. 또한 그들 말고는 나를 기쁘게 만들어줄 녀석들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국엔 내가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겨주게 되었고 그들의 상처가 나에게까지 퍼져 조금씩 조금씩 나의 심장과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는 사실마저 나는 잠시동안 잊고 있었다. 아니, 잊고 싶었다.
크리스탈의 눈물이 조금씩 멎어가는 듯 싶었지만 또 다시 주르륵 흘러내리며 내 한숨과 함께 바닥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왜 나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진전시키는 일이 없을까란 자책 비슷한 원망의 목소리로 내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않았고 나를 향해 비난 섞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없었다. 그저 아련하게 느껴지는 눈빛만으로도 내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그런 인자한 미소만이 내 머릿속에 그려질 뿐, 이미 내 주위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해가 반쯤 가려진 상태에서 흐려지는 이 하루가 오늘만큼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저 이유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이 하루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하루하루가 촉박하고 이럴 시간이 없다는걸 알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이 마음을 누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마냥 피식 웃는 나를, 이런 나를 내 자신이 증오한다.
내가 만약 용병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테고 그랬다면 그 이전의 일들도 모두 내게는 일어나지않을 상상 속에서만이 존재하는 기억이였을텐데….
"…."
나는 후회하고 있는걸까? 내가 선택한 이 길에 대해 원망하고 있는걸까? 내가 한 일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내가 후회를 해야하는걸까…. 난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행한 것뿐인데, 그러면 내가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행동들이 나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 힘든 적은 없었다. 단지 그 일을 계속해서 기억해서 내 자신을 지치게 만든 것 뿐, 지난 일들의 기억들 때문에 내가 힘든 적은 한 번도 없다. 후회? 이미 후회하기엔 늦었다. 또 다른 후회를 낳지않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이 기억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것뿐.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 또 한 번의 내 기억 속을 헤매고 있다.
『』
"왜 용병이 된거야?"
아리아의 술수에 넘어가 꽃을 꺾고 있던 나와 베르에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아리아를 보며 동작을 멈추며 멍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꽃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왜냐니, 당연히 나라를 위하는 일이니까."
자부심에 가득찬 베르에트의 말에 아리아와 나는 이해할 수 없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그럼 아인은?"
단순한 마인드의 베르에트에게서 옮겨진 시선이 내게로 멈춰섰다. 베르에트와는 다르게 내 말에는 뭔가 신비스러움이 묻어나올거라고 믿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빛에 약간의 부담감을 가졌지만 정작 나도 왜 내가 용병이 되었는지를 잘 모르겠다.
"글쎄…."
"글쎄라니? 그럼 아인은 용병이 된 이유가 없단 말이야?"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내가 용병이 된 이유를 잘 생각해보라는 아리아의 말을 들은 나는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역시나 내가 그렇게 용병이 되고 싶어했던 이유는 없었다. 아무 말 없는 나를 보며 뭔가를 생각하던 베르에트는 '아!'하며 내게 말했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그랬잖아.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용병에 지원했다고. 혹시 그거 아냐?"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말하는 베르에트를 보며 혹시나하는 생각에 떠올려봤지만 그건 그저 용병이 되겠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품게한 이유지 내가 굳이 용병이 되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계기는 아니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건 아버지의 복수가 용병이 되겠다는 이유가 아니였으니까.
"이상해."
어느 틈엔가 내 앞에 서있는 아리아는 나를 보며 말했다.
"굳이 이유가 필요해?"
"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거야?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자기가 하고픈 일을 하면은 안되는거야?"
약간 높아진 언성으로 내게 말하던 아리아는 금세 또 눈물을 흘린 것마냥 달아오른 두 볼로 나를 쳐다보면서 슬쩍 멍하니 서있는 베르에트를 쳐다보고는 이내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아, 아리아!!"
그런 아리아를 또 따라가는 베르에트도 이상하지만, 그런 아리아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내 자신이 조금은 우습게 여겨졌다.
「」
잠이든 크리스탈을 침대에 눕히고 나온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향했다. 끼익거리며 내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낯 익은 모습들이 내 시야에 들어오자 왠지 모를 뜨거운 감정이 내 심장을 콕콕 찌르기 시작한다.
"그동안 어딜 다녀왔니?"
금방이라도 내게 이 말을 하며 나를 꼬옥 안아줄 것만 같던 어머니가 이제는 눈 앞에 아른거리기까지 한다.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정말로 많은 것들을 보았는데, 그걸 지금이라도 내가 봐왔던 모든 일들을 어머니에게 말해주고 싶은데, 그럼 어머니는 또 다시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꼬옥 껴안아주실텐데….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애처롭게 움직이는 호롱불에 다시금 불을 붙여보지만, 너무 오랫동안 타버린 심지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듯 뚝하고 끊어지며 약간이라도 붉었던 방 안이 이제는 아무 것도 보이지않는 암흑으로 뒤덮였다.
내 주위엔 아무 것도 없었다. 있는 것 같았지만 내 눈엔 보이지않아. 분명히 내 곁에 있는데 나를 인지하지 못해. 왜냐고 묻는다면 보이지않기 때문이야. 보이지않기 때문에 존재하지않는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야. 내가 잠시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에도 사라지지않고 내 곁에 머물러있어. 언제든 내가 힘들때 손을 내밀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는데 나는 내가 보이지않는다고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내 곁에 머물며 나의 손을 말 없이 잡아주고 있었다.
"바보, 언제까지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을거야? 빨리 날 위해 꽃을 꺾어오지 못할까!"
아리아….
"조금만 기다려줘. 꼭 다시 돌아올게. 그때까지 아리아를 부탁해."
베르에트….
"…아리아를 부탁하네."
끝내 저는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내게 말했겠죠. 저는 당신이 어떠한 대답을 할지를 알기 때문에 당신에게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 한 마디에 전 또 다시 슬픔에 잠길테니까요.
"…."
아니 어쩌면, 제게 그 말을 해줄 상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러기엔 너무나도 많은 진실들이 절 기다려주지않거든요…. 그리고 그 말을 듣는다한들, 저는 더욱 더 무거워질테니까….
「 끼이익 」
조금만, 조금만 서두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너무나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하려한 말로가 이런거였다면 조금은 서두르지 않았어도 되는거였는데…. 많은 진실들을 한 번에 알아내는 것보다 하나 둘 천천히 알아내는게 오히려 더 편했을텐데….
"…."
10년이란 세월동안, 변한건 나 혼자였나….
하나도 변하지않은 방 안 풍경에 나는 또 다시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굳이 변한게 있다면, 이젠 더 이상 이곳에선 그 향이 나지 않는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나의 기분을 한 번에 풀어주던 그 향은 두 번 다신 맡을 수 없었다.
그리웠다. 그리웠기 때문에 잊고 살던걸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잊고 있던건 아니였다. 이 기억들이 떠오르면 떠오를 수록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나 자신에게 해를 입힐까봐 조금씩 그 크기를 줄였을 뿐, 단 한 번도 그 기억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곳을 찾아온걸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힘들었기 때문에, 나 혼자만으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온걸지도 모른다. 도움을 받으려면 더 일찍 이곳을 찾아왔어야했는데, 그랬더라면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었을텐데…. 한 번만이라도 더 나를 보고 웃어주길 바랬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많이 늦어버렸다….
"…."
책상 위, 먼지라도 쌓여있어야 정상인 액자 위엔 1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 담겨져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크리스탈, 그 뒤로 서로에게 장난치며 놀고 있는 아르카와 횰, 그런 그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나, 그리고…. 언제나 우릴 향해 웃어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10년 전 그때의 모습 그대로 내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안에서만큼은 어머니는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내가 돌아오면 그랬듯.
"이제 오니?"
"…."
"오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놀았니?"
"…이곳 저곳을 다녀왔어요."
"그렇구나, 힘들진 않았니?"
"…네, 힘들지 않았어요."
"다행이다. 난 또 네가 많이 힘든줄 알았는데…."
"…."
"미안하다. 네가 힘들 때, 네 옆에 있어주지 못해줘서…."
"…."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건 아인 네 몫이였는데, 정작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게 없어서, 엄마가 미안해."
"…제가 너무 늦었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왔어야하는거였는데…."
"…아인."
"…네."
"어서오렴."
"…."
"이리오렴, 우리 아들."
"…."
"내 하나 뿐인 아들, 엄마에게로 오렴…."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P.s : 즐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