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기억> - 3 -
조금은 멍청하게 들리겠지.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은 아마도 옳은 길이였음은 틀림없다. 비록 이 공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공황상태에 빠졌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 그 기회를 놓치지않고 잘 활용해야만 이 일을, 내가 죽는 그날까지도 해내려고 했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절대 멈춰서는 일은 없어야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을 나를 끝으로 사라져야만 하니까….
아까 전부터 뻐꾸기의 지저귐이 잦았다. 이 속도라면 아마도 동이 터오르려면 약 3시간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는거겠지. 지금쯤 베르에트는 그 남자를 찾아갔을거야. 단지 그 녀석이 내게 어떠한 상황이 처해있는지를 빠르게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에 달렸는데, 내가 아는 녀석이라면 지금까지도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져 곧 있으면 이승과의 작별인사를 나눌 것인가도 눈치 채지 못했을거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베르에트에게 건네준 그 쪽지를 녀석이 읽었다면 지금쯤 그곳에 있겠지. 모든 사건의 실마리를 손에 들고….
『』
피로 뒤흔든 하늘 아래 자줏빛 빗물만이 내릴 뿐이였고, 썩어빠진 대지 위에 타버린 잿더미만이 나의 발자취를 남겼다. 등 뒤로 느껴지는 용병들의 환호성과 더불어 눈물로 얼룩직 비명소리만이 간간히 나의 귀에 들릴 뿐이였고, 할 말을 잃은 나와 내 뒤를 말 없이 따라오는 가르톨의 발소리가 애초롭게만 들린다.
“아인….”
날 부르는 가르톨의 목소리에도 나는 반응하지않았다. 아니 거의 들리지도 않을만큼의 작은 음성이였다면 이해하겠지만 그 목소리는 주위에 사람들이 있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들릴 정도로 커다란 음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처없이 떠돌고 있었다.
충격, 혹은 공허만이 가득찼다. 내 머릿 속에 녹아드는 이 감정이 나의 두 다리에 저려오는 듯한 통증을 주지만 나는 개의치않고 걸었다. 누군가가 나의 팔 다리에 밧줄을 묶어 잡아 당기는 것처럼 아무런 감각도 이성도 그저 하찮은 것에 지나지않았다.
「 턱 」
내 앞을 드리워지는 그림자에도 아랑곳하지않고 나는 앞으로 걸어가다. 내 앞에 서 있던 누군가가 가볍게 부딪쳤지만 이미 혼을 잃은 듯 빈 껍데기만이 이곳에 남은 듯,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잎마냥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나에게 그 자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너가 아인이지?"
내 이름을 아는 자다. 하지만 낯선 목소리야.
"너에 대해선 소문으로 들어서 알아. 요근래에 보기 힘든 인재라고 하지?"
"…."
"초면에 이런 부탁을 하는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건 잘 알고 있지만, 너라면 이 부탁을 들어줄 것만 같아서 말이야. 어때, 나와 함께 새로운 국가를 세워보겠어?"
핏물이 베인 나의 주먹이 잃었던 방향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내 주먹이 향한 그곳에는 그 남자의 광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나가떨어지는 그의 멱살을 단숨에 붙잡으며 나는 말했다.
"그 입, 함부로 열지마."
그 말은 진심이였지만, 그 남자는 의외에 일이 벌어졌다는 듯이 놀란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가르톨은 이 상황에 다급한 듯 나에게 달려왔지만 저지하는 나의 손에 가르톨은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나와 이 남자를 지켜봤다.
"조금 당혹스러운 반응인데."
"입 함부로 열지마."
"아리아 때문인가?"
"…네 녀석이 아리아를 어떻게 알지?""
"알고 싶어?"
"…"
아니.
안다고 해서 변하는건 없어. 이미 나는….
"카르카테론."
"…뭐?"
"네가 찾는 녀석이 카르카테론, 맞지?"
"…네가 그걸 어떻."
"그게 나야."
"……뭐?"
"그게 나라…."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않는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 그 옆에는 피로 떡이 된 그 남자가 가까스로 숨을 내쉬며 누워있었던 것밖에 없다.
이후, 가르톨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의 나는 지금껏의 내가 아닌 흡사 이성을 잃은 한 마리의 괴물과도 같았다고 했다. 온 몸 구석구석에 피를 가득 흘린 채로 자신의 화를 못 이겨 자신의 몸까지 붕괘에 이르는 괴물. 만약 그곳에 가르톨이 없었다면 그 남자는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가르톨은 내게 얘기했다.
"…그 정도였나, 내가 그 정도로…."
“정말 무서웠어. 그런 모습의 아인은 처음 봤으니까….”
"…그래, 미안하다."
“아인이 사과하지않아도 되, 그때 내가 아리아를 놓치지만 않았어도….”
"…."
결국 상처를 받는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건가.
"여어."
수풀 사이로 모습을 나타낸건 그 자였다. 왜 편한 길을 냅두고 이렇게 어려운 길로 기어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매우 홀가분한 얼굴로 걸어왔고, 나는 슬쩍 그의 팔에 감겨져있던 붕대가 풀어진 것을 보곤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붕대는 쓸모 없는건가?"
"뭐. 멋이 있어서 계속 하고 싶었지만 날씨가 더워서."
멍청한 웃음을 하며 걸어오는 그를 보며 나는 하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오랜시간동안 흙바닥 위에 앉아있어서 그런지, 엉덩이에 모래알이 박힌 듯이 조금 거슬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자리를 옮기자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수풀 속으로 걸어가는 나를, 그는 한 숨을 내쉬며 내 뒤를 따라 수풀 사이로 걸어들어왔다.
"어디까지 가려는거야?"
"대화는 하고 싶지않다. 단지 네 녀석이 지칠 때까지 걸을 뿐이지."
"나 참, 아직도 그 소리야? 그거 알아? 너, 너무 고리타분해."
「 척 」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네 녀석에게 우스워보였나?"
"딱히 아니라곤 못하지, 그건 네가 더 잘 알지않아?"
"…."
"하, 이런 녀석에게 부탁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진이 빠져. 내가 왜 그 지경이 될 것이라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너에게 정체를 밝혔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감정이 욱해서 사리분별 못했다치자, 근데 그 이후에는? 넌, 답답한 놈이야. 아리아가 왜 너딴 녀석과 친구가 됬는지 모르겠다."
「 퍽 」
"거봐, 아무 것도 모르잖아? 그저, 아리아의 이름만 나오면 냅다 주먹을 날리는 꼴하고는. 그래가지고 네가 아리아의 친구라고 할 수 있어?"
"닥쳐!!"
녀석의 발언에 격해진 감정을 다시 잡을 수 있는 이성 따위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친구인 가르톨마저도 나를 말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내 손에 잡힌건 애꿎은 잡초들 뿐, 잠시 컴컴했던 시야가 자츰 밝아옴을 느낄 때 쯤, 어느센가 내 옆에 서 있던 그의 무릎이 나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내가 바닥에 고꾸라질 때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크윽!"
무방비한 상태에서 허용한 녀석의 공격에 나는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 같은 액체를 내뱉으며 붉은 눈물을 흘려 보냈다. 정신이 혼미하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마치 이 세상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처럼 내 몸 또한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서 뒤틀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후회 속에 남아있을 셈이야. 아리아가 정말로 원한게 이런거라 생각해?"
"…닥쳐."
"자기의 하나 뿐인 친구가 이렇게 폐인이 되어서 제 구실을 못하는데, 하늘에 있을 아리아가 행복할거라 생각해? 그것도 친구라는 녀석이…."
"닥치라고!!"
"내가 도와준다잖아!!!"
생각지도 못한 그 녀석의 고함이 숲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가르톨은 깜짝 놀랐는지 나무 기둥에 숨어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두 팔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모잘라 중심조차 잡지 못하는 나는 녀석의 행동에 잠시 멈춰있었다. 녀석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불끈 쥔 주먹으로 냅다 나무에 주먹을 날리지만, 꿈쩍도 하지않는 나무와 나무에 가한 충격이 그대로 자기의 주먹에 실릴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뿍' 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녀석의 고주파 음량 시스템이 발동되었다.
"쁴엑――!!!!!!!!!"
정령, 사람의 비명소린가 싶을 정도로 과한 녀석의 초음파는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메달린 근육근육한 나뭇잎들을 강냉이 털리듯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치 그날의 풍경은 하늘 위로 흩날리는 한 폭의 허리케인과도 같았다는 것만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멋있다고해야할지, 병신 같다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제 또 붕대를 갖고 왔는지 오른 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는지 퉁퉁 부은 오른 손을 살포시 무릎 위에 올린 채, 마치 길가던 고양이가 생선 찌꺼기 좀 얻어 먹겠다고 아양을 부리는 것 같이 아주 개 같이 생겼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귀여운 고양이를 욕 보인 것을 조금 손 봐주려했지만 아직도 옆구리에 가해진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혹여나 금이라도 간 것처럼 숨을 쉬는 것조차 역겨웠다. 한낱 민간인에게 당한 상처가 이리도 아플 정도로 그간 내가 수련을 게을리했던건가싶기도 한 나의 정신은 꽤나 분주히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현재 상황이 매우 거지 같은건 잘 알겠다. 어떻게서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하는 것도 당연지사고, 하지만 몇 가지 꺼림칙한 상황 중에 한 가지를 꼽는다면, 이 자식의 정체가 먼저 아닐까싶다.
"…."
놈에게 맞은 옆구리가 계속해서 압박을 가해온다. 이 상태로라면 머지않아 또 다시 기절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한 가지만은 밝히고 기절한다.
"왜, 내게 네 정체를 밝힌거지?"
"이제서야 그 이유를 묻는 너도 참…."
"시간이 없으니 쓸데없는 말은."
"알고 있어, 나도 이때까지 그 말을 기다려왔으니까. 더 이상 지체할 시간 또한 없고."
"왜지?"
"나 또한 너와 같은 심정이니까."
"…아리아와 무슨 관계냐."
"오빠."
"…뭐?"
"아리아의 친 오빠다."
「」
「 철컹―! 」
철창 안으로 들어오는 분주한 벌걸음소리에 잠깐 잠이 든 나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벌써 시간이 된건가…."
"아직은 아니다."
아침 햇살에 비추어서인지, 아님 처음부터 좋은걸 입었는지, 철창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남자의 갑옷에서 삐까뻔쩍한 빛이 반사되어 몽롱했던 내 의식을 완전히 깨우는걸 성공했다.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나인데도 역시 잠을 이기기엔 너무나도 젊은 탓인가…. 이리도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는건…썩 기분 좋지만은 않는군.
"아인, 다시 한 번 주군을 위해 헌신하지않겠는가?"
창빛에 그을린 이슬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사람의 온기가 닿지않은 곳에 사르르 녹아내린다. 새벽녘에 맺힌 이슬로 축축해진 머리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에게 그는 내게 물었다.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슬쩍 그 남자를 쳐다보며 꽤나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지?"
나의 가시 돋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의사를 말하겠다는지, 주변에 걸리적거리던 용병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며 그들을 밖으로 쫓아낸 뒤, 철창을 닫으며 단 둘 밖에 남지않음을 확인한 그는 아까 전보다는 살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함께 주군을 모셨던 용병으로써 너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거다. 물론 이건 내 임의의 행동이지만, 네가 주군께 잘못을 빈다면, 주군께서도 너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실거다."
나를 타이르는 듯이 말하는 그 말투가 그리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아무 것도 몰라. 반역자는 내가 아닌 그놈이란걸, 하지만 말해봤자 믿지않겠지. 자신들의 주군이라며 하루가 멀다하고 그놈의 뒤만 살펴보는 놈의 개인 주제에 어디서 감히….
"그 말은 즉, 내 스스로 반역자의 밑으로 들어가라, 이 말인가?"
"아인, 지금 너는 이 나라의 반역자다. 주군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도 모잘라, 그분을 욕보인 행동이 얼마나 큰 중죄인지 모르나? 지금 당장 처형에 처해도 이상하지않을 판에 또 다시 그런 실언을 하는건가!"
"네들이 그토록 따르는 그 자가 전대 주군을 죽였다. 그깟 왕권을 지니기 위해 애꿎은 반란을 일으켜 이 나라를 한 번 뒤집은 녀석이 또 한 번 세상을 뒤흔들려하는걸 막는게,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하나?"
"아인!!"
"정신차려, 이 새끼야!!!"
「 퍽―!! 」
"이 세상을…. 그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적색의 빛으로 물들게 한 장본인이다. 네들을 그토록 아끼던 그분이…. 내 하나 뿐인 친구의 아버지였다…. 그분이 죽은걸로도 모잘라, 그분이 아끼던 딸마저 죽었어…. 그런데도 네놈들은 그 녀석을 '주군' 이라 부르는건가…?"
「 철커덩―! 」
내가…이런 것들과 함께 이 나라를 지켜왔던건가….
"하…."
엿 같아….
P.s : 즐감하세요~!!